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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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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야단법석을 부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우리는 부부 사이라는 것.

    결혼한 지 이미 1년이 지났고, 같이 아이까지 만든 사이에 욕실에서 벗은 몸 좀 보인 것은 사실 별거 아닌 일이긴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몸은 엘프윈의 몸이라는 것.

    나는 나고, 엘프윈은 엘프윈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순간마다 선택적으로 엘프윈의 몸과 나의 정신을 확실히 분리하고는 하는데, 바로 이런 순간이 그러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렸지만 사실 별 효과는 보지 못했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더욱 그랬다.

    뾰로통한 얼굴로 제크론을 봤다.

    “몇 번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난 당신이 혼절이라도 한 줄 알고 그랬어.”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고맙지 않아요.”

    이게 무슨 말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심정이 정말 이랬다.

    제크론은 진찰을 마친 강아지를 데리고 내 방으로 왔다고 했다.

    목욕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욕실 문 밖에서 몇 번이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서 혹시나 하고 문을 열어 봤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물속에 잠겨 있으니 놀라서 헐레벌떡 달려들었던 모양이었다.

    상황 설명을 다 들었지만 놀라고 분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입이 툭 튀어나왔고, 콧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괜히 심술이 났다.

    간단한 치료를 마친 강아지는 지금 내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낯선 곳인데도 곤히 잠든 것은 힘든 하루를 보낸 탓이리라.

    “쓸려서 상처 난 발바닥은 연고를 발랐고, 갑자기 무리하게 달려서 관절이 놀란 것 같다고 다리 찜질도 했다고 매튜가 그러더군.”

    안 그래도 목욕 후라서 몸이 노곤노곤했는데 편안한 동굴 저음을 듣고 있으려니 졸음이 몰려왔다.

    하아암, 입을 다소곳하게 가리고 하품을 하는데, 제크론이 내 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당신한테 줄 게 있어.”

    “뭔데요?”

    나는 제크론이 내미는 작은 상자를 받았다.

    열어 보니 안에 목걸이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졸려서 풀려 있던 눈꺼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와아… 예뻐요.”

    다행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랬지만, 속으로는 ‘어맛! 이게 다 얼마짜리야? 다이아몬드가 몇 개나 박힌 거야.’라고 꽤 속물적인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 개의 가는 줄 전체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게다가 가운데에는 내 이름 첫 글자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 역시 작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영지 내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더니, 이 사람은 다이아몬드가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선물은 왜요?”

    “당신 오늘 사교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거라서 서프라이즈로.”

    “아.”

    오늘 일정이 처음이었다고?

    설마 엘프윈은 그동안 사교모임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던 건가?

    주목받는 윌트슨 공작가의 안주인치고 꽤 조용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면 엘프윈은 나씨나길 충만한 인생을 살아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모임엔 참석 못 했지만, 선물은 받았네요. 고마워요.”

    “…응.”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번에도 역시 내 ‘고맙다’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쯤 되면 거의 자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 ‘고맙다’라는 버튼을 누르면 볼 빨간 제크론을 보실 수 있다고요!

    “한번 해 볼래?”

    “좋아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서 들었다.

    제크론이 갑자기 훅 가까이 다가왔다.

    ‘으잉?’

    목걸이를 걸어 주려면 당연한 일인데도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목걸이를 조심히 내 목에 걸어 줬다.

    제크론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어느새 가까워진 그의 숨결이 내 귓가를 스칠 때마다 움찔 떨렸다.

    ‘으… 너무 가까워.’

    긴장한 나머지 숨을 내쉬는 것도 까먹은 채 어서 끝나기만을, 그래서 제크론이 멀어지기만을, 그와 나 사이에 다시 적당한 거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다 됐어.”

    “와아!”

    지금 이 감탄사는 목걸이가 예뻐서 터트린 감탄사가 아니라, 드디어 그가 내 몸에서 떨어질 것을 기대하는 데서 나온 감탄사였다.

    얼른 거울로 달려가 목걸이를 봤다.

    지금 이 행동도 목걸이를 찬 내 모습을 어서 빨리 보고 싶어서 달려갔던 게 아니었다.

    제크론과의 충분한 거리를 단시간 내에 확보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은 어색했다.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것과 한 뼘 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좋아요. 고마워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제크론이 묻자 나는 생긋 웃어 보이며 산뜻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별로 산뜻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해. 힘들게 노력하지 말고.”

    “네?”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

    깜빡깜빡.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 원래 남과 닿는 거 싫어하잖아. 예전에는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표현했는데, 요즘엔 그냥 참고만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엘프윈이 그랬구나.

    사람과의 접촉이 싫고, 그것을 대놓고 표현하는 쪽이었구나.

    엘프윈의 경우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내 경우는 사람과의 접촉이 싫다는 것보다는 낯선 사람과의 접촉이, 특히 낯선 이성과의 접촉이 불편한 거다.

    단지 불편하고 긴장될 뿐 께름칙하게 싫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래도 엘프윈과 나 사이에 이런 비슷한 점이 있어서 그가 나를 엘프윈으로 오해해 주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말이다.

    “…참고만 있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거예요.”

    “노력?”

    “어쨌든 우린 부부니까요. 당신이 노력하는 것처럼 나도 노력해야죠.”

    “…….”

    “정 불편하면 그땐 얘기할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맙다’는 버튼을 누르자 볼 빨간 제크론이 나타났다.

    후후, 남편의 한결같음에 웃음이 났다.

    괜히 민망해진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아!”

    그때였다.

    태동이 느껴졌다.

    갑자기 내가 배를 부여잡자, 제크론이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매튜를 부를까?”

    그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자세를 취하자,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가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의 손을 내 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느껴져요?”

    “아….”

    늘 서늘하게 길게 뻗어 있던 그의 눈매가 동그랗게 커졌다.

    꾹 다물어 있던 입도 동그랗게 벌어졌다.

    ‘아마 난생처음 만져 보는 거겠지?’

    나도 전생의 삶에서 임신한 친언니의 배를 처음 만졌을 때가 떠올랐다.

    무척이나 신기한 감각이었다.

    “어때요? 신기하죠?”

    “그런데….”

    순간 그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아이가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면 당신이 힘든 거 아니야? 이러다가 배 안쪽 어디가 찢어질까 봐 걱정이군. 역시 매튜를 호출해야겠어.”

    다시 자리를 뜨려는 제크론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요.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배가 찢어질 염려는 없어요. 인간의 몸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거예요. 태동은 아이가 건강하다는 증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긴장되는지,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괜찮대도요. 힘 빼요.”

    그의 미간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살살 문질렀다.

    그의 눈동자에 또다시 놀라운 빛이 번졌다.

    “당신이 먼저 만지는 건 괜찮나 보군.”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한 손은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머쓱해진 나는 두 손을 슬쩍 내렸다.

    피식, 제크론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약하게 토닥토닥거리는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더욱 그랬다.

    순간순간 훅훅 들어오는 제크론의 이런 다정한 행동은 나를 심히 당황케 만든다.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남자 주인공의 다디단 손길과 눈길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는 캐릭터가 과연 있을까?

    아니, 절대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뛰었다.

    ‘지금 뛰고 있는 건… 엘프윈의 심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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