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42)
  • 31화

    슈라더 후작 부인과 도론 공녀, 그리고 핸더슨 공녀는 디저트 가게에 들어갔지만, 나는 제크론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마차 안에 제크론과 단둘이 남자마자 설움이 복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 왜 눈물이 나지? 흐흑… 미안해요. 진짜 왜 이러지? 흐흐흑… 이게 다 호르몬 때문에 그래요!”

    “뭐? 호르, 뭐? 그게 뭔데?”

    “흐흑… 아니, 감정 기복이 커졌다고요…. 어흐흑….”

    엉엉 우는 나를 제크론은 제 품으로 끌어다가 안아 줬다.

    너른 그의 품은 의외로 포근했다.

    눈가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그의 코트를 적시고 또 적셨다.

    제크론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토닥 쓸어 줬다.

    갑자기 왜 그렇게도 서러워졌던 걸까.

    사실 내가 울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끔찍한 동물 학대 현장을 목격했고, 화가 나 그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험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때마침 도착한 제크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방식대로 현장을 수습했다.

    그뿐이었다.

    눈물이 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인 게 맞다.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당신은 예전부터 메리엔 도론 공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내내 잠자코 있던 제크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뭐? 엘프윈이 도론 공녀를 싫어했다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 도론 공녀가 강아지를 함부로 대하는 걸 목격했다고 했지. 그다음부터였어, 당신.”

    “…….”

    “도론 공녀와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싫어했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도 말이야.”

    속삭이듯 옛날이야기를 꺼내 놓는 제크론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내 귓가에 감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눈물콧물 범벅인 내 얼굴이 웃겼는지 푸스스,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크론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줬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놔두며 가만히 있었다.

    온전히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감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오늘 저 작은 강아지를 구한 거야. 이건 오래전부터 짜 뒀던 우리의 계획이야.”

    아아… 이렇게 멋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내는 이 잘난 남자 주인공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흐흐흑…. 아아흐흑….”

    겨우 잦아들었던 울음이 다시 거세졌다.

    진짜 호르몬, 내 이것들을 그냥, 콱!

    *   *   *

    제크론은 엘프윈을 남겨 둔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강아지를 품 안에 안고 서 있던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공작 부인은 오늘 모임 참석이 힘들 것 같군. 케이트, 너는 공작 부인과 함께 먼저 성으로 돌아가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곁에 섰던 보좌관 조쉬 멀론이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들고 따라와.”

    “네, 알겠습니다.”

    제크론은 가만히 서서 엘프윈이 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봤다.

    차창으로 엘프윈과 눈이 마주쳤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눈이 안쓰러웠다.

    엘프윈이 제크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이를 목격한 조쉬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공작 각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마님이라니.

    조쉬는 제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마님은 변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그런데 이번엔 조쉬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옆에 섰던 윌트슨 공작이 쭈뼛거리며 손을 올리더니 마차를 향해 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조금 수줍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각하도 변하셨어.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군.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건지….’

    조쉬는 애써 얼굴에서 경악의 빛을 지워야 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는 제크론을 보며 조쉬는 침음을 삼켰다.

    마차를 보낸 뒤 제크론과 조쉬는 디저트 가게로 들어가 슈라더 후작 부인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다.

    슈라더 후작 부인과 도론 공녀, 그리고 핸더슨 공녀를 제외하고도 네 명의 귀부인들이 더 있었다.

    여인들의 시선이 모두 제크론에게 꽂혔다.

    “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가시고, 윌트슨 공작님 혼자서만 오셨나요?”

    슈라더 후작 부인이 물었다.

    “이런 죄송하게 됐습니다, 후작 부인. 사실 아내는 후작 부인의 초대를 받고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게 돼서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모임 참석이 힘들 것 같습니다.”

    사과의 말을 건네는 제크론의 태도는 꽤 정중했다.

    “어머, 저런!”

    “이 앞까지 오셨는데… 결국 돌아가셔야 하는 건가요?”

    “아쉽네요, 만나 뵙고 싶었는데.”

    귀부인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하지만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특히 도론 공녀는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 임신 중일 때는 몸 컨디션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왔다 갔다 하죠. 다 겪었던 일이라 이해합니다. 괜찮아요.”

    슈라더 후작 부인이 어른다운 면모를 빛내며 인자하게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가 처음 모임에 참석하는 자리라 제 나름대로 아내를 놀래켜 줄 생각으로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는데 서프라이즈 선물 대신 사과 선물이 되었네요. 부디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크론의 손짓에 뒤에 서 있던 조쉬가 앞으로 다가와 들고 있던 가방을 열고는 선물 상자를 하나하나 꺼내 귀부인들에게 나눠 줬다.

    상자를 연 여인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머머! 이 귀한 것을!”

    “아유, 예뻐라!”

    “세상에나! 다이아몬드라니!”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있었는데 각각 귀부인들 이름 이니셜 모양이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 역시 값비싸고 아름다운 선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부디 부인들의 마음에 들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다마다요. 이 어여쁜 브로치를 선물 받고 기쁘지 않을 여자가 과연 있을까요? 윌트슨 공작님, 아무리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한 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무리한 건 아닌지요.”

    슈라더 후작 부인의 입꼬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움찔움찔 위로 올라갔다.

    “해야 한다면 무리라도 해야죠. 아내를 위한 것인데요. 그러니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크론이 예를 갖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머머, 또다시 여인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쩜 이리도 다정하실까요!”

    “그러게요. 윌트슨 공작 부인은 무슨 복을 타고난 걸까!”

    여인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렸지만, 그 소리가 제크론의 귀에도, 저 뒤에 서 있던 조쉬의 귀에도 확실히 들렸다.

    이 정도의 반응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제크론은 괜히 뿌듯해졌다.

    “다음번엔 윌트슨 공작 부인도 몸 상태가 좋아서 꼭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곧 기별 넣을게요.”

    “그러게요. 아니면 다음엔 윌트슨 공작성에서 모임을 갖는 건 어떨까요?”

    슈라더 후작 부인의 인사말에 핸더슨 공녀가 덧붙였다.

    그러자 도론 공녀가 타박하듯 입을 열었다.

    “제나, 호스트께서 초대하기 전에 먼저 초대해 달라고 조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걸 잘 알면서.”

    “어머, 제가 무례했어요. 윌트슨 공작께서 너무 다정하셔서 제가 주제넘었네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제나 핸더슨 공녀가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내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내도 무척 기뻐할 겁니다.”

    말을 마친 제크론이 싱긋, 미소 짓자 거기에 모인 여인들의 눈동자에 핑크빛 불이 켜졌다.

    가게 안 공기마저 핑크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   *   *

    공작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따뜻한 욕조물에 몸을 담갔다.

    졸지에 데리고 오게 된 털북숭이 강아지는 매튜가 진찰을 맡아 주기로 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나는 몸을 낮춰 머리끝까지 욕조물 안으로 잠수했다.

    소음이 차단된 물속은 고요했다.

    내내 덜커덩거리던 가슴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제크론.’

    그리고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크론이 왜 거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등장 덕분에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푸우후….”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이놈의 오지랖….’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물론 후회되는 건 없었다.

    제크론의 말처럼 결국 가여운 생명을 구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받으면 안 됐어.’

    끝까지 갔다면 결국 내가 처참하게 지는 싸움이 됐을 것이다.

    제국법에서 동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몰랐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전생의 대한민국에서는 반려동물들을 주인의 사유재산쯤으로 취급했다.

    의식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동물들을 물건 취급 하며 학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소위 배웠다는 귀족 영애가 제 반려견을 그런 식으로 대한 것만 봐도 훤히 보였다.

    그녀의 행동을 따져 묻는 내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빽빽 소리쳐 대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물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 또 제크론을 떠올렸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걸까?’

    내가 삿대질해 가면서 마구 고함치고 있는 모습까지 다 봤을 것을 생각하면 창피했다.

    ‘그렇다고 강아지를 아예 사 버리다니….’

    처음엔 갑작스럽고 엉뚱한 결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볼썽사나운 싸움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결정이었다.

    ‘…고마워요, 제크-’

    속으로 조용히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쌓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움켜잡고는 내 몸을 물 위로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어푸, 푸후! 꺄악!”

    “엘프윈! 괜찮아?”

    놀란 나는 냅다 소리를 질러 댔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눈을 떠 보니 제크론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날 보고 있었다.

    “뭐예요, 당신? 놀랐잖아요!”

    “아… 그, 그게….”

    순간 제크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가 이쪽으로 도르륵, 저쪽으로 도르륵 굴러갔다.

    “난… 그러니까… 당신이 쓰러졌을-”

    뒤늦게 욕실에서 목욕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헐벗은 몸을 재빨리 두 팔로 가리며 빼액 외쳤다.

    “나가요! 당장!”

    “미, 미안해!”

    헐레벌떡 뛰쳐나가는 제크론의 뒷모습을 본 나는 다시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아이씨… 이너 피스… 이너 피스…!’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하지만 평화는커녕 낭패감만 몰려들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커덩덜커덩 불안한 소리를 만들었다.

    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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