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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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온몸에서 열이 뿜어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나를 경악케 만든 것은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가던 화려한 마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마차 뒤에 목줄이 매달린 채 달려가던 새하얀 털북숭이 강아지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헥헥거리는 개는 지쳐 보였고 다리까지 절뚝거렸다.

    “거기 서!”

    있는 힘껏 외치면서 달려 보려 했지만, 임신 7개월 차로 접어들고 있는 무거운 몸으로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케이트, 당장 달려가서 저 마차를 세워!”

    “네, 마님.”

    내 명령에 곧바로 날쌔게 달려간 케이트는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거기! 마차를 멈추세요! 멈춰요!”

    서서히 속도를 줄인 마차는 마침내 멈춰 섰다.

    “무슨 일이오?”

    마부가 인상을 팍 쓰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잰걸음으로 달려간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마부를 향해 빼액,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마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더욱 힘껏 외쳤다.

    “저 불쌍한 개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요! 지금 당장 풀어 줘요, 당장!”

    꽉 말아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이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상식 이하의 행동이었다.

    인간 이하의 인간 같으니라고!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그때였다.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의 마차라면… 상식 이하의 행동을 저지르는 인간 이하의 인간은 저 마부가 아니라 이 여자겠구나.’

    귀족이 서로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눠야 한다는 귀족 간의 예의범절 같은 것은 완전히 잊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마차에서 나온 여자를 째려봤다.

    그리고 강아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 강아지인가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 차림새로 보아 귀족인 걸 눈치챘던 것일까.

    그녀가 마차 문을 열 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강아지를 마차 뒤에 매달고 달리는 발상은 대체 어떤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 이거 엄연히 학대입니다!”

    나도 소리치는 대신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어 강력하고 명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어머머머, 무슨 말을 그렇게 막 하세요? 참 나!”

    귀족 영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녀는 갑자기 열이 확 오르는지 부채질을 거세게 시작했다.

    “방금 내가 목격한 광경이 무척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막 나오는 거랍니다!”

    “당신 대체 누군데 남의 집 일에 관여하는 거죠?”

    “남의 집 일이라고요? 마차에 끌려가는 저 가여운 강아지가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요? 실상은 물건보다 못한 대우를 하면서 말이죠!”

    채앵!

    그녀의 눈빛과 내 눈빛이 날카로운 창검이 되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이 개는 우리 집 개, 웨이예요. 그러니까 그쪽한테는 남의 집 일이 맞죠. 지금 운동 중이었으니 방해하지 말아요!"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꼴이야 정말, 맨 나중 말은 속삭이듯 뱉었지만 내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고 다시 따져 물었다.

    “운동 중이라고요? 미치셨어요? 마차 뒤에 묶여서 헥헥거리면서 절뚝이는 게 운동이라는 건가요? 영애는 운동을 그렇게 하나 보죠? 내가 말로만 들어서는 납득이 잘 안 되니까, 좀 보여 줄래요? 마차 뒤에 매달린 채 운동하는 모습이요!”

    “아니! 이 여자가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채앵! 챙!

    다시 그녀의 눈빛과 내 눈빛이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새하얗던 영애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내 얼굴도 마차가지였을 것이다.

    그때였다.

    “엘프윈, 당신 여기서 뭐 해?”

    어디선가 익숙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아, 공작님! 오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에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케이트였다.

    그동안 내내 얼음처럼 얼어 있던 하녀가 제크론을 보고 넙죽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제크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의 품 안에는 조금 전까지 마차 뒤에 매달려 있던 가여운 털북숭이 강아지가 안겨 있었다.

    “끼잉… 낑….”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강아지는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그의 눈동자 색을 닮은 남청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하얀 강아지를 안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림 속에서 막 튀어나온 인물인 것 같았다.

    이상했다.

    제크론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울면 안 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어금니라 빠득 사리물었다.

    하지만 그를 담은 내 시야가 자꾸만 일렁거렸다.

    “아… 윌트슨 공작님. 그러면 이분은 윌트슨 공작 부인이셨군요.”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여자는 제크론은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긴 워낙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니까.

    까딱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한 제크론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론 공녀. 오랜만입니다.”

    응? 뭐라고?

    도론 공녀라면… 메리엔 도론?

    뜨아… 그녀에게로 향한 내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새까만 눈동자까지.

    그녀가 메리엔 도론 공녀였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제크론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예상치 못한 전개가 이어지자 나는 상황 파악이 힘들어졌다.

    ‘메리엔 도론 공녀.’

    내가 슈라더 후작 부인의 초대에 무조건 참석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먼 훗날 펼쳐질 원작 소설의 주요 사건에서 제크론과 베로니카를 적극적으로 돕는 비중 높은 조연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여기에 다들 모여 계셨네요!”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거기엔 금발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또 다른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제나 핸더슨 공녀!’

    그래, 당신이 나올 차례지.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는 이종사촌 지간으로 언제나 한 세트처럼 움직였다.

    몇 년 후, 쉐리던 제국은 다시 전쟁의 도가니에 휩싸이게 되고, 전쟁 영웅이었던 제크론마저 마물에게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른다.

    지지부진 이어지던 전쟁에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메리엔 도론 공녀와 제나 핸더슨 공녀였다.

    그들은 훌륭한 언변술과 사교술로 로비스트로 활약하게 되고, 각 진영의 의견을 적절히 수렴하여 결국 쉐리던 제국은 평화를 되찾게 된다.

    그들의 활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나 핸더슨과 메리엔 도론은 전쟁 후에도 제국의 안정화에 크게 이바지하며,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측근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응원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그녀들의 모습은 세상 멋진 전사들이었다.

    칼과 방패로 싸우는 전사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과 직관적인 판단,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와 매력적인 화법으로 싸우는 전사들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동물 학대범이었다니.’

    실망, 실망, 대실망이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동물을 아끼는 마음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제국의 승리를 위해, 제국을 위해 헌신을 다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게 그 사람의 인성이야.’

    물론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실수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가족인 반려견을 아무렇지 않게 학대하는 것을 실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이건 그 사람의 인성이다.

    뿌리 깊은 인성.

    바뀔 수 없는 인성.

    아직 더 겪어 봐야 알겠지만, 메리엔 도론 공녀의 인성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러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메리엔, 너 얼굴이 왜 그래?”

    이제야 막 도착한 제나 핸더슨 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녀석, 제가 살 수 있을까요?”

    생글생글 미소를 얼굴 가득 장착한 제크론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잉?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 왜 그래요?’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값은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 강아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강아지를 몹시 키우고 싶어 했거든요.”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어안이 벙벙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날선 신경전을 벌이던 메리엔 도론 공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번 벌어진 그녀의 입이 다시 다물어질 줄 몰랐다.

    정적을 깨고 나선 것은 제나 핸더슨 공녀였다.

    “값이라뇨.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강아지는 저희 쪽에서 선물하는 것으로 하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가격을 말씀해 주시면 바로 수표를 써 드리겠습니다.”

    제크론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냈다.

    하지만 제나 핸더슨 공녀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강아지는 선물로 드릴게요. 대신 언제 한번 저와 메리엔을 윌트슨 공작성으로 초대해 주세요. 저희의 오랜 소원이었거든요.”

    제크론이 내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이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꼭 초대하도록 하지요. 그럼 이 아이는 윌트슨 공작성에서 잘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네. 웨이 잘 부탁드려요.”

    마침내 메리엔 도론 공녀의 입에서도 납득과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상황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데 슈라더 후작 부인이 도착했다.

    “내가 좀 늦었죠? 미안, 미안요. 그런데 왜 다들 밖에 나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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