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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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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크레이그 셰넌 대신관 앞에 섰다.
두 치유 신녀들은 어제 있었던 엘프윈 윌트슨 공작 부인의 치료 과정에 대한 보고를 드리는 중이었다.
“대신관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아미트 신녀.”
“처음에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머금은 빛구슬들이 공작 부인의 몸 전체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성의 빛구슬들이 공작 부인의 몸 안에서 스스로 빛을 발했습니다!”
“그럴 리가. 보통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간 빛구슬들이 빛을 잃는 경우와는 확실히 달랐다는 말인가요?”
“네, 그랬습니다. 너무도 기이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공작 부인의 몸 전체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미트는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그려지는지 멍한 눈빛으로 말을 두서없이 이어 갔다.
“그… 태양처럼 말입니다. 치료하는 한 시간 내내 그런 상태였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베로니카 신녀도 같은 것을 봤습니까?”
“네, 대신관님. 저도 아미트 신녀님과 같은 것을 봤습니다.”
대신관의 물음에 그동안 내내 닫혀 있었던 베로니카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크레이그 셰넌의 눈썹 사이가 잔뜩 좁아지며 깊은 계곡이 생겼다.
아미트가 다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요, 대신관님? 제가 치유 신녀로서 환자들을 치료한 지 30년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말로만 듣고는 확실히 그 진상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음 달 신성수 치료에는 동석해서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대신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빛났다.
집무실 안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곁에 섰던 아미트와 베로니카도 대신관의 날 선 표정 변화에 몸이 움찔 떨릴 정도였다.
* * *
슈라더 후작저는 역시 문화예술계를 진두지휘하는 가문다웠다.
저택 곳곳에 놓인 가구와 소품들이 모두 다 예술작품 같았다.
벽 곳곳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인 것 같았다.
제크론과 내 초상화만 걸려 있는 윌트슨 공작성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이곳에 비하면 윌트슨 공작성은 몹시 휑한 분위기였다.
“와아, 저택 전체가 예술품 전시회장 같아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손뼉을 치는 것도 잊지 않고.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게 칭찬일 테다.
아부의 향기가 진한 칭찬에 슈라더 후작 부인이 호호호, 연신 웃었다.
“이 정도로 뭘 그러세요. 하스에 있는 후작성에 오시면 더 놀라시겠어요!”
“언젠가 꼭 초대해 주세요. 가 보고 싶어요!”
나이스!
어제 대신전에서 치료를 받은 덕에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걸까.
순도 100퍼센트의 리액션이 막힘없이 술술 쏟아졌다.
내가 후작 부인과 앞서 걸으며 하하호호 떠드는 사이, 제크론은 슈라더 후작과 함께 조용히 뒤에서 걷고 있었다.
지난 연회에서는 못 봤던 슈라더 후작은 키가 껑충 크고, 다소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케이트 말에 의하면 슈라더 후작 부부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인데, 귀족 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은 연애결혼을 했다고 했다.
슈라더 후작 부인의 적극적인 구애는 당시 사교계에서 큰 화제였다고 했다.
저택 소개를 마친 델리아 슈라더 후작 부인은 우리를 3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딸린 커다란 테라스에 티타임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테라스로 나간 나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3층에서 내려다보는 후원은 또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으니 말이다.
정원 곳곳에 비치된 조각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잘 가꿔진 관상목과 기하학 모양의 벤치들, 그리고 작지만 화려한 분수대까지.
하나하나 다 훌륭한 작품인데, 그것들의 배치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합쳐 놓고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예술 작품이었다.
이쪽으로 도르륵, 저쪽으로 도르륵 굴러다니는 내 눈동자를 보고 후작 부인의 어깨가 으쓱으쓱 하늘로 솟구쳤다.
“맞아요. 대단하죠? 공간 예술가 코비 슈워츠먼 경이 후원 전체 디자인을 맡아 주었지요.”
“어머나, 역시 예술 작품이 맞았군요.”
“그럼요.”
호호호, 자부심 진한 웃음이 응접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긴, 자부심 가질 만도 했다.
‘이런 정원이라면 완전 인정!’
우리는 널따란 테라스에 마련된 화려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예술 작품이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의 티타임이라니! 매우 귀족적이군!’
내적 탄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와 쿠키들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지만, 솔직히 맛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 자체가 너무 황홀해서 모래알로 만든 케이크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자, 오늘 모임의 본론으로 들어가야죠. 실내악단 세 팀이 준비 중이랍니다.”
“세 팀이나요?”
“네, 슈라더 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들 중의 인재들입니다. 들어 보시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악단을 고르면 되세요.”
자부심이란 녀석은 오늘 하루 종일 슈라더 후작 부인의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첫 번째 악단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세팅을 시작했다.
4중주 악단의 구성원은 여자 둘, 남자 둘이었고, 모두 30대 중반 이상으로 적지 않은 경력을 보유한 연주자들 같았다.
곧 세팅이 완료된 악단의 연주가 시작됐다.
감미로운 선율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음악 문외한의 내 귀에는 충분히 괜찮은 연주로 들렸다.
마침내 세 팀의 연주가 다 끝나고 슈라더 후작 부인이 묻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전 세 팀 다 괜찮은 것 같아요. 당신은 어땠어요?”
잘 모를 때는 제크론에게 떠넘기기 작전!
“나도 마찬가지야. 내 귀에도 다 좋게 들렸어.”
저런, 이번엔 별로 도움이 되는 카드는 아니었군.
세 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나와 제크론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슈라더 부인은 우리의 반응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여상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 톤을 바짝 높였다.
“사실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 했던 말을 듣고 생각하는 바가 많았답니다.”
“제… 어떤 말이요?”
윽,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순간 당황했다.
“음악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잖아요.”
“아아, 그 얘기요.”
“그래서 저도 따라 해 보고 싶어졌지 뭐예요?”
“네? 따라 하다니요?”
“이번에 우리 저택도 실내악단을 고용할 생각이에요.”
“정말…이세요?”
진심으로 놀랐다.
황궁 연회에서 만났을 당시, 그녀는 공작성에 상주할 실내악단을 고용하겠다는 계획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실내악단을 고용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옆에 앉았던 제크론도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라는 눈치였다.
슈라더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후작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낌새를 보아하니 부부 사이에 완전한 합의를 이룬 사항은 아닌 것 같았다.
오호호, 후작 부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네, 정말로요. 그동안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몰라요. 음악은 파티나 공연에만 사용되는 것쯤으로 치부했죠.”
“아, 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이 제 고정관념을 깨 줬어요. 눈이 확 떠졌다고 할까요? 언제나 음악이 흐르는 저택이라니…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후작 부인은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끄덕끄덕.
고개를 열렬히 위아래로 끄덕이며 후작 부인을 바라봤다.
내 생각이 그녀에게도 통했다니!
기뻤고, 또 뿌듯했다.
후작 부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브랜차드 자작 부인도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저 세 팀을 우리 세 가문에서 고용해서 일주일에 이틀씩 순회 공연하는 방식으로 고용하면 어떨까 해서요.”
“브랜차드 자작 부인? 허드플란의?”
뭐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갑자기 슈라더 후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 맞아요. 왜요? 껄끄러워요? 아휴 참, 이이는 매번 이렇다니까.”
후작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대뜸 제크론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참에 물어봅시다. 윌트슨 공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허드플란이나 렐바크 출신 귀족들과의 사교에 대해서 말이에요.”
“…….”
“조심하거나 쉬쉬하거나 해야 할까요? 아니, 대체 언제까지요? 우리 이제 쉐리던 제국으로 한 몸인 사이인데 말이에요.”
슈라더 후작 부인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인지 다다다 열변을 토했다.
제크론의 얼굴에서 난처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의 이런 표정은 또 처음이라 나는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그들을 지켜봤다.
이제는 사라진 허드플란 왕국과 렐바크 왕국.
이 두 왕국은 서로 연합하여 쉐리던 왕국을 침략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 끝에 결국 쉐리던이 승자가 되었고, 두 왕국을 흡수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그게 벌써 2년 전의 일이었지만, 쉐리던 제국은 아직 완전히 하나로 통합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과거의 적이었던 귀족들은 한데 섞여 어울리는 것을 꺼려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귀족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국민들도 출신지에 따라 편을 가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서 갖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했다는 내용을 원작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드디어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화합에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미뤄 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제크론의 한마디, 한마디에 슈라더 후작 부부가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실내악단 고용 건으로 함께할 기회가 생긴다면 굳이 피할 필요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그것 봐요, 당신. 윌트슨 공작도 괜찮다고 하잖아요.”
제크론이 편을 들어 주자 사기가 고양된 슈라더 후작 부인이 팔꿈치로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을 흘겼다.
이에 질세라 후작이 끄응, 하는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직 마음을 다 터놓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맞는 말입니다.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그것 봐! 공작도 조심해야 된다고 하잖아.”
이번엔 제크론이 슈라더 후작의 편을 들어 주자, 후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서로 조심한다는 건… 누구를 만나든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처음엔 조심하며 삼가는 마음도 있어야죠. 하지만 곁을 내주는 것 자체를 꺼려 할 필요는 없잖아요? 패전국 출신이라는 편견을 처음부터 아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어머나, 어쩜 말을 이리도 조곤조곤 예쁘게 하실까.”
후작 부인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토닥거렸다.
보드랍고 통통한 그녀의 손길이 다정했다.
“후작 부인의 계획에 저도 동의해요. 세 저택에서 세 악단을 동시에 고용해서 순회 연주를 하는 거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내가 제크론을 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실내악단을 고용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나는 슈라더 후작 부인의 애정 어린 관심도 받게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또 다른 티파티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가 아니라 마음 맞는 귀부인들이 모여서 카페 투어를 하는 식의 자리라고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초대된 멤버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러야 했다.
‘그 모임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