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대신전에는 주치의 매튜가 동행했다.
대신전은 제도 외곽에 있는 스멀더스 산 중턱에 위치했는데, 거대한 첨탑을 위시한 새하얀 건물은 산 아래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나와 매튜를 태운 마차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님께서 마차 여행이 불편하지 않도록 공작 각하께서 특별히 주문한 마차라고 들었습니다.”
“그이가요? 아, 어쩐지 그래서 흔들림이 덜했군요.”
“네, 맞습니다.”
이건 내가 부탁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먼저 생각해서 주문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치료실에는 마님 혼자서 들어가시게 될 겁니다.”
“…….”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신성수 치료를 시행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매튜의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신전의 치료법에 대해서는 원작 소설에서 읽은 바가 있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원작 소설에서 제크론은 마물과의 전투 중 큰 부상을 입는다.
사경을 헤매는 그의 치료를 대신전에서 맡게 되고, 치유 신녀가 된 여자 주인공, 베로니카와 만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에 벌어질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대신전과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제크론이었는데, 이번 일로 접점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만남이 앞당겨질 수도 있겠지.’
씁쓸한 상상이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상이기도 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떨렸다.
오늘 이곳에서 베로니카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긴장하고 들뜨게 만들었다.
* * *
안으로 들어선 나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대신전 건물의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대체적으로 흰색이었다.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까지 모두 그랬다.
신관들과 신녀들의 복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매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기다란 흰색 로브 스타일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은발 머리카락이었는데, 성년이 되어 신성력이 발휘되면서부터 머리색이 은발로 바뀐다고 했다.
매튜의 은발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갖는 유전적인 특성이지만, 신관이나 신녀들의 은발은 신성력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얻은 특징이다.
나와 매튜는 작은 응접실로 안내됐다.
환자 대기실인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조그마한 신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저는 대신전의 보좌 신녀, 라일라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치료는 신성수 치료실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먼저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매튜를 홀로 남겨 두고 신녀를 따라갔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드레스를 혼자 벗고 입어 본 적 없는 나는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드레스를 벗는 데 애를 좀 먹었다.
이곳의 옷들은 단추나 매듭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음에 마담 린다를 만나면 단추와 매듭의 수를 현격하게 줄인 디자인을 제안해 봐야겠어.’
경악에 찬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대신전 전체의 분위기가 매우 엄숙했기에 함부로 키득거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다시 라일라를 따라갔다.
신성수 치료실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여서 햇빛이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많은 수의 등불과 하얀 돌로 만들어진 벽 덕분에 어둡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치료실의 중앙에는 사람 대여섯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신성수이리라.
‘드디어!’
꼴깍, 마른침이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내 앞으로 두 명의 신녀들이 다가왔다.
앞에 선 신녀는 통통한 중년의 여인이었고, 뒤에 선 신녀는….
‘그녀다! 베로니카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역시 남달랐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은발 머리에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
새하얀 피부 위에 어여쁜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자리한 얼굴은 베로니카가 맞았다.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저는 부인의 치료를 담당하게 된 치유 신녀 아미트이고, 이쪽은 저를 보조해 주는 수습 치유 신녀 베로니카입니다.”
“안녕하세요, 베로니카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 주인공을 마주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한번 베로니카에게 꽂힌 내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깜빡이는 눈꺼풀의 움직임, 인사할 때 입술의 움직임, 내 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또 완벽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치유 신녀 아미트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신성수 욕조로 안내했다.
그녀가 먼저 욕조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물은 차가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아서 몸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습 치유 신녀라는 베로니카는 욕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선 채 그대로 있었다.
‘아직 수습이라서 보조 역할만 하나 보다.’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신녀 아미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는 편한 마음과 자세를 유지하시며 치료가 필요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짧게 대답한 후, 흐읍,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치료가 필요한 곳에 마음을 모았다.
‘건강해지고 싶습니다. 안전하게 출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살아남고 싶습니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가만히 모은 아미트가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욕조 안의 신성수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면서 따뜻해졌다.
이번엔 욕조 옆에 섰던 베로니카도 두 손을 모아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욕조를 둘러싼 공기 중에도 빛이 생겨났다.
반딧불이 같은 빛들이 허공 위를 둥둥 떠다니며 온기를 만들었다.
‘이게 신성력이란 것이구나.’
와아… 눈앞에 펼쳐지는 경이롭고 신기한 광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공작 부인,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네.”
맞은편에 앉은 아미트가 부드럽지만 다소 엄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에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리고 집중했다.
시야가 닫히자 집중이 보다 더 쉬웠다.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보드랍게 감쌌다.
조용하게 울리는 치유 신녀의 기도문이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공중을 붕붕 떠다닐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공작 부인, 깨나세요.”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오늘의 치료는 끝났습니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신지요?”
“네. 몸도 기분도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아미트와 베로니카를 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신녀들은 입꼬리를 조금 말아 올려 내 미소에 답해 줬지만 그뿐이었다.
신전의 사람들은 표정 변화를 크게 하지 않도록 훈련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욕조 밖으로 나온 내 몸 위에 커다란 타월을 덮어 줬다.
“고맙습니다, 베로니카 신녀님.”
그녀의 손과 내 손이 닿았다.
두근두근, 또다시 내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녀는 작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 * *
“당신 혈색이 더 나아진 것 같군.”
슈라더 후작가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네, 오늘 아침에 깨날 때도 몸이 한결 가벼웠어요. 역시 치유 신녀님들의 치료술은 효험이 좋은 것 같아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고마워요, 당신.”
“아, 응.”
부끄러웠던 걸까.
짧은 대답 후 제크론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봤다.
붉어진 그의 귓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있을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만남에 대한 생각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베로니카는 아미트와 함께 두 달 뒤에 윌트슨 성에 방문한다.
내 치료를 위해서 말이다.
베로니카는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오겠지만, 제크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제크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저 남청색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다가 파르르 떨리겠지?
저 짙고 까만 눈썹이 크게 출렁이겠지?
저 붉은 입술이 한동안 벌어져 있겠지?
저 잘생긴 얼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창백해질지도 몰라.
“…뭐가 묻었나?”
“네?”
워낙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에 그가 뭐라고 물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의 얼굴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단 사실을 말이다.
밀려드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게 아니라, 뭐?”
‘당신이 베로니카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내 남편 참 잘생겼다, 고 생각했어요.”
어라?
대충 얼버무릴 요량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제크론이 반응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궈지는 것이 아닌가.
‘귀, 귀여워!’
푸흡, 웃음이 났다.
마치 잘생겼다는 말을 난생처음 듣는 사람 같은 반응이라니!
너무 신선하잖아!
“지, 지금 날 놀리는 거, 건가?”
헉, 제크론이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 문장에서 두 음절씩이나 더듬다니!
진짜 잘생겼다는 말을 오늘 처음 들어 본 건가?
자기가 잘생긴 걸 모르나?
에이, 설마.
‘아니지. 지난번에도 자기가 대세인 것도 모르고, 황실에 호구 잡힌 걸로만 오해하고 있었잖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놀리는 거 아니고 정말이에요. 당신 잘생겼어요. 귀여워요. 이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요?”
절레절레.
제크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아, 역시 그랬군요.”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이곳 사람들은 그동안 뭘 했던 걸까?
제크론은 확실히 먹히는 얼굴이다.
전생을 대한민국이라는 아이돌 공화국에서 보낸 내 눈에도 그는 100퍼센트의 미남이었다.
그리고 이곳 기준으로도 그는 미남임이 확실했다.
지난 황궁 연회에서 오로지 그에게만 쏟아지던 수많은 여인들의 애정 어린 시선은 그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여러분, 거 좀, 욕은 뒤에서 하고, 칭찬은 앞에서 합시다!
나라도 확실히 알려 줘야지.
“당신 목소리는 또 얼마나 멋진데요. 동굴 저음이라고 들어 봤어요? 당신 목소리 듣고 있으면 귀에서 꿀 떨어진다고요.”
“…….”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물론 이번 한 번으로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잘생김에 대해서 확실히 인지하거나 적응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앞으로 천천히 차근차근 알려 줘야겠다.
“…당신도….”
“네? 저도 뭐요?”
“…예뻐.”
뜨악.
이 사람 왜 이래?
기브 앤 테이크도 아니고.
나 예쁘다는 소리 들으려고 했던 말 아니라고!
으으, 그런데 왜 자꾸만 볼에서 열이 나는 걸까?
그때였다.
밖에서 마법사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슈라더 후작저에 도착했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처음엔 제크론과 30분만 단둘이 있는 것도 못 견딜 정도로 어색하고 불편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후딱 지나간 것 같았다.
어색하거나 불편함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 벌써 제크론과 조금 친해진 건가? 내적 친밀감이 좀 쌓였나?’
역시 인간의 적응력이란 이렇게나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