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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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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난 당신을 모른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좀 전까지 반달이던 남자의 눈이 동그란 보름달이 됐다.

입가에는 흥미로워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 말인가요?”

“오, 아시는군요!”

“아… 네, 뭐.”

남자의 순수한 반응에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엔 두 눈을 날카로운 세모꼴로 만들고 좀 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군데요?”

“말해 주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맞혀 보세요.”

“네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푸하하, 내가 소리 내서 웃자 남자도 나를 따라 같이 웃었다.

하하하.

둘이 이렇게 웃는 모습이 사이좋게 보였던 걸까?

당시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힌트는 하나 드리죠.”

“지금 뭐 하자는 건가요?”

“열여덟.”

“열여덟이 뭐요?”

“에이, 힌트는 한 번에 하나씩.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봅시다.”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윙크를 하고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내 머릿속은 대충 이런 상태였다.

‘열여덟? 그게 뭔데? 열…여덟? 10 더하기 8. 18? 십X!’

그렇게 넋 나간 듯 서 있을 때 제크론이 돌아왔고 나는 당시의 상황을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까지의 기억을 나는 강의실에 모인 내 운동 메이트들과 나눴다.

모두의 표정이 알쏭달쏭 변해 있었다.

“흐음… 이상한 남자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열여덟은 무슨 뜻일까요?”

“저야 모르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그 남자가 누군지 알게 되면 우리에게도 꼭 말해 주세요, 네?”

“맞아요. 너무 궁금해서 밤에 자다 말고도 생각날 것 같으니까요.”

“그러지 말고,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이 손뼉을 치며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다 같이 알아보는 건 어때요? 어제 그 파티에서의 남자가 누군지 말이에요! 우리가 비밀 정보원이 돼 보자고요!”

“어머, 재밌겠다!”

“좋아요!”

‘저… 저기요? 지금 뭣들 하는….’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남의 사생활의 문제를 유흥거리로 삼으려고 하고 있네!

하지만 내 속이 이러든가 저러든가 상관없이 거기에 모인 여인들은 서로 손뼉을 치며 해맑게 웃는 게 아닌가.

“단, 조건이 있어요! 이번 일은 우리끼리의 비밀이라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해요. 탐문 조사는 할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은 꼭 지켜야 해요.”

우린 비밀 정보원이니까요, 디아브 백작 부인이 빳빳하게 세운 검지로 허공을 찌르며 강조했다.

더 가관인 것은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세게 끄덕이는 다른 여인들의 반응이었다.

하, 하하… 나도 다른 여인들을 따라 고개를 대충 끄덕이면서 억지 웃음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이 막무가내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오로지 나뿐인 것 같았다.

‘진짜 이걸 한다고? 내 프라이버시는 어떡하고! 그 남자가 그동안 숨겨 왔던 내 연인, 뭐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이 사람들 왜 이래? 웃긴 사람들이야, 진짜!’

깜깜한 밤하늘을 닮은 무지는 두려움을 낳는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성을 씩씩 내면서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다 없던 일이 될까?

‘…아니겠지. 요소킨 운동 수업이 없던 일이 되겠지. 나는 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이지… 흑.’

별로 애쓰진 않았지만 난 내 복잡한 심경을 제대로 잘 감춘 것 같았다.

다른 여인들이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한 채 방실방실 웃고만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   *   *

제크론과 그의 보좌관은 위벨교 대신전의 정문 앞에 섰다.

신전 안에서는 그 어떤 탈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정문에서 본관 건물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정말 이것을 쓰실 작정이십니까?”

제크론의 뒤를 따르던 조쉬가 못내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조쉬의 손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나무로 만든 상자 위에는 화려한 금장식이 박혀 있었는데, 위벨교의 상징인 태양과 달의 문양이었다.

제크론은 보좌관의 물음에 묵묵부답한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며 조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좀 더 키웠다.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윌트슨 공작가가 대대손손 기억하고 간직할 가보가 될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걸….”

충실한 보좌관은 차마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서서히 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말 잘했어, 조쉬. 오늘 이 만남은 앞으로 이어질 윌트슨 공작가를 위한 게 맞아.”

“어째서요?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하.”

그제야 제크론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의 보좌관을 봤다.

조쉬 멀론의 눈동자에는 물에 젖은 원망이 가득했다.

하아, 제크론은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간단한 거야, 조쉬. 엘프윈과 아이가 건강하지 않으면 윌트슨 공작가가 앞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그렇지만 마님과 아기씨는 아직 건강하지 않으십니까? 주치의로부터도 별다른 주의 사항을 듣지 못했습니다.”

“…….”

시무룩한 표정의 조쉬가 슬쩍 제크론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말을 뱉었다.

“마님께서 괜히 걱정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유난스러우십니다.”

“원래 그랬잖아.”

“더 심해지셨습니다. 공작성에 운동 강의실을 만드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귀부인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하시고요. 게다가 이번에는 이 귀한 걸 굳이 사용하게 만드시다니요.”

“모두 다 내 결정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조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제크론을 봤다.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것이 보좌관의 올바른 역할이라 생각했다.

제가 모시는 상관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 적절한 조언으로 상관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하지만 이번 일에 한해서는 조쉬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제크론에게는 제 결정을 번복할 의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리 내.”

제크론은 조쉬의 손에 들려 있는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더 이상 긴 설명 하지 않겠어. 자넨 마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신전에는 나 혼자 갈 테니.”

제크론은 그대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우아한 발걸음에 망설임이나 주저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는 제 선택을 믿었다.

최선의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처음엔 아내의 마음을 잃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차근차근 되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엔 아내의 기억을 잃었다.

천천히 되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얼토당토않은 의심을 남발하며 현실을 부정하려고도 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리고 지금.

아내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두렵게 했다.

처음부터 정략적으로 맺어진 관계였기에 사실 남녀의 애정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내 옆에 있어 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엘프윈이 자꾸 두려워한다.

제 건강을 염려하고, 건강을 잃게 될까 떨고 있었다.

엘프윈이 느끼는 날것의 두려움이 그에게도 전달됐던 것일까.

“나… 여전히 두려워요.”

마차에서 작게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대신관의 집무실.

제크론 윌트슨 공작과 크레이그 셰넌 대신관이 새하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제크론이 들고 온 기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위벨교의 상징인 태양과 달의 문양의 금장식이 박힌 상자와 그 내용물은 2년 전 크레이그 셰넌 대신관이 제크론에게 직접 하사한 선물이었다.

5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대승으로 이끈 전쟁 영웅에게 황실에서는 영지와 작위를 하사했고, 대신전에서는 이것을 하사했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순백의 양피지 두루마리 문서가 있었다.

거기에 어떤 요청 사항이든 쓸 수 있었고, 대신전은 어떤 사항이든 이유를 묻지 않고 꼭 들어줘야 했다.

백지 소원권이었다.

“자, 그럼 시작하시지요.”

크레이그의 손짓에 따라 제크론은 상자를 열어 두루마리 문서를 꺼냈다.

그리고 깃펜을 들어 양피지 위에 요청 사항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마지막 줄에 제 서명까지 단정하게 써 넣은 제크론은 깃펜을 내려놓은 후, 바로 문서를 크레이그에게 넘겼다.

두루마리를 받아 든 크레이그는 문서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대신관의 무표정한 얼굴에 의아한 빛이 잠시 어렸다가 바로 사라졌다.

마침내 읽기를 마친 크레이그는 고개를 들어 제크론을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곧 치유 신녀를 선발하고, 일정을 조율하기 위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내 조용히 가라앉았던 대신관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발하며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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