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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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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제크론은 오늘 하루 종일 외부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는 보좌관 조쉬와 함께 왕립 아카데미 분교를 건설할 후보지 몇 곳을 시찰 중이었다.

    토지 전문가와 건축 전문가, 그리고 왕립 아카데미 서기관 두 명까지 합세한 조사단도 제크론과 일정을 함께했다.

    뎀프샤 영지 내의 이동이었지만, 뎀프샤 자체가 워낙 땅덩어리가 컸고, 대여섯 군데의 장소를 하루 안에 다 돌기 위해서 그들은 마법 마차를 이용했다.

    사타르에서 모슈워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둘만 있게 된 기회를 틈타 조쉬는 내내 궁금해하던 질문을 결국 뱉었다.

    “대신관님은 어떤 연유로 만나려 하십니까?”

    “엘프윈의 치료를 의뢰하려고.”

    “네? 그…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꿈뻑꿈뻑.

    조쉬 멀론은 어리둥절해졌다.

    신전의 치료는 중증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길 가는 세 살배기 꼬마들도 다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은 중증 환자가 아니지 않은가?

    조쉬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다 방법이 있으니까.”

    창밖을 응시하던 제크론의 시선이 조쉬에게로 향했다.

    “방법이… 있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

    신전법으로 정해진 바가 있을 텐데?

    이번엔 조쉬의 고개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보좌관이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제크론 공작의 얼굴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였다.

    ‘이분이 아무런 대책 없이 대신관님과 약속을 잡거나, 이렇게 여유를 부릴 분이 아니신데.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긴데….’

    제크론의 표정을 살피는 조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점점 가늘어지던 조쉬의 눈동자가 단번에 확 커졌다.

    “흐억, 설…마?”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제크론이 보좌관을 향해 싱긋, 가볍게 미소 짓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저건 분명 긍정의 미소였다.

    ‘진짜 그것을 쓰겠다는 생각이신 건가?’

    조쉬 멀론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 갔다.

    *   *   *

    ‘아아, 좋아라!’

    늦은 아침, 나는 침대와 한 몸을 이루며 뒹굴고 있었다.

    전생에서의 삶보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이 훨씬 안락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수면 시간이었다.

    전생에서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개떡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 그랬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전부 다.

    남녀노소, 전부 다.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인 것인 양.

    정답은 개뿔!

    그런데 지금은 그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됐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삶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정답이다, 정답!

    귀부인 만세! 공작 부인 만세!

    케이트가 방금 전 살금살금 걸어 들어와 커튼을 열어 놓고 간 덕분에 커다란 창을 통해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이불을 걷어 낸 채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광합성이 필요했다.

    비타민 D를 만드는 중이었다.

    “아!”

    그때였다.

    태동이 느껴졌다.

    두 손으로 봉긋 솟아오른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가야.”

    조용한 목소리로 배 속의 아기를 불렀다.

    “아가도 깼구나! 엄마는 아침부터 햇살이 쨍하니 좋아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아가는 기분이 어때? 좋아?”

    아기가 대답할 리는 없었지만, 일단 조금 기다려 봤다.

    “어?”

    그리고 약간씩이지만 계속되는 태동이 느껴졌다.

    후훗, 웃음이 났다.

    “우리 아가도 기분이 좋구나. 엄마가 기분 좋으니까, 우리 아가도 엄마 따라서 기분이 좋구나!”

    잠을 충분히 잘 자서 그런가?

    아니면 정말 햇살이 좋아서 그런가?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고, 별 이유 없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배 속 안의 존재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행복했다.

    “오늘은 엄마가 운동하는 날이야. 조심조심 열심히 운동할게. 엄마와 우리 아가를 위해서.”

    *   *   *

    요소킨 운동 식구가 두 명이 더 늘었다.

    지난 황궁 파티에서 제크론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던 조안 프렛 백작 부인과 맨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이었다.

    두 여인 모두 금발 머리라서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과 함께 셋이 나란히 서 있으면 세 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혈연은 아니라고 했다.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한 주 사이에 수강생이 두 배로 늘었으니 선생님의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그리고 곧 메릴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됐다.

    “자리에 편안하게 앉으세요. 양쪽 엉덩이를 바닥으로 꾹 붙이시고, 왼쪽, 오른쪽 좌골을 바닥에 똑같이 붙여 주세요.”

    그녀의 지도에 맞춰 우리는 자리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례차례 다양한 동작들을 따라 했다.

    메릴 선생님은 초보인 우리들을 위해서 충분히 기다려 줬고, 같은 설명을 몇 번이고 반복해 줬다.

    어느덧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지난 첫 수업에 비해서 조금 더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의 몸은 반복 훈련을 통해 적응하고 발전해 간다.

    *   *   *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운동이 끝나고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동그랗게 둘러앉아 허브차와 함께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돌고 돌던 이야기의 주제가 이번엔 나에게로 향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디아브 백작 부인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윌트슨 공작 부인. 어제 파티에서 윌트슨 공작님이 아닌 외간 남자와 아주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시던데, 그분은 누구신가요?”

    “저도 봤어요! 키도 훤칠하시고, 멀리서 봐도 후광이 번쩍번쩍 잘생기셨던데요!”

    프렛 백작 부인까지 거들자, 다른 두 여인들도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누구… 아! 네, 맞아요. 어제 어떤 남성분을 만나긴 했어요.”

    “어떤 남성분이요? 어머, 모르는 분이세요? 다정해 보여서 꽤 가까워 보였는데.”

    아… 난처한 순간이 다가왔다.

    공작성 안의 사람들은 내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공작성 밖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처음이라서 주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매주 이렇게 모여서 함께 땀 흘리고 담소를 나눌 인연들이었으니까.

    친구들에게 내 시시콜콜한 비밀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공유할 수 있어야 이 관계가 점점 발전할 수 있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커밍아웃이 필요했다.

    흐읍, 조그맣게 숨을 들이마시며 용기를 끌어 모았다.

    “다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한 달 전에 크게 앓다가 깨났는데, 그 전 기억을 거의 다 잃었거든요.”

    나를 응시하던 여인들의 입에서 ‘어머!’, ‘저런!’, ‘그럴 수가!’와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 비슷한 소문을 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단 사실을 말이다.

    ‘그럼 그렇지.’

    역시 소문이 빠른 동네다.

    조금은 착잡한 마음을 스스로 어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 남성분이 절 기억하고 말을 걸어 주셨는데, 전 그분을 전혀 기억 못 했지 뭐예요. 그래서 매우 난처했답니다.”

    “어머, 딱해라!”

    “그래서 그분은 자기소개를 하던가요?”

    맨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모두들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요? 아직도 여전히 그 신사분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끄덕끄덕.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   *   *

    제크론이 다른 신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사내가 내 옆으로 갑자기 스윽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아까 왔던 신문 기자가 또 왔나 싶어서 잔뜩 경계하며 남자를 봤는데 다른 사람이었다.

    금발에 녹안을 지닌 남자는 무척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인상이 좋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수는 없지!’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남자를 쳐다봤다.

    아… 아?

    그런데 남자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두 눈을 반으로 접으며 반달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순한 양, 혹은 멍멍이와 같은 모습에 나는 드디어 경계심을 풀고 입을 열었다.

    “날 아세요?”

    “날 몰라요?”

    내 물음에 그가 대답 대신 물음을 날렸다.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예의는 어디에서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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