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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42)

22화

결심한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사실 나의 실행이랄 것은 별거 없었다.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제크론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무래기 엑스트라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옆에 앉은 남자 주인공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천하무적 넘버원 제일의 카드.

그의 허락과 도움, 그리고 지지가 필요했다.

“나… 여전히 두려워요.”

“뭐가?”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식사량도 늘렸고, 운동도 시작했지만… 부족한 것 같아요.”

“주치의의 말로는 당신 몸 상태가 한 달 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던데. 아직도 어디가 불편한가?”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아픈 덴 없어요. 단지… 내가 워낙 몸이 약하다 보니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기가 걱정된다는 거예요.”

“내가 뭔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오오, 제크론의 입에서 꽤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이쯤 하니 그도 눈치를 챘나 보다.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대신전의 신관이나 신녀들은 신성력으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나도 신성력의 치료를 받으면 조금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엘프윈… 그건 좀 힘들어. 대신전의 치료는 치명상을 입었거나 깊은 병을 앓고 있어서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대신전의 환자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그건 신전법으로 정해져 있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긴 했는데, 신전법으로 딱 명시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당신도 매튜에게 들어서 알잖아요. 출산이란 것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걸요. 아이와 내가 무사히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겨우 50퍼센트가 조금 넘을 뿐이라는 것을요.”

“…….”

“이 정도라면 대신전도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을 환자로 받아들여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신전법인지 뭔지를 개정해서라도 말이에요.”

제크론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법이 그렇다는데 아무리 제크론이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목숨을 포기할 수 없으니, 단단한 동아줄에 매달려 구걸하기로 했다.

“제발요. 부탁해요.”

“…….”

그의 주름이 펴지고 미간이 다시 매끈해졌다.

제크론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미소보다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슴에 살포시 감겨 왔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최선을 다했다.

“고마워요.”

작게 속삭였다.

*   *   *

공작성에 돌아온 후, 제크론은 급한 업무를 처리하러 집무실로 향해야 했다.

오늘까지 서명해야 할 서류가 몇 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좌관 조쉬가 따로 책상 한쪽 상자에 정리해 둔 급한 서류를 펼쳤다.

총 다섯 개였다.

제크론은 서류들을 펼쳐서 빠르게 훑어본 후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서류들은 다시 상자 안에 넣으면 내일 아침 조쉬가 가져가서 처리할 것이다.

다섯 개의 서류에 서명을 끝낸 제크론은 깃펜을 내려놨다.

밖은 이미 어둑한 밤이었고, 책상 촛불만 켜져 있는 집무실 안은 어두웠다.

그는 의자 등받이 깊숙이 허리를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기분이 착 가라앉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온통 엘프윈에 대한 것들이었다.

‘오늘 참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했지.’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엘프윈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주저 없이 했다.

“하으… 으읍!”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을 흘렸다.

낯부끄러운 기억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제 가슴팍에 부딪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들었다.

황제와 황후께 인사드리기 전에 먼저 음식에 손을 대려던 그녀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여기까지는 모두 스킨십에 대한 엘프윈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엘프윈은 예전부터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것을 꺼려 하는 편이었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을 때, 어깨를 쓰다듬거나 허리에 팔을 감을 때 그녀는 종종 움찔 떨었고, 가끔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것을 어색해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처럼 신경질적이거나 날카로운 모습은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민했다기보다는… 얼굴을 붉혔지.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던 엘프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헷갈렸다.

아니, 어쩌면 아직 달라진 엘프윈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와의 큰 다툼 이후로 그녀가 앓아누웠고, 기억을 잃었다.

제크론은 그의 아내가 기억을 잃고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 마치 제 탓인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제 탓으로 돌리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그 마음에서 의심이 싹텄으리라.

그와의 큰 다툼 때문에 그녀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특한 흑주술 따위의,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한 피해자가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엘프윈의 영혼 대신 다른 사람의 영혼이 몸을 차지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무척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하아….”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나… 여전히 두려워요.”

마차에서 엘프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프윈의 건강 염려증은 다소 병적으로 보였다.

마치 지금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녀의 평소 예민한 신경이 건강에 꽂힌 것일 수도 있겠군.’

예전엔 외모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면 지금은 자신의 건강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격으로 말이다.

끼이익.

제크론은 다시 의자를 책상 앞으로 바짝 끌어다가 똑바로 앉고 깃펜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의심하느라 주저하고 거리를 두면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제크론은 새 양피지 위로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길지 않은 편지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수신인은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이었다.

다 쓴 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둘둘 말아서 아까 급한 서류를 모아 뒀던 상자의 맨 위에 올려놨다.

할 일을 다 마친 그가 집무실을 나서기 위해 벌떡 일어서는데, 하필이면 그때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오늘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엘프윈의 옆자리를 채웠던 사내가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그 사내가 누구였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엘프윈이 그 남자를 보면서 저에게 보여 줬던 것과 같은 미소를 보였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화가 들끓었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으득, 이가 갈렸다.

‘그자는 누구지? 엘프윈과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엘프윈은 과거의 기억을 깡그리 다 잃었으니까 말이다.

“흐음….”

한번 일그러진 제크론의 미간은 다시 펴지지 못했다.

*   *   *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목욕까지 마치고 나니 순간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난생처음으로 황궁 파티에 참석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아아암.

하품이 터져 나왔다.

‘내일은 요소킨 운동 날이구나!’

벌써부터 두근두근 기대가 됐다.

좋은 컨디션으로 메릴 선생님과 디아브 백작 부인을 맞이하려면 일찍 자 둬야 했다.

이불을 목까지 바짝 올렸다.

엘프윈의 몸은 체지방이 적어서 그런지 추위에 약했다.

전생의 나는 더위에는 약했지만 추위는 강한 편이어서 이 부분은 주의가 필요했다.

옛날 습관대로 살았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이불을 끌어온 손가락이 내 시야에 잡혔다.

손가락을 보자 아까 연회에서 제크론이 손깍지를 꼈던 것이 생각났다.

“으으윽!”

부끄러운 기억에 두 볼이 화르르 달궈졌고, 입에서는 진득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손가락을 쫙 벌렸다가 오므렸다가를 반복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닿았던 제크론의 손가락은 매우….

“리얼했지.”

푸흣, 내가 말해 놓고도 웃겼다.

리얼하다니… 당연한 소릴 너무 안 당연하게 하는 꼴이라니.

그는 이제 더 이상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었다.

일러스트 표지에 그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줄곧 그 모습을 상상했던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였고, 그는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손이 닿았지.”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 때문인지 좀 더워졌다.

아까 목까지 올려 덮었던 이불을 허리로 내렸다.

다시 손을 들어 봤다.

이번엔 두 손을 다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맞물려서 손깍지를 꼈다.

“으으윽!”

순간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몸 안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다리를 구르며 이불을 팡팡, 찼다.

*   *   *

다음 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

제크론의 보좌관 조쉬 멀론의 하루는 성 안의 다른 누구보다 일찍 시작됐다.

그는 상사의 집무실에서 가져온 서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안건의 집행 전에 다시 한번 서류 내용을 검토하고 공작의 서명을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였다.

마지막 두루마리를 펼친 조쉬 멀론의 두 눈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크레이그 셰넌 대신관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공작님께서 왜 대신관님을 만나시려는 거지?”

그동안은 접점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썩 달갑지 않은 예감에 조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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