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42)

18화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이 멀리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늘 인생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고는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굳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장소에서, 굳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과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미 한 번의 죽음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요즘 매일 자기 전에 이런 다짐을 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아.’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쓸데없는 곳에 낭비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지게 된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진다.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에서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건강’이었다.

피의 출산을 견딜 만큼의 건강이 필요했다.

앞으로 5개월, 아니 이제 4개월인가.

그동안 보통의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나는 내가 읽었던 소설의 내용대로 아이를 낳다가 죽음을 맞는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

이것이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인가?

답이 ‘예스’라면 즉시 하면 됐고, ‘노’라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황후 폐하의 생신 연회가 있는데, 당신 갈 수 있겠어?”

제크론의 물음에 나는 난색을 표했다.

불편한 옷을 입고 모르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파티장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 그게, 파티는 좀 무리일 것 같아요.”

“그런가? 사실 연회에서 슈라더 후작 부부를 만나 실내악단 고용 건에 대해서 설득해 볼 생각이었거든.”

“악단이요?”

“슈라더 후작가는 제국 내 공연예술 사업의 중심축이야.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슈라더 음악 아카데미 출신이거든.”

“그런데 그게 왜요?”

“실내악단 고용 정도야 멀론 경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게 영 쉽지 않은 모양이야.”

“슈라더 후작 부부의 부정적인 입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

내 물음에 제크론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좋아요. 연회에 참석해요. 가서 슈라더 후작 부부를 만나 보죠.”

음악은 내 건강을 위해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으니, 나는 슈라더 후작 내외를 만나기 위해 이번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음악은 내 심신 안정뿐만 아니라 태교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고, 요소킨 수업에서도 음악을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루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지난번보다 치수가 조금씩 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임산부들에 비하면 마르셨어요.”

의상실 ‘이먼드’에서 온 재단사 마담 린다가 내 몸 치수들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하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황후 폐하 생신 연회용 드레스는 허리 라인을 좀 더 강조하는 디자인이 어떨까요? 너무 펑퍼짐한 드레스 말고요.”

마담 린다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물었다.

그녀가 가져온 드레스 카탈로그를 한 장씩 넘기며 유심히 보고 있었다.

카탈로그에 실린 드레스는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모두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디자인이었다.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가 될 텐데 입고 가는 옷마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카탈로그를 한 장, 한 장 빠르게 넘기던 나는 초록색 바탕에 금색 무늬가 들어간 드레스 디자인에 멈췄다.

“이 드레스가 좋겠어요. 대신 허리선을 이 정도로 위로 올려 주시고 치마통도 이렇게 충분히 넉넉하게 부탁해요.”

들고 있던 깃펜으로 드레스 디자인 위에 지익 직, 선을 덧그리며 말했다.

마담 린다의 얼굴에 걸려 있는 비즈니스적 미소가 미세하게 일그러졌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 그리고 하나 더요. 낮은 굽의 구두를 신을 예정이니, 드레스 길이는 제 키에 딱 맞게 해 주세요. 오히려 신발이 조금 보일 정도로 약간 짧아도 좋고요. 걸려 넘어지면 안 되니까요.”

“아….”

마담 린다의 입가는 여전히 비즈니스적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낯빛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리는 게 요즘 유행이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드레스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사람이 붐비는 연회장에서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도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공작 부인.”

마담 린다가 액세서리 카탈로그를 내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카탈로그를 바로 다시 그녀에게로 밀었다.

“아니요. 오늘은 이만할게요. 오후 걷기 운동을 해야 할 시간이라서요. 액세서리는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아… 그래도 중요한 날이니만큼 눈에 띄는-”

“그만하겠다고 했잖아요.”

마담 린다의 말허리를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사람의 생일 파티에 착용할 액세서리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재봉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그녀의 조수들과 내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새 액세서리를 사는 것보다 운동 시간이 중요하다는 여자는 처음 본다는 것처럼.

걷기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요소킨 운동을 처음 접한 후, 나는 이틀 동안 내내 근육통을 앓아야 했다.

근육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겨우 침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실외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정원 걷기는 처음이라서 꽤나 마음이 들떴다.

공작가의 정원답게 어마어마한 규모에 정갈하게 관리된 정원은 마음에 쏙 들었다.

곳곳에 배치된 벤치가 많아서 걷다가 쉬었다가를 반복하며 한 시간 정도 정원을 거닐었다.

처음엔 실내 걷기부터 시작했고, 그게 익숙해지자 다음엔 실외 걷기였다.

‘실외 걷기가 익숙해지면, 그다음은 뭘 하지?’

걷기 시간을 늘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맞아! 아령이 있었지! 아니면 모래주머니도 괜찮을 것 같고. 일단 아령 먼저!’

옆에 섰던 케이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령이 필요해.”

“아…령이요? 그… 남자들이 운동할 때 드는 그거 말씀이세요?”

“응. 그 아령 맞아. 그런데 너무 무거운 건 나한텐 무리니까, 1킬로그램짜리 작은 아령을 만들어야겠어. 아니다. 500그램부터 시작하자. 지금 당장 가서 대장장이한테 주문서 넣고 와.”

케이트는 여러 면에서 다른 하녀들에 비해 영리한 축에 속했지만, 남자만 드는 아령을 여자가 들겠다는 생각이, 무거운 아령 대신 500그램짜리 아령을 들겠다는 생각이 영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오작동하는 기계처럼 어버버한 채 서 있는 케이트를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케이트, 어서 서둘러 주겠니?”

“네, 알겠습니다, 마님!”

후다닥 달려가는 케이트의 뒷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   *   *

드디어 황후 폐하의 생신 파티 날이 다가왔다.

긴장한 탓에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파티에 가자는 제크론의 제안을 들었을 때 거절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두근두근, 심장이 계속 두근댔다.

기대됐다.

잔뜩 들떴다.

귀족들의 연회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것이라서 떨리는 게 당연했다.

수많은 웹툰과 웹소설에서 매번 보고 또 봤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참석하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케이트와 주디 외 몇 명의 하녀들이 바삐 움직여 준 덕분에 나는 꽤나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와아… 예쁘다.’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내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뭐, 사실 엄밀히 따져 말하면 엘프윈의 모습이었지만.

준비를 마친 제크론이 내 침실까지 마중을 왔다.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 걸리는 순간 내 입이 떠억 벌어졌다.

사실 그는 매일 잘생겼지만, 오늘은 특히 더 잘생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파티는 파티인가 보구나!’

평소와는 달리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덕분에 단정한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짙고 굵은 눈썹과 그 아래 자리 잡은 서늘한 눈매가 보기 좋게 강조됐다.

아무 말 없이 제크론의 얼굴만을 멀뚱히 보던 나는 얼떨떨한 정신을 흔들어 깨워야 했다.

‘정신 차려, 나야!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빨리 무슨 말이든 해야지!’

크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푼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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