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42)

17화

분명 운동할 때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행복했는데….

“으으… 으윽!”

내 몸과 마음을 도취시켰던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평생 안 하던 운동을 이틀 연속으로 했던 게 무리였다.

그래도 그동안 더 잘 먹고, 꾸준히 걷기 연습도 했던 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다음 날 나는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팔과 다리, 목과 어깨, 몸 전체가 다 아팠다.

근육이 하나도 없는 말랑말랑한 몸이었는데 운동하면서 늘리고 비트니 몸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주치의 매튜는 이틀 정도 침실에서만 생활하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조언대로 침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아… 심심해.’

이곳에서는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전생에서는 TV,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PC 덕에 집에서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솔직히 방구석 여가가 제일 재밌었다.

읽어야 할 웹툰과 웹소설이 매일매일 쌓였고, 밤새워서 봐도 남아도는 영상들이 넘쳐 났다.

취향 저격하는 갖가지 게임들은 또 어떻고.

‘하지만 여긴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게 독서밖에 없네.’

읽던 책을 옆에 대충 던져두고 침대 위에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뭔가… 방구석 취미 생활을 개척할 필요가 있겠어. 뭘 하면 좋을까?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 뜨개질? 자수? 꽃꽂이? 베이킹?”

전생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도, 돈도 아까워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둘씩 떠올려 봤다.

“아니지. 그냥 다 필요 없고, 음악 감상만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훨씬 낫겠다. 으아… 아으악!”

두 팔과 두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몸부림쳤다.

윽, 하지만 끔찍한 근육통이 뒤따랐기에 버둥거리던 것을 금방 멈춰야 했다.

“아이고… 팔이야… 아이고, 다리야….”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똑,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조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너무 심심했던 탓이었다.

문이 열렸고,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크론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에 당황한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전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그… 하루 30분씩 기운 나누기 하려고 왔어.”

아, 맞다.

‘하루 30분 기운 나누기.’

제크론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무슨 캠페인 이름 같았다.

“아… 그거요.”

“별로 반기는 내색은 아니군.”

“…그럴 리가요. 놀라서 그렇죠.”

굳은 얼굴 근육을 바짝 당겨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너무 억지 미소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종종 까먹는 이 캠페인스러운 시간을 제크론은 꼬박꼬박 잘 기억했다.

물론 워낙 바쁜 일정 탓에 30분을 다 채우지 못할 때가 더 많았지만, 그는 매번 기회가 날 때마다 내 방문을 두드리고는 했다.

나는 그대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앉았고, 제크론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려는데 다행스럽게도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이 끌고 온 트롤리에는 케이크와 과일, 그리고 홍차가 있었다.

“저 케이크!”

본 적 있는 케이크였다.

지난번 제크론과 함께 갔던 ‘마카마카’라는 디저트 가게에서 먹었던 바로 그 케이크였다.

“어제 그 근처 지나는 길에 하나 샀어. 그런데 하루 지났는데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군.”

얼른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찍어 먹어 봤다.

역시 맛있었다.

“맛 아직 괜찮아요. 아니, 너무 좋아요! 당신도 먹어 볼래요? 아 참, 당신은 단걸 싫어한댔죠?”

쩝쩝,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케이크의 맛은 ‘오늘도 맑음!’이었다.

화창하고 쨍쨍한 날씨의 맛이었다.

헤헤헤, 단 게 들어갔더니 금방 머릿속이 꽃밭이 되었다.

탄수화물 최고!

포도당 좋아!

다른 근육은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기에,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서 나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 모습이 웃겼을 거다.

푸훗, 제크론이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미소와 비웃음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그런 애매한 웃음이었다.

“아까 내가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군.”

윽, 찔렸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크론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당신이 케이크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동안은 내가 틀렸나 보군.”

아, 맞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엘프윈의 일기장을 생각해 냈다.

그녀는 맛있는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다 먹었다면서 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나 케이크 싫어하지 않아요. 좋아해요, 엄청.”

“…….”

“그런데 살찌는 게 신경 쓰여서 먹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뿐이에요.”

이 자리에 없는 진짜 엘프윈 대신 그녀의 속내를 털어놨다.

남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으로 살려면 살쪄서 못생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완벽한 당신 옆에 서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보 같게도 말이에요, 말을 마친 나는 또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지금은 맛있게 잘 먹는군.”

“네. 날씬하고 예쁜 것보다 잘 먹고 건강해지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지금은.”

그리고 또 한 입.

아아, 이 케이크는 정말 올곧고 바르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

제크론의 동굴 저음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 먹고 싶은 거 많이 먹고, 살도 쪄. 건강해야지.”

“네, 앞으로 열심히 살찌우려고요.”

믿고 맡겨만 주세요, 나는 제크론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와 이렇게 편안한 대화가 가능하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다.

엘프윈의 고민을 나눴더니, 그의 위로가 따라왔다.

역시 어디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진심은 통하는 법인가?

조금 얼떨떨해진 나는 제크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엘프윈의 진심이 아닌, 나의 진심에 대해서 털어놔 볼까?

제크론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입을 달싹였다.

“뭐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역시 우리 주인공님은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럼 저도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탁하는 주제에 너무 당차면 안 되니 말하는 중간에 뜸을 주는 것도, 목소리의 크기를 작게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악이 필요해요. 심신 안정을 위해서요.”

귀가 몹시 심심해서요,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하나로 함축하면 결국 ‘심신 안정’일 테니까.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음악? 오르골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아… 오르골도 좋지만, 전 실내악단을 고용하는 걸 생각했어요.”

사실 이곳 세계에서 음악을 듣는 방법이 가늠이 되지 않아 ‘실내악단 고용’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전생에서의 내 삶은 매일매일 피곤의 연속이었다.

긴 근무 시간 때문에 몸은 지쳤고,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힘들어지는 날이 많았다.

매일 바쁜 일정 속에서 짧은 시간 내에 손쉽게 기분을 전환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수단은 음악이었다.

물론 가요도 좋아했지만, 가사 없는 클래식 음악도 좋아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있노라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실내악단이라니… 당신에게 그런 고상한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빠직, 순간 열이 뻗쳤다.

이 남자는 잘 나가다가 이렇게 한 번씩 삐끗한단 말이야.

싸우자는 거야, 뭐야?

하지만 참아야 했다.

제크론은 나의 돈줄이었고, 나는 그 돈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네요. 맞아요. 저 음악 감상 같은 고상한 취미 없어요. 알아줘서 고마워요.”

“…….”

“하지만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 심신이 편안해진다는 것쯤은 알아요. 그래서 지금부터 해 보려고요. 고상한 취미.”

“좋아, 괜찮은 실내악단 찾아보도록 하지.”

어라?

의외로 참 쉬웠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괜히 긴장 타고 눈치를 살핀 게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나도 노력해야겠지. 당신 건강과 우리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고마워요.”

그의 입에서 나온 ‘우리 아이’라는 말에 내 심장이 두근두근, 또 반응했다.

동굴 저음 목소리로 듣는 ‘우리 아이’는 무척이나 쫀득하고 감미로웠다.

‘우리라니… 우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