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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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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그나저나 윌트슨 공작 부인! 통이 크시네요. 요소킨 수업을 위해서 공작성을 내주시다니요!”

    디아브 백작 부인이 허브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도 임신하셔서 잘 아시잖아요. 우리 몸이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는 걸요.”

    “맞아요.”

    “아시다시피, 임산부가 할 수 있는 운동은 한정적이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산책이나 조금 할 뿐이고 몸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죠.”

    내 말에 디아브 백작 부인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때마침 요소킨 운동을 알게 됐어요. 선생님 일정이 꽉 찼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께 제안드린 거예요. 저는 이 운동을 꼭 당장 시작해야 했거든요.”

    “꼭 당장이요? 그동안 줄곧 운동은 안 하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요?”

    “그야 살고 싶으니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너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의 대사 같았나?

    뜨끔한 나는 두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적은 아주 잠깐뿐이었다.

    호호호, 바로 유쾌한 웃음이 정적을 덮었다.

    “맞아요! 우리 다 살아야죠! 죽으면 안 되죠.”

    “저도 살고 싶어요, 공작 부인! 그러니까 운동을 더욱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들은 방금 내가 한 말을 과장식 유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그렇게 들어 주면 나야 땡큐고.

    디아브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제가 생각했던 성격과 많이 다르세요. 그래서 놀랐다니까요! 물론 좋은 의미로요.”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은 꽤나 솔직한 성격이었다.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은 마음에 담아 두는 것 없이 기회가 있을 때 다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꽤나 외향적이고 털털한 성격 말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디아브 백작 부인. 앞으로도 부인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 어머! 그런 말이 어딨어요!”

    꺄르르, 그녀가 내 한쪽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웃었다.

    그녀는 솔직하고 털털했으며, 게다가 귀엽고 애교가 많기까지 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

    “그러고 보니 윌트슨 공작 부인, 우리 참 비슷한 점이 많아요. 둘 다 이렇게 임신해서 배불뚝이고, 또 이렇게 운동을 좋아하고요.”

    그녀가 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불뚝이라니….

    백작 부인의 거친 단어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나는 바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그래요. 그날 ‘마카마카’에서 말 걸어 줘서 고마워요, 디아브 백작 부인.”

    “이렇게 수업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윌트슨 공작 부인.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저야 영광이죠.”

    아아, 이 훈훈한 분위기 어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   *   *

    조쉬 멀론은 제크론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그의 보좌관 역할을 수행해 왔고, 올해로 딱 10년째였다.

    5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도 그들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그때가 좋았지.’

    요즘 그런 생각이 종종 들었다.

    과거 전쟁터에서 조쉬 멀론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바로 제크론의 목숨을 지키는 것.

    그때는 모든 것이 단순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의 목표가 단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제크론의 목숨을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해야 했고, 그의 목숨을 해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부와 권력을 손에 얻은 제크론과 마찬가지로 평민 신분이었던 조쉬 멀론 역시 남작 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는 영지 경영은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맡기고, 제크론의 보좌관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제크론을 보좌하는 것은 굉장히 자부심을 드높이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월급이 좋았다.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도 더.

    하지만 요즘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2년 전, 뎀프샤의 공작성에 정착한 이후, 그의 일이 산더미처럼 늘었기 때문이었다.

    영지 관리는 영지 관리대로, 제국 국정 업무는 또 국정 업무대로, 게다가 공작성의 관리 감독까지 매일매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다.

    보좌관으로서의 역할이 너무 늘어나서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다다르자, 그는 조수 두 명을 채용했다.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그래도 매일 똥줄 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같이 똥줄 타 주는 조수들이 있어 위안이 되는 정도뿐이었다.

    조쉬 멀론은 조수를 몇 명 더 채용할까 심각하게 고심 중이었다.

    많고 많은 업무 중에도 특히나 껄끄러운 업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공작 부인에 대한 것들이었다.

    “뭐? 엘프윈이 미친 게 아니냐는 소문?”

    보좌관 조쉬의 보고를 전달받은 제크론 공작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조쉬 멀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10년 동안 매일을 함께한 얼굴이지만 제 상관의 화난 표정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네. 그, 저… 해니건 클럽과 맥키드 클럽, 그리고 제일리얀 클럽 등에서 잡담 중에 그런 얘기가 오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라이트 백작 부인 티파티와 애덤스 후작 부인 티파티에서도-”

    “그만.”

    마침내 제크론은 보좌관의 보고를 멈추게 했다.

    엘프윈의 성격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소문은 이미 많이 떠도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미쳤다는 소문이라니.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싶다는 듯, 제크론은 눈을 꽉 감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제가 사용인들의 입단속을 좀 더 단단히 시켰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보좌관 조쉬는 머리를 숙였다.

    “흐음… 이를 어쩐다.”

    제크론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제 보좌관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소문이란 것은 막으려고 해서 막아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기에 어찌 손쓸 방도가 없었을 테니까.

    사실 제크론 본인도 그런 의심을 했었다.

    아니, 그는 한술 더 떠서 엘프윈에게 ‘다른 사람이 아니냐’ 하는 물음까지 던졌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번 황후 폐하 탄신 연회 참석은 어떻게 할까요?”

    “그게 언제지?”

    “닷새 뒤입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아프다고 하시고, 공작 전하께서만 참석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흐음….”

    제크론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곧고 시원하게 뻗었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은 사실이니, 또 뭔가 실수를 하겠지?”

    “네,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럼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야기들이 사실인 것처럼 더 부풀려지겠고? 흐음….”

    “무엇보다 현재 임신 중이시니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크론은 일주일 전 디저트숍에 간 것만으로도 해사하게 미소 짓던 엘프윈의 얼굴을 떠올렸다.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짓던 미소는 순도 100퍼센트의 미소였다.

    1년 넘게 부부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지만, 그런 미소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었다.

    이렇게 웃는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전에는 웃더라도 어딘가 긴장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랬던 엘프윈이 그토록 환하게 웃다니.

    게다가 미소의 원천이 대단하게 화려하고 비싼 것이 아니라 단지 달달한 케이크 한 조각이었으니 말이다.

    “황후 폐하의 탄신 연회는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말고 케이크 한 조각 정도만 먹고 돌아오는 것으로 하지. 단, 엘프윈의 컨디션이 저조하면 계획은 언제든 변경 가능하고.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파티 참석 준비에 비용이 발생한다면 지원하고.”

    “네? 이번 요수칸인지 요소킨인지 하는 수업 때문에도 지출이 많으셨습니다. 그것도 무척이나요.”

    조쉬는 난색을 표했다.

    돈도 돈이지만 단시간에 넓은 방 하나를 수업 교실로 꾸미느라 밤낮으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입맛이 썼다.

    “그 정도로 공작성 예산이 쪼들리는 것은 아닐 텐데?”

    보좌관에게로 향하는 제크론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윽, 날카롭게 벼려진 공작의 시선에 조쉬는 숨을 삼켰다.

    아무리 함께한 세월이 10년이라고 해도 공작과 저 사이에는 확실한 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선은 넘을 수도 없을뿐더러 넘을 생각은 쌀알만큼도 없다.

    “그럴 리가요. 예산에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네, 명 받들겠습니다.”

    보좌관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갖춰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조쉬는 금방 사라졌지만, 제크론의 머릿속을 떠도는 엘프윈에 대한 생각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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