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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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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아내의 운동모임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비단 디아브 백작만이 아니었다.

    제크론 윌트슨 공작 역시 두 부인들의 만남에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다.

    “알아봤나?”

    “네, 여기 있습니다.”

    제크론은 그의 보좌관 조쉬 멀론이 건네는 두루마리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양피지 문서에는 디아브 백작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공작성에 들락거릴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의 조사는 필수였다.

    원래 디아브 백작가는 렐바크 왕국에 소속된 귀족이었다.

    하지만 렐바크 왕국은 지난 전쟁에서 패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들은 쉐리던 제국에 흡수, 통합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왕족들은 참수되거나 추방당했지만, 귀족들은 달랐다.

    패전국의 귀족들은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내야 하는 정도의 페널티만 부과됐을 뿐이었다.

    물론 영지 경영이 힘든 귀족들의 경우 그것조차 힘에 겨웠지만, 그래도 목숨과 영지를 부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몸을 사렸다.

    개중에는 전 왕실에 대한 강한 충심을 드러내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제 영지만 온전히 사수할 수 있다면 국가의 지배자가 누가 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금을 내야 하는 대상이 바뀐 것뿐이었다.

    디아브 백작가 역시 그런 귀족들 중 하나였다.

    내용을 꼼꼼히 살피던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온건파에 속하면서도 전 렐바크 왕국의 강건파 귀족들과도 꽤 가까운 친분을 유지한다는 점은 특이하군.”

    “네, 꽤 사교적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추후로도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부탁해.”

    보좌관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제크론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엘프윈과 디아브 백작 부인이라….”

    평소 사교 생활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엘프윈이었다.

    파티도 꼭 참석해야 할 자리만 갔고, 그 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친구를 만들거나 제 편을 만드는 것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엘프윈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늘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기에 누구도 그녀와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랬던 엘프윈이… 디아브 백작 부인과 같이 운동을 하게 됐단 말이지….”

    제크론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드디어 요소킨 수업 첫날이었다.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이 건네준 운동복을 입은 채 거울을 들여다봤다.

    일반 여성들은 평상시 바지를 입지 않는 안타까운 시대였지만, 요소킨 운동복은 바지로 되어 있었다.

    타이즈 형태의 바지는 전생에서 봤던 요가복과 유사했다.

    상의는 통이 넓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튜닉이었는데, 허리선 아래는 통치마 형태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다리 스트레칭에 용이했다.

    첫날 수업의 수강생은 나와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 둘뿐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운동복이라니! 특이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예상보다 더 특이하네요!”

    디아브 백작 부인은 나와 달리 이런 식의 운동복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영 어색해했다.

    메릴 선생님은 백작 부인에게 입다 보면 곧 익숙해질 거라는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그리고 함께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는데,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어머나! 이 방은 우리 요소킨 수업을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주신 건가요?”

    “물론이죠.”

    상큼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한번 벌어진 선생님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긴 그녀가 좋아할 만도 했다.

    윌트슨 공작성의 요소킨 강의실은 널찍한 방 안의 세 벽면이 커다란 거울로 덮여 있었다.

    “왕립 아카데미 강의실은 한쪽 벽면만 거울이거든요. 그것도 제가 학장님을 몇 번이나 찾아가서 설득한 끝에 얻은 거예요!”

    그런데 이곳은 메릴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알아서 이렇게 인테리어 작업을 해 둔 것이니 그녀가 감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빛났다.

    “이런 강의실은 제 꿈이었거든요.”

    울먹이는 메릴의 목소리에서 순수한 진심이 느껴졌다.

    “선생님,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더 넓고 근사한 강의실을 갖게 되실 거예요. 우리 열심히 해 봐요.”

    “감사합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

    *   *   *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은 강의실의 근사한 모습에 감명받고 눈물을 글썽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었다.

    딱 강의가 시작되자 그녀는 다소 깐깐한 눈빛과 말투로 우리를 지도했다.

    “하나 둘에 숨을 들이마시고, 셋 넷에 숨을 뱉을게요. 천천히. 하나, 두울….”

    “윌트슨 공작 부인, 조금 더 상체를 숙여 주세요.”

    “디아브 백작 부인, 옆구리가 땅길 때까지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해 주셔야 합니다. 자아, 쭈욱!”

    하아, 하아, 숨이 목 끝까지 찼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역시 엘프윈의 몸다웠다.

    첫 수업이라서 기본 동작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은 꽤 많이 버거워했다.

    그래도 다행히 강의실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를 부를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   *   *

    한 시간 남짓의 운동이 끝난 후, 우리는 둘러앉아 허브차를 마셨다.

    운동의 시작은 허브차와 함께 명상 시간을 가지고, 운동의 끝은 허브차와 함께 담소 시간을 가지는 것이 요소킨의 규칙이라고 했다.

    이 운동이 귀족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운동 후에 갖는 담소의 시간 말이다.

    디아브 백작 부인의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너무나 개운한 운동이었어요! 그동안 전 승마나 검술 같은 과격한 운동만 좋아했었거든요. 그래서 과연 요소킨 운동이 나한테 맞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메릴 선생님, 윌트슨 공작 부인, 너무 감사해요.”

    “잘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디아브 백작 부인께서는 그동안 운동을 쭉 해 오셨군요. 어쩐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잘 따라오신다 싶었어요.”

    “어머, 그런가요? 네, 제가 몸 움직이는 걸 많이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한답니다!”

    하하하, 앨리슨의 웃음이 강의실 전체에 울렸다.

    다부진 체격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나저나,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는 좀 어떠세요? 아까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좀 할 만하신가요?”

    메릴 선생님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물었다.

    하긴 운동 내내 창백한 얼굴로 헉헉거리며 몸을 비척비척 움직이던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할 수 없었겠지, 끄응.

    “솔직히 많이 힘들어요. 디아브 백작 부인과는 다르게 제 몸은 운동이 처음이거든요.”

    “저런, 그랬군요. 힘든데 계속하실 수 있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그러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자신 있다는 듯 두 주먹을 말아 쥐고 하늘을 향해 으쌰으쌰 올려 보였다.

    하지만 주먹에도, 팔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얇은 팔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파이팅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디아브 백작 부인이 내 동작을 따라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요! 우리 이렇게 오래오래 같이 운동해요.”

    “좋아요!”

    호호호, 널찍한 강의실 안에 세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사교 활동의 기쁨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는 물론이고, 전생에서도 나의 삶은 사교 활동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주중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야근하느라 바빴고, 주말은 이런저런 일들로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다.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친구들과 즐겼던 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윌트슨 공작가의 재력 덕분에 오늘 운동 선생님을 집으로 초빙해서 수업을 받았고, 운이 좋아 운동 메이트도 생겼다.

    ‘엑스트라지만, 지금 좀 행복한 것 같아!’

    헤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곧 죽을 운명에 대한 걱정은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웃음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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