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42)
  • 11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자신 있게 말했다.

    “윌트슨 공작성에서 그룹 수업을 하실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선생님, 언제까지 학교 수업과 개인 수업으로만 요소킨 운동을 이끌어 가실 작정이세요? 제 생각은 이래요. 요소킨 운동은 앞으로 더욱더 유행하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분홍 머리카락의 작은 여자는 매우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방금 내 입에서 거리낌 없이 나온 말들은 사실 약간의 부풀리기가 가미된 내 바람이었다.

    훗날, 대체 무슨 일로 그녀가 큰 빚을 지고, 그 빚 때문에 속세를 떠나 대신전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모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원작 소설에는 해당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엑스트라의 배경 이야기에 많은 글자 수를 할애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메릴 스웨이드가 대신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요소킨은 꽤나 핫한 운동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큰 빚을 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신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요소킨 운동은 점점 더 부흥했으리라, 는 것이 매우 주관적인 내 예상이었다.

    아니, 내 희망사항이었다.

    원작 소설의 작가 양반은 메릴 스웨이드가 여자 주인공, 베로니카와 만나기 위해 큰 빚을 얻었다는 설정을 만들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제크론이 아내와 사별한 채 홀로 지낸다는 설정을 입히기 위해 엘프윈에게 출산 중에 죽는다는 운명을 준 것처럼 말이다.

    내가 새로운 운명을 꿈꾸는 것처럼, 메릴 스웨이드도 새로운 꿈을 꾸기를 바랐다.

    내가 죽음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메릴 스웨이드가 큰 빚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두 눈을 밝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몇 년 후엔 훨씬 많은 귀족 여성들이 요소킨 수업을 듣기 위해 줄을 설 거예요. 사업을 한다 생각하시고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할 때라고요.”

    “사업…이요? 먼… 미래요?”

    메릴 스웨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운동을 사랑하고, 창의적인 두뇌를 가진 덕분에 새로운 운동법을 창시한 그녀였다.

    하지만 그것을 사업으로서 무럭무럭 키울 생각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왕립 아카데미의 선생님이라고는 하나, 한미한 귀족 집안 출신의 여자가 감히 사업과 같은 큰 그림을 그리기는 쉬운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목소리 톤을 한껏 올리며 열변을 토했다.

    마치 고객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영업 사원 혹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네, 사업이요! 그 기초를 우리 윌트슨 공작성에서 닦으세요.”

    “그, 그게….”

    “귀부인들을 위한 수업인 만큼 아무 지역의 아무 건물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윌트슨 공작성에서 하는 수업이라면 얘기가 다르지요.”

    “아… 그건 그렇겠네요.”

    메릴 스웨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넓고 고급스러운 수업 공간을 제공할게요. 귀부인들께서 프라이빗하게 모이기도 한결 편할 테고요. 공작성으로 왕래하는 마법 마차는 전부 윌트슨 공작가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와… 엄청난 제안이네요. 하지만 윌트슨 공작가는 다른 가문들과 별로….”

    메릴 스웨이드는 말을 하려다가 중간에 주춤거리며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선생님께서 정확히 보셨어요. 맞아요. 윌트슨 공작가는 다른 귀족 가문들과 왕래가 잦은 편이 아니죠. 친구가 없거든요.”

    “그, 그런 말씀을 드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메릴 스웨이드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분홍색으로 빛났다.

    그녀의 입가가 움찔거리며 민망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안드리는 거예요. 사실 이건 저를 위한 제안이기도 해요. 선생님께서는 공작성에서 그룹 수업을 진행하시고, 저는 새로운 귀부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말이에요.”

    이런 제안을 어떤 곳에서는 윈윈 전략이라고 한답니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호호호 웃었다.

    어떠세요? 목소리 대신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메릴은 잠시 주저하기는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분홍색 눈이 물기를 살짝 머금은 듯 반짝반짝 빛났다.

    “좋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 윈윈 전략, 한번 해 보도록 하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쥔 운동 선생님의 마른 손이 꽤 단단했다.

    *   *   *

    “마님, 대단하십니다. 그런 제안을 생각해 내시다니요!”

    매튜가 청회색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저 눈빛 조심해야 해!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대충 얼버무렸다.

    “개인 수업보다는 그룹 수업이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뿐이에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생각 없이 내놓은 제안이라는 듯이.

    하지만 이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 온 생각이었다.

    ‘사실 난 다 계획이 있었다고!’

    후훗, 절로 뿜어져 나오는 음흉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전생의 삶에서 고단한 출퇴근길을 달래 줬던 것은 휴대폰으로 읽는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하게 서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손에 꼬옥 붙들었던 휴대폰.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진 환상의 세계.

    대부분 소설의 주조연들은 귀족이었고, 그들은 거대한 성에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요 동선은 침실, 응접실, 집무실, 서재 정도뿐이었고, 나머지 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웅장한 집에 넓고 좋은 방이 넘쳐 날 텐데 거의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건 낭비잖아. 임대 놓으면 다 돈인데!’

    땅덩어리가 좁아 부동산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대한민국이란 곳에서 나고 자란 나의 상식으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허튼 생각을 했었더랬다.

    ‘만약 내가 귀족 가문의 거대한 성에서 살게 된다면 놀리는 방 없이 다 임대를 놓아 돈을 벌겠어!’

    가장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과도 공유할 수 없었던 망상 중의 망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의 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전생의 삶을 온전히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 망상들아.’

    이 자리를 빌려서 나의 옛 망상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아, 이게 아닌데, 크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스물다섯 살에 닥친 불운한 죽음 이후 나는 엘프윈의 몸을 얻게 됐고, 거대한 공작성에 살게 됐다.

    전생에서 임대로 ‘돈을 벌자’고 세웠던 계획은 약간 수정했다.

    임대로 ‘건강한 삶을 살자’는 것으로 말이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건강이었으니까.

    돈은 이미 차고도 넘쳤으니까.

    물론 다 남편 돈이긴 하지만, 쩝.

    뭐, 부부는 일심동체라니까 남편 돈을 내 돈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어쨌든 첫 임대 계약이 술술 풀려서 기분이 꽤나 좋았다.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은 좋은 입지의 강의실을 얻었고, 나는 들을 수 없었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과의 면담이 끝난 후, 나와 매튜는 학교 앞 상가가 길게 늘어선 길을 걷고 있었다.

    뎀프샤의 공작성으로 돌아가기 전 마음에 드는 디저트 카페에 가서 달콤한 간식을 즐기며 잠시 쉬었다 가자는 내 제안에 매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십지 읽을 때 맛집 리스트 꼼꼼히 봐 둘 걸 그랬어!’

    아쉬운 속내를 달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기자기 예쁜 가게들이 많아 눈이 즐거웠다.

    “그런데 공작 각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공작성에서 그룹 운동 수업을 하게 됐다는 것을요.”

    매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선생님의 확답을 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들어가서 말해야죠.”

    “걱정되지 않으세요? 공작 각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 건강을 위해서 아낌없이 지원해 준다고 약속했거든요.”

    나는 여전히 제크론이 껄끄러웠다.

    될 수 있으면 그와 단둘이 만나는 시간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가 약속을 잘 지키는 재질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매튜도 공작 각하께 잘 얘기해 줘요. 임산부에게 일정한 운동이 매우 중요하고,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은 꽤 훌륭한 운동법을 가르치는 분이라고요.”

    “아, 그 부분은 마님께서 직접 말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기 보세요.”

    “네? 어디-”

    매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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