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42)

8화

마침내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아내가 건강에 대한 염려가 많더군. 평소 그녀답지 않게 말이야.”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이 여성이라면 응당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지요. 사실 여성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

“게다가 마님의 경우는 요전번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앓으신 후 더욱 건강을 염려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기억도 잃으셔서 더욱 불안해하시고 예민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은발의 주치의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던 제크론이 흐음, 짧게 탄식 섞인 한숨을 뱉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지며 짙은 주름이 생겼다.

“아내와 아이의 건강을 잘 부탁하네.”

잠깐이었지만 매튜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내심 놀랐다.

그동안 공작이 이렇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부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음을 매튜 역시 알고 있었다.

공작성 밖에서 들리는 소문이 그러했고, 공작성 안에서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 역시 그러했으니까.

‘그런데 공작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공작이라니.’

매튜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제크론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짙푸른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매튜는 얼떨떨 멍해졌던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각하. 윌트슨 공작가의 건강에 대한 일은 제가 맡은 업무인 것을요. 그리고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최고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매튜가 멋쩍게 웃었다.

제 의술 실력에 대해서 겸손을 모르는 자의 웃음소리가 동쪽 정원에 작게 울렸다.

“혹 예산 추가 편성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고.”

“내일 예산서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예산 추가라니!

돈은 언제나 옳다!

매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   *   *

바로 아르젠토 차를 끊는 치료에 들어갔다.

수개월 전 치료에서는 시작부터 아르젠토 차를 바로 끊고 금단 증세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라서 아르젠토 차를 바로 끊어 버리면 갑작스러운 상태 변화에 몸이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복용량을 서서히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처음 이틀은 기존 복용량의 4분의 3을, 다음 이틀은 반절을, 그리고 마지막 이틀은 4분의 1을 복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복용량이 줄어들어 생기는 금단 증세는 추가 약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임신 중인 몸이었기에 최대한 적은 양으로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최고급 치료약을 사용했다고 했다.

공작성 내 의료 예산이 크게 늘었다며 매튜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사용하는 값비싼 고급 약재에 대해 확고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역시 매튜의 실력은 훌륭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지금, 나는 아르젠토 차를 완전히 끊었다.

물론 아직 금단 증세에서 깨끗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치료약 없이 견딜 수 있는 정도는 됐다.

약간의 손떨림과 불면증, 그리고 어지럼증은 내가 오롯이 견뎌 내야 할 내 몫이었다.

매튜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한 달 후면 이런 증세도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아르젠토 차의 중독 치료가 끝나자 제국 각지에서 유능하다고 거론되는 의원과 약제사, 그리고 민간치료사를 만났다.

하지만 그들의 진단은 거기서 거기였다.

특별한 병은 없다고 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내 약한 체력을 우려했고, 그보다 더 약한 정신력을 걱정했다.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병을 완전히 치료하니 그다음부터는 건강해졌습니다!’ 하는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밑도 끝도 없이 죄다 저질 체력, 유리 멘탈을 탓할 뿐이니 정말 속수무책 같았다.

그런데 한 민간치료사가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나이 지긋한 여자 치료사의 이름은 모레나였다.

그녀는 두 손바닥을 쫙 펼치고 누워 있는 내 몸 위를 스캔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그런 식으로 내 몸을 살피던 모레나가 마침내 두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나는 모레나의 주름 많은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녀의 차분한 음성이 내 귀에 착 감겼다.

“마님을 뵙기 전에 먼저 공작님을 뵙고 진찰하고 왔지요. 공작님께서는 강력한 태양의 마력을 지니고 계시고, 마님께서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달의 마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두 분 사이에서 생긴 태아의 마력은 공작님의 마력을 닮은 것 같군요.”

“태양의 마력과 달의 마력?”

“네. 반대 성질의 마력은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부딪치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태중 아이가 점점 자랄수록 마님의 몸은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모레나가 하는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반대 성질의 마력인 태양의 마력과 달의 마력이라면… 동양 사상의 음과 양의 개념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모레나의 진단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물음에 모레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서로를 밀어내던 반대 성질의 마력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면 환상의 궁합을 만들어 내지요.”

“…조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같은 성질의 마력은 처음엔 잘 어울리는 듯하지만 거기서 그칠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융합한 마력이 ‘성장’으로까지 나아가는 데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단다.

하지만 다른 성질의 마력은 처음엔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다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면 더욱 강력하게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했다.

그렇게 융합된 마력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성장’에 이른단다.

“그러니 마님께서는 태중 아이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태양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친해지도록? 어떻게?”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마님의 몸 안에 확실히 존재하는 아이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겠지요.”

“인정하고, 사랑한다라….”

“네. 아이를 느끼시고, 아이와 소통하시고, 함께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함께… 말이지.”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생처음 접하는 이론도 아니었다.

‘결국 적절한 태교가 필요하다는 소리네.’

전생에서 똑순이 친언니가 태교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많이 봤었기에 대충 그 비슷하게 따라 하면 될 것이다.

나는 모레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또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마력이 공작님의 마력과 비슷한 성질을 띠는 만큼 공작님과의 친밀도를 유지하시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에… 엥?”

“두 분이서 매일 일정 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머무르시면서 서로 기운을 나누시면 좋습니다.”

“그… 같은 공간에서… 기운을 나누라고…?”

순간 매우 난감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태교를 엄마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아빠와 함께 하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빠랑 엄마는 사이가 매우 안 좋거든요. 같은 공간에서 기운을 나누거나 하는 그런 사이가 못 되거든요, 쩝.’

속으로 중얼거리며 애매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백발의 치료사가 빙긋 웃었다.

“두 분이 하루 한 번, 30분씩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것. 이것이 마님의 건강을 위한 제 처방전입니다.”

모레나는 곁에 섰던 주치의 매튜를 향해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무슨 처방이 이따위야….’

내 미소가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다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님은 매우 바쁜 분이신데? 매일, 하루 30분은 힘들 거야. 다른 처방전은 없을까?”

나름대로의 애절한 눈빛으로 모레나를 봤다.

“공작 전하께서 아무리 바쁘다고 하시더라도 그분은 마님의 남편이고,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요. 30분은 내주실 거라 믿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빙그레 선하게 웃는 모레나의 주름진 얼굴에 대고 또다시 같은 요구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적 외침만큼은 충분히 가능했다.

아아… 모레나여…!

이 몸이 제크론과 매일 함께하게 될 어색한 30분이 너무도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요.

제크론이 아무리 내 남편에, 잘생긴 조각미남에, 이 세계 최고 능력자이지만요.

나에겐 단지 오며 가며 가끔 얼굴은 봤지만, 친하거나 잘 아는 정도는 아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오빠 정도란 말입니다요.

그런 오빠와 매일 30분씩 억지로 같이 있어야 한다니요?

으으… 불편함으로 오염된 공기 때문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공작성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천장이 높은 5층짜리 건물에 널찍한 방이 100개가 넘는다고 했다.

이렇게 넓은 건물 안에서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닌다면 제크론과 한 달 내내 마주치지 않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뭐? 매일매일? 30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매튜에게 도와 달라는 신호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바쁜 일정을 걱정하시는 마님의 마음을 잘 압니다.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저. 마님의 이러한 걱정까지 덧붙여서 공작 전하께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빠직.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 한쪽을 헤집었다.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타들어 가는 속내 때문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아… 스트레스!’

순간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심적 안정이 필요했다.

‘이너피스… 이너피스… 이너피스…!’

속으로 주문을 열심히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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