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2)
  • 7화

    케이트와 주디가 얼른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부축해 줬다.

    그녀들의 도움 덕에 쓰러지지 않고 무사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앉을 수 있었다.

    팔과 손이 무서울 정도로 덜덜덜 떨렸다.

    “그 차를 준비할까요, 마님?”

    주디가 물었다.

    꽤 차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이런 상태인데 내 전속 하녀가 이렇게 차분하다고?

    게다가 ‘그 차’를 말할 때 목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머리가 몽롱해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분명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그 차? 차는 아까 마셨잖아.”

    “아르젠토 차요. 항상 주무시기 전에 드셨거든요.”

    ‘어라?’

    이번에도 그랬다.

    ‘아르젠토 차’를 말할 때만 목소리가 특히 작아졌다.

    확실히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의 차인 건가?

    그런 차를 내가 매일 마셨다고?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 차를 마시지 않으면 손 떨림, 식은땀, 어지러움…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이건 꼭… 위험 약물에 중독된 사람의 금단 증세 같잖아? 엘프윈, 너 대체 뭘 마시고 있었던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눈에서 불이 났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주디가 서랍장 맨 아래 서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왔다.

    ‘오호라, 저 안에 아르 뭐시기라는 찻잎을 보관하고 있었구나.’

    저것은 분명 중독 성분을 지닌 위험한 차이리라.

    위험한 게 아니라면 주방이 아니라 굳이 방 안에 보관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도 내 손끝은 금단 증상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순진한 하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나무 상자를 내게 넘겼다.

    마치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예상이 맞았다.

    상자 안에는 마른 찻잎들이 가득했는데, 향이 무척 진했다.

    “당장 가서 매튜를 불러와.”

    “네? 그건….”

    케이트와 주디는 매우 놀란 눈치였다.

    “왜? 그동안 내가 매튜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었니?”

    “…네, 마님.”

    하녀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또다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뭐 하고 서 있어? 매튜 당장 불러오래도.”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꽤 고압적인 모습에 하녀들은 잠시 움찔거리더니 밖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엘프윈, 너 어쩌자고 이런 위험한 걸 마시고 있었던 거야!”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하아,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식은땀은 계속 흘렀고, 손의 떨림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나, 이 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젠 좀 무서웠다.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평범한 건강상태로도 살아남기 힘든 것이 출산이다.

    그런데 이런 몸이라니!

    어떤 위험해 보이는 차 따위에 중독된 몸이라니!

    눈물이 솟아오르려는 것을 애써 눌러 담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때, 은발의 주치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에게 찻잎이 든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본 매튜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흔들렸다.

    그는 상자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매튜의 얼굴이 완전히 딱딱하게 경직됐다.

    “아직도 아르젠토 차를 복용하고 계셨군요, 마님.”

    “매튜도 알고 있었나요? 내가 이 차를 마셔 왔다는걸?”

    매튜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개월 전에 마님께서 도움을 요청하셨고, 그래서 치료를 시행했습니다. 그때 끊으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셨군요.”

    물론 마님께서는 기억 못 하시겠지만요,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그랬나 봐요. 이게 정확히 어떤 차죠?”

    “항정신성 약물에 해당되는 차입니다. 적절한 양을 적절한 기간 동안 복용하는 것은 신경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마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질 때면 조금씩 복용했었다고 들었습니다.”

    “…….”

    “하지만 의사의 진단 없이 과한 양을 장기간 복용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죠. 본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태아에게도 말입니다.”

    “나란 여자… 정말 끔찍한 여자였군요. 임신한 상태에서 이렇게 위험한 차를 몰래 마시고 있었다니요.”

    나는 엘프윈을 어느 정도 동정했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녀의 모습에서 늘 가족의 사랑에 굶주렸던 내 모습이 겹쳐졌으니까.

    아이를 낳다가 절명할 그녀의 모습에서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허망하게 죽은 내 모습이 겹쳐졌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연약한 정신력과 과민한 신경 때문에 삶이 괴로운 나머지 해로운 약에 의탁하며 제 몸을 망가뜨리는 행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제 몸뿐만 아니라 제 아이한테도 해로울 수 있는 행동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던데.’

    과연 엘프윈을 제대로 고쳐 쓸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아직도 덜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고 매튜를 봤다.

    “고쳐 줘요.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끊을 테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게 무슨 소리지? 죽는다니? 누가? 왜?”

    갑자기 서늘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모두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봤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제크론이 복도에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밤에 공작 부인의 침실에 들르는 일이 전혀 없는 제크론의 등장에 모두가 심히 당황했다.

    게다가 그의 모습은 꽤나 섬뜩했다.

    어두운 복도의 옅은 빛이 전부 그의 눈동자에 몰렸는지, 짙은 청안이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까만 그림자에 눈동자만 밝게 번뜩이는 것 같아서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크론은 길고 탄탄한 다리를 우아하게 앞으로 뻗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진실을 갈구하는 푸른 눈동자가 내 얼굴을 뚫을 듯이 쳐다봤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아르젠토 차 따위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미운털이 잔뜩 박혀 있는데, 거기에 하나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잘못도 아니고 임신한 상태에서 중독성 강한 차에 금단 증세를 보이는 것은 가문 후계자의 안위와도 직결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

    ‘억울해! 내가 마신 게 아니라고!’

    나는 엘프윈을 탓했고, 그녀를 창조한 작가를 원망했다.

    내가 입을 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매튜였다.

    “마님께서 앞으로 죽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님 본인의 육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죠. 안전한 출산을 위해서요.”

    크흠, 매튜는 말아 쥔 주먹을 입가에 갖다 대며 마른기침을 뱉어 내는 동시에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시선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나는 제크론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노력해 줘요, 네?”

    “…….”

    “아까 낮에 말했듯이요.”

    잘못한 게 있고, 그것을 절대 들키기 싫었던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 중에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보내며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 가장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절박함이 먹혀들었던 것일까.

    제크론 역시 녹녹한 눈빛과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최대한 들어줄 테니.”

    숨죽인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치의와 하녀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과연 공작 전하의 목소리가 맞는가?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는 분이셨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크게 아픈 거라던데… 처음엔 마님께서 그러시더니 이젠 공작님까지.

    진짜 두 분 다 어디 아프신 거면 우리 윌트슨 공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애써 꾹 다물어야 했다.

    *   *   *

    다음 날 윌트슨 공작성의 주치의는 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공작의 집무실이 아닌 동쪽 정원으로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튜는 어제 일을 떠올리자 걱정이 앞섰다.

    공작 부인의 침실을 찾았던 공작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직 공작은 공작 부인의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과연 언제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 매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공작성의 최고 주인은 윌트슨 공작이었기에 공작이 콕 집어서 묻는다면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각하.”

    “자네도 가끔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리로 불렀어. 날씨도 좋고 해서 말이야. 어때? 활 좀 쏘나?”

    “어렸을 땐 곧잘 했죠.”

    매튜는 공작이 건네는 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바로 두 사람의 활쏘기가 시작됐다.

    먼저 활시위를 당긴 것은 제크론이었다.

    얇은 셔츠 아래 단련된 근육들이 존재감을 뽐내며 불끈거렸다.

    피융, 날아간 화살은 과녁의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역시 각하십니다.”

    다음 차례는 매튜였다.

    매튜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활시위를 당겼다.

    숨을 참고 과녁을 겨냥했다가 이때다, 싶은 순간에 화살을 쏘았다.

    피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역시 명중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것치고는 녹슬지 않은 실력이군.”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한동안 둘 사이에 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저 번갈아 가며 활을 쏘는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각자 열 발의 화살을 다 쏘고 나서야 비로소 둘은 자리에 앉아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서로를 봤다.

    “하고 싶으신 말씀, 하시지요.”

    매튜가 제크론을 보며 말했다.

    주치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다소 긴장한 듯 입꼬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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