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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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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엘프윈은 출산하면서 죽을 운명이다.

    하지만 출산만 아니었다면 대략 평균적으로 29세까지는 충분히 살 수 있었으리라.

    어차피 죽으면 쓰지 못할 돈, 이번에 싹 다 당겨 받아서 내 운명의 5개월을 위해서 쓰고 싶었다.

    돈으로 건강 자체는 못 산다.

    하지만 돈으로 건강한 삶을 위한 환경 정도는 살 수 있다.

    나는 곧 다가올 죽음을 깨부숴야 할 정도의 건강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나는 윌트슨 공작 부인인걸!’

    턱을 위로 치켜들며 속으로 외쳤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면 제국에서 경제력으로 보나 정치력으로 보나 최고 중의 최고인 남편, 제크론 윌트슨 공작에게 이 정도는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미리 연습했던 말을 다 마친 나는 제크론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애써 화를 눌러 담으려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고, 얼굴 모공에서 뜨거운 김이 퐁퐁 품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을 애써 떨쳐 버리려 애썼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

    드디어 벌어진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내 몸 어딘가를 도려낼 듯 제대로 벼려진 목소리였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려는 용기들을 꽉 붙들고 심호흡을 했다.

    “건강을 위해 쓸 거예요. 제가 몸이 좀 약해요? 건강 자체를 살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대신에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시도해 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죠.”

    “갑자기 건강을 염려하는 이유는?”

    “그걸 몰라서 물어요?”

    “…….”

    하긴 알 리가 없겠지.

    그는 소드 마스터였으므로.

    인간 중에서는 거의 최고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살고 싶으니까 그렇죠. 주치의가 그러더라고요. 출산에서 나와 아이, 둘 다 무사할 확률은 56퍼센트 정도라고요.”

    제크론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예상보다 현저히 낮은 숫자를 듣고 놀란 듯했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나도 처음에 56퍼센트란 확률을 듣고 놀랐으니까.

    “절반을 겨우 넘는 확률이죠. 난 그 56퍼센트 안에 들고 싶어요.”

    “흠… 여성의 출산이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

    어라?

    제크론의 목소리가 좀 누그러져 있었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워진 눈매에 날 선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이해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대로 내 계획이 먹혀들어 가는 걸까?

    8년 치 내탕금은 과연 얼마일까?

    행복한 상상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며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씰룩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가불은 없어.”

    “감사… 네? 뭐라고요?”

    내 귀를 의심했다.

    가불에 관대하다며!

    출산의 위험성에 놀랐잖아!

    그런데 왜 가불이 안 된다는 건데?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다 말할 수 없어서 나는 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렸다.

    반면 그는 꽤나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봤다.

    우이씨!

    시대가 어떻든지, 계급이 어떻든지, 관계가 어떻든지, 결국 돈을 가진 자의 눈빛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반면 돈을 갖지 못한 자의 눈빛은 불안하고 구차해진다.

    ‘빌어먹을 자본주의! 염병할 물질만능주의!’

    험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지. 지난달에 가불받아 가긴 했지만, 이번 달에도 내탕금을 주겠어.”

    “…….”

    “가불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절대 없어. 사정해도 마찬가지야. 매달 정해진 내탕금을 그때그때 지급할 거야.”

    치잇, 그게 뭐야.

    입술이 뾰로통 튀어나왔다.

    “단, 나도 당신의 건강이 많이 걱정되는 바야. 그러니 당신이 건강을 위해서 추가적으로 지출해야 할 내역이 생기면 그때마다 주는 것으로 하지.”

    돈을 더 쓰고 싶으면 매번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무엇이든지요?”

    “응. 무엇이든지, 허무맹랑하지 않은 선이라면.”

    “허무맹랑한지 아닌지 결정은 누가 어떻게 하는데요?”

    결국 자기 입맛대로 하겠다는 거 아닌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봤다.

    “내가, 일반 상식을 기준으로 정하겠어.”

    “역시.”

    힘이 쪽 빠졌다.

    “주기 싫으면 그냥 주기 싫다고 할 것이지, 선심 쓰는 듯하다가 나중에 다 안 된다고 반려할 생각이죠?”

    내가 네 생각을 모를 줄 알고? 흥!

    참 애정하던 캐릭터였는데, 내가 그를 이렇게 밉상으로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반려할지 안 할지 지켜보면 될 일이야. 당신이 꼭 건강하게 아이를 순산하면 좋겠군.”

    ‘아?’

    지금 내 걱정을 해 주는 거야?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뭐 그런 거야?

    찬바람 쌩쌩 불던 무심하고 무정한 남편이?

    캐릭터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다고?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울렸다.

    “적어도 이번 달 내탕금은 건진 셈이니 성공했군, 당신.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 주겠어? 난 바빠서 말이야.”

    제크론의 시선이 책상 위 서류로 향했다.

    그럼 그렇지.

    캐릭터가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없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 내탕금은 감사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드려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내뱉으며 속으로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나불댔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반 상식과 내가 생각하는 일반 상식이 많이 다르지 않으면 좋겠네요. 흥!’

    제크론이 다소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흐억, 설마 속으로만 나불대던 속마음이 목구멍으로 새어 나온 건 아니겠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제적 갑을관계가 사람을 이렇게 소심하고 옹색하게 만든다.

    그런데 제크론의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없는 걸 보니 내 속마음은 제자리를 이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해서 저렇게 놀란 거야?

    그동안 엘프윈은 헤어질 때 인사도 제대로 안 했던 걸까?

    ‘으이구, 엘프윈… 쯧.’

    가볍게 묵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두근두근두근.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오늘따라 존재감을 뿜뿜, 뿜어냈다.

    *   *   *

    엘프윈이 나간 뒤, 제크론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집중이 안 됐다.

    “오늘 내탕금은 감사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드려요. 그럼 수고하세요.”

    집무실을 나가기 전 그녀가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전에 엘프윈이 이렇게나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한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제크론은 고개를 저었다.

    영혼 없이, 혹은 비아냥거리듯 감사의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용건이 다 끝나고 이렇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전에 엘프윈이 잘 부탁한다고 인사한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그녀는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듯 받아들였다.

    당연한 것들이니까 고맙다거나, 잘 부탁드린다는 식의 인사는 필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위와 재산을 타고난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이 고마워하는 대상이라고는 저들을 세상에 있게 한 부모님과 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감사하다니? 잘 부탁드린다니?’

    허, 참.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기억상실증 중에서도 중증인가 보죠, 뭐. 기억을 잃으면서 성격도, 뭣도, 전부 다 잃어버린.”

    식당에서 엘프윈은 이렇게 말했다.

    제크론은 식당에서 나온 뒤 바로 주치의를 불러 그녀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그의 물음에 주치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심각한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인격이 달라지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치료는 가능한가?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나?”

    흠, 매튜는 한숨을 작게 내뱉고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물음에 답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본인이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고, 또 노력한다면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의 의지라….”

    “네. 반대로 기억에 대한 애정이 없고,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힘들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뇌의 문제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엘프윈은 늘 제멋대로였다.

    제크론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공작 부인으로서 평범하게 제 역할을 해 주는 것.

    딱 그거 하나면 됐다.

    하지만 그녀는 특히 그 하나의 역할을 힘들어했다.

    “날 아내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날 사람으로 대한 적 있냐고요! 윌트슨 따위, 공작 부인 따위, 당신의 옆자리 따위 욕심내는 게 아니었어!”

    황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엘프윈은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봤을 때, 제크론은 심히 당황했다.

    “…엘프윈.”

    “가요! 가 버려요! 이제 다 틀렸어! 다 없던 게 돼 버리면 좋겠어! 그냥 싹 다 없어지면 좋겠어!”

    엘프윈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제크론을 거세게 밀어내는 그녀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돌아서야 했다.

    그리고 지금 제크론은 그때의 제 선택을 후회했다.

    “…마음의 문제라.”

    그때 그렇게 엘프윈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면 그녀가 기억을 잃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략적으로 맺어진 결혼이었지만 어쨌든 제 아내였고, 제 사람이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있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쌓이다 보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다들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제크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야 할 것들이 쌓여 있었지만 이대로 앉아 있어 봤자 집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엘프윈에 대한 생각의 조각들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나았다.

    그는 하던 일을 덮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저녁 식사도 식당에 가서 했다.

    앞으로는 항상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일러뒀더니 하녀들이 알아서 잘 준비해 두고 있었다.

    고기, 빵, 채소가 다양하게 어우러진 식단이었다.

    나는 원래 식탐이 많은 편이다.

    배고픈 것을 못 견딘다.

    전생의 나는 ‘뚱뚱’까지는 아니었지만 ‘통통’한 체격이었다.

    물론 내 관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흐, 흠!

    그런데 지금 엘프윈의 몸은 임신을 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말랐다.

    전생에서의 내 배보다 홀쭉한 임신 5개월 차의 배를 봤을 땐 안쓰러움과 부러움, 전혀 다른 두 개의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매우 안타깝게도 이 몸의 위는 내 식탐을 따라가지 못했다.

    차려진 음식을 보고 군침이 흘렀지만, 정작 먹을 수 있는 양은 적었다.

    겨우 애써야 절반 정도를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앞으로 위도 착실히 늘려 가야겠군.’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공작성 주방장의 음식 솜씨는 일품이었는데, 이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을 수 없음에 속이 탔다.

    저녁 식사 후, 내 침실에 딸린 개인 응접실에서 허브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낮에 제크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꼭 건강하게 아이를 순산하면 좋겠군.”

    그는 나를 볼 때 주로 찌푸린 표정을 지었는데, 눈썹 사이가 한껏 좁아지며 짙은 주름이 파였다.

    그런데 내 순산을 바랄 때 그의 표정은 매우 온화해서 순간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래서 사람은 표정 관리가 중요해.’

    따듯한 허브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두근두근.

    또다시 심장이 제 존재를 과시하며 작게 뛰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지는 두근거림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 신기할 정도였다.

    심장을 말랑말랑 따뜻하게 달구는 것은 내 감정일까, 아니면 엘프윈의 감정일까?

    한 손으로 심장 부근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엘프윈은 제크론을 좋아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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