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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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가불?”

    “네. 공작 전하께서는 가불에 꽤 관대하신 편이라고 알고 있어요.”

    “흐음… 가불에 관대하다라?”

    망설여졌다.

    냉혈한 제크론이 돈을 당겨쓰는 것에 관대하다는 사실이 미심쩍었다.

    그리고 아무리 관대하더라도 아침 식사 시간에 그렇게 버럭버럭 대든 내게 과연 돈을 내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싫어!’

    다시 그와 얼굴 마주치는 상황이 무척이나 께름칙했다.

    평등한 관계로 마주치는 것도 싫을 텐데,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갑과 돈을 받아야 하는 을의 관계에서 만나는 것은 더욱더 싫었다.

    ‘으… 으윽!’

    신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다시 드레스와 신발을 봤다.

    아름답지만 통이 좁은 드레스와 우아하지만 굽이 높은 신발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분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저 좁은 옷에 내 몸통을 욱여넣을 생각도, 저 높은 신발에 내 몸을 올려놓을 생각도 없으니까.

    “좋아. 공작님께 내가 면담을 요청드린다고 전하고 와.”

    “네?”

    또, 또 이 표정이다.

    이젠 익숙해졌다.

    이쯤 했으면 슬슬 저들도 익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숨 반, 목소리 반이 적절히 섞여 나왔다.

    “왜? 또 뭐?”

    “그게… 마님께서는 원래 공작 전하께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을 때는 그냥 바로 찾아가셨거든요.”

    “휴우… 내가 그랬구나. 정말 그냥 막 되는대로 살았구나. 예의도 없이, 경제관념도 전혀 없이 말이야.”

    “…….”

    하녀들의 얼굴이 난감하게 일그러졌고, 몸을 배배 꼬며 안절부절못했다.

    하긴 모시는 공작 부인의 자기비판적 독백을 듣는다면 이런 반응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리라.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들어 보렴, 얘들아. 나 이제부터 좀 달라져야겠어. 한번 심하게 아프고 나니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드네. 물론 기억은 없지만 말이야.”

    “…….”

    “그러니까 케이트랑 주디가 날 좀 도와줘.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말이야. 응?”

    “저희가… 도우라고요?”

    케이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습기가 어리는 게 보였다.

    주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조언이 필요할 때는 지체 말고 너희들의 목소리를 들려줘. 알다시피 나,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니 특히나 너희 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그래 줄 수 있겠니?”

    “네, 그럴게요. 마님!”

    “물론입니다, 마님!”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케이트는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고, 주디는 부들부들 떨리는 제 두 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자, 그럼 케이트는 공작님께 다녀오고, 주디는 내 옷장에서 그나마 편한 옷을 골라 와 주겠니?”

    내가 생긋 웃으며 명령을 내리자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전생에서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 역할만 했었다.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해야 하는 학생이었고, 엄마의 심부름을 해야 하는 딸이었고, 언니의 조언을 따라야 하는 동생이었고, 팀장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사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내 모습은 영 낯설다.

    ‘그런데도 케이트와 주디에게 부탁하듯 명령할 때,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 위화감이 거의 없어서 신기할 정도야.’

    이런 걸 보면 소프트웨어는 100퍼센트 나, 하드웨어는 100퍼센트 엘프윈, 이런 공식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이 세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신분제 사회에 맞게 말투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 ‘소프트웨어는 80퍼센트 나, 20퍼센트 엘프윈’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드웨어도 마찬가지로 80퍼센트는 엘프윈, 20퍼센트 정도는 나…일 수도 있겠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원래 내 머리로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엘프윈 덕분에 하게 된다.

    원래 엘프윈의 몸이라면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내 의지 덕분에 하게 된다.

    ‘그냥 엘프윈의 몸이라면 손도 못 쓰고 죽었겠지만, 내 의지가 깃든 엘프윈의 몸이라면… 어쩌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죽음 따위에 지고 싶지 않았다.

    어느 작가가 멋대로 지은 내 운명 따위에 승복하고 싶지 않았다.

    작가에게 엘프윈은 하나의 장기짝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에게 엘프윈은 내 인생 자체였으니까.

    ‘내 인생을 살 거야. 살아남을 거야!’

    그러니까 남편에게 내탕금을 가불받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말고 해내 버리자!

    두 눈을 부릅떴다.

    *   *   *

    제크론의 집무실 앞에 섰다.

    똑, 똑, 똑.

    노크를 한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그는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높이 쌓여 있었는데, 그는 꽤 바빠 보였다.

    ‘치잇, 너무하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사람이 들어왔는데 고개도 들어 보지 않다니!’

    순간 그를 담은 내 시야에 불빛이 번쩍했지만 참아야 했다.

    이 자리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부탁하러 온 것이니까.

    게다가 그냥 부탁이 아니라 돈 부탁이었으니까.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그의 책상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비즈니스적 미소를 한가득 장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아줘서 고맙군. 바쁘니까 본론부터 말하지.”

    “내탕금 가불해 줘요.”

    그의 주문대로 바로 본론을 말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어려운 말이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을 때, 나는 내심 놀랐다.

    ‘좋았어! 지금 아주 자연스러웠어!’

    드디어 그의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지고 나에게 닿았다.

    제크론은 내 입에서 나온 본론이 꽤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청안을 담은 눈매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고, 입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하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내탕금 가불에 비교적 관대하다고 했는데, 그녀들이 생각하는 관대의 정도가 어떤지를 묻지 않았던 것은 내 실수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아직도 아침 식사에서의 신경전으로 꽁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뭐라고?”

    “당신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방금 내탕금 가불해 달라고 말했어요, 나.”

    “지난달에도 가불했잖아.”

    “네, 그걸 지난달에 다 썼더라고요. 물론 기억은 없지만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떳떳했다.

    지난달에 내탕금을 가불받은 것도, 그 돈을 다 써 버린 것도 내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같은 사람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내 당당한 태도가 몹시 못마땅할 테지만 말이다.

    제크론은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꼴도 보기 싫다는 건가? 쳇.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지?”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뭐어?”

    나도 내 질문이 참으로 어이없다는 거 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뭐 씹은 표정을 짓는 건 좀 삼가 주면 좋을 텐데.

    나도 지금 이 발언만큼은 무척이나 민망하다고!

    제크론은 내가 그의 질문을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같은 질문을 이번에는 풀어서 다시 한번 물었다.

    “내탕금 가불, 얼마나 필요한지 물었어.”

    “이 세계의 평균 수명은 몇 살 정도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 귀족 부인들의 평균 수명이요.”

    노빠꾸.

    나 역시도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돌려서 물었다.

    그는 포기가 빠른 사람인 것 같았다.

    적어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아내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 중에는 말이다.

    제크론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대꾸했는데, 그게 마치 절규처럼 들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대충 당신 주위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될 거 아니에요.”

    그의 절규에다 대고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고통 따위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투로.

    제크론은 목소리 대신 눈빛으로 대답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고.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내가 할 말들을 미리 짜 뒀고, 여러 번 연습했고, 용기까지 박박 긁어모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당신 할머니나, 이모 혹은 고모들, 아니면… 주위 다른 귀족 부인들이요.”

    제크론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소환하는 중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고모님 한 분도…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의 많은 여자들이 서른을 못 넘기는 경우가 많았군.”

    “뭐… 서른이요?”

    좀 충격이었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죽은 사람이 많다니.

    호의호식하는 귀족님들은 무병장수하는 거 아니었나?

    대한민국 재벌이나 정치인들은 다 그렇던데.

    흠… 이거 좀 아쉽게 됐네.

    “그래서 평균 수명이 뭐 어쨌다는 건데?”

    질문을 내뱉는 목소리 끝이 날카로웠다.

    잘 벼린 칼날처럼.

    제크론은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그를 따라 찻잔을 들고 목을 축인 후 흐읍,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여기 그의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거울을 보면서 몇 번이고 연습했던 부분이었다.

    “제가 스물아홉까지 산다고 치고, 앞으로 스물아홉까지 받을 내탕금을 한꺼번에 가불해 줘요.”

    “뭐어?”

    그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제가 지금 스물한 살이니까, 8년 치 내탕금을 받고 싶어요. 이번에 이렇게 받고, 또다시 가불 얘기 꺼내지 않을게요. 절대로.”

    “…….”

    저 심해와도 같은 눈동자에 가득 들어차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보였다.

    그것은 경멸이었다.

    속이 아팠다.

    누군가가 나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그 누군가가 내 남편이고, 그 남편이 내가 한때 열렬히 애정했던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인 지금 이 썩을 상황에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말을 계속 이어야 했다.

    “그리고 제가 스물아홉 넘어서도 살아 있으면 그때 다시 내탕금을 받기 시작하는 걸로 하죠.”

    그의 이글거리는 눈초리가 너무 무서워서 마지막 음절을 내뱉는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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