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누구냐니요? 나예요, 여보. 당신 아내. 윌트슨 공작성의 안주인. 이름은 엘프윈 윌트슨.”
이름이 예쁘더라고요.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제크론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눈썹을 크게 한 번 씰룩거렸다.
“아니, 당신은 엘프윈이 아니야.”
그녀일 리 없어, 제크론은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봤다.
살짝 오기가 생겼다.
원래 제 부인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주제에.
여기서 살짝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나는 원래 이 소설 <쉐리던의 기도하는 밤>의 주인공인 제크론과 베로니카를 너무 좋아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총 다섯 권짜리 장편 소설을 단숨에 읽어 재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크론과의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에 서서히 메말라 가던 공작 부인에 빙의된 지금은 그를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내가 엘프윈이었고, 엘프윈이 나였으니까.
이 약해 빠진 몸이, 잔뜩 예민해진 신경이 안쓰러웠으니까.
죽어 가는 내가 처연했으니까.
“왜 내가 엘프윈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잖아. 지금도 봐. 당신은 원래-”
“맞아요.”
나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싹뚝.
“나는 원래 식당에서 밥을 먹지도 않았고, 항상 손바닥만 한 접시에 담긴 수프 정도를 먹었죠.”
“…….”
“게다가 여긴 내 집인데도 불구하고 잠옷 차림으로 편하게 나다닌 적도 없고요.”
당신과 다르게 말이에요, 노골적으로 그가 걸친 잠옷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아, 그리고 사실 이것들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제 하녀들이 들려준 이야기죠. 아시다시피 이번에 앓고 난 이후로 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요. 뇌손상… 아시죠?”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말을 좀 많이 했다고 벌써 숨이 찼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잠시 멈췄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와 제크론의 시선은 팽팽하게 맞섰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번득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진 않아.”
“저 말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있나 봐요, 당신? 전 본 적이 없거든요. 비교 대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확실했다.
그는 나 말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기억상실증 중에서도 중증인가 보죠, 뭐. 기억을 잃으면서 성격도, 뭣도, 전부 다 잃어버린.”
나는 마치 남의 사연을 대하는 것처럼 여상한 표정을 지었다.
제크론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런데도 그의 잘생김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결국 심미주의자였으니까.
“내가 착각했나 보군. 지금 당신 그 표정, 그건 엘프윈의 표정이 맞아. 다른 사람 이야기 따위는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 엘프윈. 제멋대로 내뱉는 말에 결국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엘프윈. 결국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엘프윈 말이야.”
밥맛이 다 떨어져 버렸군, 제크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쌩하니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찬바람이 일었다.
치잇, 입술을 꽉 깨물었다.
코끝이 시큰 달아오르는 게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국 참아 냈다.
무정하게 돌아서는 가족의 뒷모습 따위에, 혼자 앉게 된 식탁 따위에 흘릴 눈물은 없었으니까.
그런 눈물은 이미 전생에서 흘릴 만큼 흘렸으니까 말이다.
어느새 내 앞에는 다양한 음식을 담은 접시들이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다.
구운 닭가슴살 요리를 써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지나친 감정이입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우등생 언니의 일류 사립대 학비를 걱정하는 엄마에게 괜히 감정이입 해 버리면 본인의 대학교 진학을 포기해 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회사 옆자리 동료가 당한 부당한 일에 괜히 감정이입해 버리면 그 친구 대신 본인이 팀장과 싸우다가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도 그 못된 버릇 못 고치지, 너!’
거울 속에 비친 낯선 모습을 노려봤다.
남편에게 무시당하는 공작 부인에게 괜히 감정이입 했더니 아침에 먹은 게 얹혀서 그대로 게워 내야 했다.
“엘프윈, 너도 참 딱하다.”
거울 속에 비친 비쩍 마른 여자에게 말했다.
여름의 태양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새하얀 살결과 대비되며 머리카락은 더욱 붉게, 살결은 더욱 하얗게 강조됐다.
진한 눈매 안에 싱그러운 녹음을 닮은 눈동자가 영롱했는데, 붉은 머리카락과 녹안은 서로 보색을 이루어 선명한 조화를 만들었다.
크지 않은 이목구비가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얼굴은 강한 인상을 풍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녹색 눈동자가 만드는 두드러진 색의 대비가 보는 눈에 따라서 고집스러운 인상을 줬다.
“그러니까 우리 잘해 보자, 엘프윈 윌트슨.”
다른 사람에게 쉽게 감정이입해서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은 되도록 지양하고 싶었지만, 엘프윈만은 제외였다.
왜냐하면 그녀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앞으로 더욱더 진득하고 치열하게 엘프윈의 감정에 이입할 작정이었다.
* * *
이 몸으로 아직 바깥출입은 힘들어 보였다.
3층 침실에서 1층 식당에 다녀오는 데도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일단은 실내를 걷는 것부터 하자.’
내게 남은 시간은 단 5개월.
이 금쪽같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테다.
천천히, 차근차근, 식사량도 늘리고 운동량도 늘려서 마침내는… 건강해질 테다.
그리고 살아남고 말 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지금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가져온 거야? 이걸 신으라고?”
하지만 나의 파이팅은 금세 파시식 사그라들었다.
케이트와 주디가 들고 온 옷과 신발 때문이었다.
통이 좁은 코르셋과 드레스, 게다가 1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하이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보세요, 저 임산부라고요.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하녀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죄인은 바로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엘프윈이라는 것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더 통이 넓은 옷과 굽이 낮은 신발로 준비해 줘.”
“네?”
케이트와 주디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러면 그렇지.
얘네들은 내가 무슨 소리만 했다 하면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런 건… 없는데요, 마님. 마님께선 취향이 워낙 확고하셔서요. 무조건 상체가 꽉 끼는 드레스와 굽이 높은 신발만 주문하셨어요.”
물론 기억 못 하시겠지만요, 개미 똥만 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케이트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감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 취향 이제는 좀 바꿔야겠어. 알다시피 나 임산부잖니. 이제 점점 배도 더 부를 텐데.”
“맞아요, 그렇죠.”
케이트와 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적극 동의한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
“새 옷과 신발이 필요해. 좀 더 편한 것들로 말이야. 의상실에 연락해서 내일 들르라고 해 줘.”
“마님, 그런데 돈은요?”
“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공작 부인인데, 옷과 신발 사는 데 돈 걱정을 왜 해?
“남은 내탕금이 없어서요.”
“지난달에 이번 달 내탕금까지 가불해서 쓰는 바람에 이번 달에는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요.”
“뭐어?”
아이고… 골이야.
머리 한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내려앉았다.
주먹을 쥐고 불툭 튀어나온 뼈마디로 머리를 꾹꾹 눌러 압박하면서 입을 열었다.
“가불까지 한 내탕금을 엘프윈은, 아니 나는 어디에 썼니?”
“그… 황도에 가실 준비를 하시면서 옷이랑 신발을 사셨어요.”
주디는 방금 가져온 드레스와 하이힐을 힐끗 살피며 말했다.
어깨를 바짝 좁히며 우물쭈물 대답하는 하녀가 안쓰러웠다.
“주디, 네 잘못이 아닌데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말할 필요 없어. 이게 다, 그 철없는 엘프윈 잘못이라는 거 알아.”
나는 나와 엘프윈을 분리하고, 그녀의 잘못이라는 점을 콕 짚었다.
하아, 한숨이 끊임없어 흘러나왔다.
“자아,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 새 옷과 신발을 사려면 돈이 필요해. 하지만 내 수중에는 돈이 없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달에 산 옷과 신발을 다시 팔아 버려야 하나?”
꽤 진지한 표정으로 케이트와 주디를 향해 물었다.
그녀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 필요했다.
엘프윈은 하녀들의 생각을 물었던 적이 없었던 걸까?
내 진지한 질문에 하녀들은 한동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자, 내가 물었으니 이젠 너희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야.”
내가 생긋 웃으며 하녀들에게 대답을 독촉했다.
마침내 우줄쭈물거리던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귀족 부인들께서 옷을 되파시는 건 자선 모금 바자회 행사를 제외하고는 잘 없는 일이에요. 돈이 필요해서 쓰던 물건을 판다고 하면 공작 부인의 위신에 흠집이 생길 것 같아요.”
“흐음… 그건 확실히 그렇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제 살 깎아 먹는 행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번 달에도 가불을 받으시는 게 어떠실지요?”
“…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