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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142)

2화

일단 공작성의 주치의, 매튜 루이스를 믿어 보기로 했다.

사실 그는 내가 가진 유일한 패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마님께서 하실 일은 단 두 가지입니다. 매일 잘 드시고, 좋은 생각만 하시는 겁니다.”

은발의 의원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매튜는 원작 소설 속 비중 있는 조연답게 꽤 훈훈한 외모를 장착하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아름다운 존재에 한없이 약해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걱정 말라며 청회색의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자 나는 아늑한 위안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의 현실에서 내가 직접 만난 사람들 중에 이토록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는 없었으니까.

일단 이곳은 소설 속 세계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급 인물들까지 기본적으로 훌륭한 외모를 부여받는 것 같았다.

역할이 아주 미미한 공작 부인의 얼굴 역시 너무 고와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넋 놓고 들여다봤을 정도였다.

‘아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정신 차리자, 나야!’

헤… 입을 벌린 채 매튜의 미소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으려던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매튜만 믿고 맡기기에는… 부족해.’

5개월 뒤 본인의 생사를 가를 출산에 대한 대비를 타인에게만 맡기는 것은 역시 부족했다.

이것은 ‘오늘 점심으로 뭐 먹을까?’, ‘이번 주말에 어디 갈래?’ 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좀 더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내 직감을 믿고,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다.

매튜는 유능한 패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맞아. 나 윌트슨 공작 부인이야!’

부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윌트슨 말이다.

내 남편 제크론 윌트슨은 원래 윌트슨 백작가의 막내였다.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그런데 그의 운이 전쟁의 시기를 맞아 갑자기 확 용솟음쳤다.

그는 열여덟 살 성인이 되자마자 전쟁에 참전했고, 5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워낙에 검술과 승마를 비롯한 신체 능력이 월등했고, 동료 병사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뛰어났다.

제크론은 지지부진 이어지던 전쟁을 마침내 대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으로 거론되었다.

원래는 왕국에 불과했던 쉐리던이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웃 나라들을 점령했고, 그 결과 쉐리던 제국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공로를 인정받은 제크론은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뎀프샤 지역과 함께 공작 위를 하사받았다.

뎀프샤의 공작 위는 많은 귀족들이 눈독 들이던 자리였다.

이 지역은 다른 영지에 비해 크기도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한 면에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 교역이 용이했고, 한쪽에는 울창한 삼림이, 또 다른 한쪽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 중 하나였다.

물론 전쟁 영웅이기는 했지만, 아직 스물셋의 젊은 청년에게 내려진 파격적인 대우에 제국의 이목이 집중됐다.

전쟁에서 보여 준 뛰어난 신체 능력과 우수한 두뇌, 그리고 눈부신 카리스마 덕분에 제크론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원작 소설 속의 내용을 곰곰이 떠올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공작 부인이니 제크론의 막대한 부와 권력의 혜택을 함께 누릴 권리가 있고 말이지!’

희망이 보였다.

두 눈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내 목숨을 지키는 데 윌트슨 공작가의 부와 권력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미소는 지우지 않으면서도 다소 굳은 표정으로 은발의 주치의를 보며 말했다.

“매튜가 제국 내에서 훌륭한 의원으로 손꼽히는 건 알아요.”

“과찬이십니다, 마님.”

“하지만 난 다양한 전문가들의 소견을 들어 보고 싶어요. 내가 만나 볼 수 있는 유능한 의원들과 약제사들, 혹은 민간치료사들의 명단을 만들어 줄래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님.”

그의 입가에 위로의 미소 대신 다소 긴장한 듯한 사무적인 미소가 걸렸다.

‘이런 미소도 보기 좋군.’

후훗,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   *   *

케이트와 주디는 공작 부인의 전속 하녀이다.

하루 종일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절대 만족을 모르는 여자였다.

물론 많은 귀족 부인들이 그랬지만, 윌트슨 공작 부인은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했다.

맑은 날은 덥고 건조해서 짜증 냈고, 비 오는 날은 습하고 끈적여서 화를 냈고, 구름 낀 날은 우중충하다며 꿱 소리를 질러 댔다.

어느 파티에 초대되는 것은 귀찮아서 히스테리를 부렸고, 또 어느 파티에 초대되지 않는 것은 분해서 히스테리를 부렸다.

어쩌라는 것인지 원….

하지만 오늘의 공작 부인은 좀 달랐다.

며칠 동안 앓다가 어제부터 정신을 차리신 공작 부인의 행동은 매우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내 이름이 뭐니? 말해 줄래?”

아침 일찍 세숫물과 식사를 들고 공작 부인의 침실을 찾은 케이트와 주디에게 공작 부인이 물었다.

뭐 이런 질문이 다 있지?

워낙 생뚱맞은 질문에 그녀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며칠 만에 깨어나신 후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제 이름조차 기억 못 하실 줄이야.

“엘프윈이십니다, 마님.”

까만 머리에 작은 키,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케이트가 대답했다.

아무리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라도 감히 마님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이 매우 어색하고 민망했다.

무례한 것 같아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궜다.

“아… 엘프윈. 예쁜 이름이구나. 그럼 엘프윈 윌트슨이겠네.”

제 이름을 따라 말하는 공작 부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럼 윌트슨 이전에는? 뭐였지?”

“네?”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는 하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내 성 말이야. 윌트슨 이전의 성. 내 친정.”

“아, 하이그린이셨습니다.”

이번엔 갈색 머리에 키가 좀 더 크고 마른 주디가 대답했다.

“엘프윈 하이그린이었구나. 윌트슨보다 하이그린이 더 어울리네.”

해사하게 웃는 낯으로 제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이 참으로 기묘했다.

하녀들은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는 불순을 저지를 것 같아 얼른 손을 바삐 움직여 제 할 일을 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공작 부인이 또 다른 이상한 질문을 한 까닭이었다.

“식사는 이게 다니?”

“네?”

역시 이번에도 질문의 의도를 파악 못 했다.

하녀들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굳은 채 서 있었다.

엘프윈은 소고기야채 수프가 담긴 작은 접시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이것만 먹으라고?”

“원래 항상 그 정도만 드셨는데….”

“더 가져올까요?”

“항상 이 정도만 먹었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랐던 거구나, 나….”

하녀들의 대답에 엘프윈은 제 가느다란 손목을 쓸어내리며 안쓰럽게 말했다.

제 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제삼자의 이야기처럼 하는 모습이 역시 기이했다.

“아니야. 그냥 기다리고 있기엔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말이야. 식당이 어디지? 안내해.”

“식당에 가서 드시게요?”

하녀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응. 어서.”

엘프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하녀들을 재촉했다.

“윽!”

“마님! 괜찮으세요?”

그런데 빈혈 때문인지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녀들이 재빨리 공작 부인의 두 팔을 잡고 부축했다.

“좀 어지럽지만 괜찮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니까 이렇게 빈혈이 일지. 으이구… 자, 빨리 가자. 밥 좀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그런데 이렇게 입고 가시게요?”

“이렇게? 이게 뭐 어때서?”

엘프윈은 거울에 비친 제 옷을 확인했다.

원피스형 잠옷에 실내용 가운을 입은 상태였다.

임신 5개월치고는 배가 많이 나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풍덩한 잠옷 덕에 배는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갈아입으시는 게….”

“뭐 어때? 내 집인데.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옷 갈아입을 힘도 없어서 그래.”

잠옷 차림으로 침실 밖을 나서는 경우가 절대 없던 공작 부인이었는데, 식사는 늘 새 모이만큼만 먹던 공작 부인이었는데….

케이트와 주디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멀뚱히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섰다.

며칠 앓았다가 다시 깨어났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리는 없다.

하지만 눈앞의 공작 부인은 완전 딴사람 같았다.

기억을 잃으면 사람의 성격도 달라지는 걸까?

하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엘프윈을 부축하며 식당으로 안내했다.

*   *   *

식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먼저 식사 중이던 제크론의 미간이 좁아지며 진한 주름이 생겼다.

“좋은 아침이에요, 여보.”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지?”

“식당에 뭐 하러 왔겠어요? 밥 먹으러 왔죠.”

“당신이? 밥을? 여기서?”

제크론의 잘생긴 얼굴이 구겨졌다.

내 등장에 식당 하녀들의 손도 바빠졌다.

원래의 엘프윈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 식사는 주로 침실에서 먹었다고 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도 없는 공작 부인이 식당에 내려왔으니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나를 위한 식사는 제크론의 맞은편에 신속하게 준비됐다.

맞은편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이라 둘 사이의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다.

“자리는 마음에 드네.”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제크론을 애써 못 본 척 무시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장난하나?’

하지만 내 앞에 세팅된 음식들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침실에 가져왔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언뜻 보기에도 제크론 앞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말이다.

내 언짢은 표정을 읽었는지 케이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님, 뭐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응. 나도 공작 전하께서 드시는 음식과 같은 걸로 준비해 줘. 배고프다고 했잖아.”

아쉬운 대로 앞에 놓인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다시 식당 안 하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음! 맛있어!’

앞에 놓인 소고기야채 수프의 양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맛은 만족스러웠다.

접시와 입을 오가는 손이 모터가 달린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제크론은 수프를 퍼먹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시선이 매우 따가웠다.

호의적이지 않은 남편의 시선 따위 계속 무시하고 수프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더 이상 떠먹을 수프가 없었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라는 것은 ‘요구해야 할 것들’을 의미했다.

한꺼번에는 말고, 하루에 하나씩, 차근차근 요구할 생각이었다.

용기를 끌어 모았다.

마침내 용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나는 벌떡 일어섰다.

드르륵,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순간 식당 하녀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헉, 뭘 하시려고!’

하녀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질렸다.

천천히 제크론에게 다가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사뿐 앉았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꼭 뭐 씹은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내 식사는 이 자리에 준비해 줘. 공작께서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눈치라서.”

제크론을 향해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였다.

놀리듯이.

그의 비뚤어진 입이 서서히 열렸다.

“당신…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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