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42)

1화

교통사고였다.

콰아앙!

끔찍한 소리만큼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통은 금세 멎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눈꺼풀을 들 힘마저 사라지자,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눈이 떠졌다.

어?

나 산 거야?

‘그런데… 여긴 어디지?’

껌뻑껌뻑.

눈꺼풀을 몇 번 닫았다 열자 뿌옇던 시야가 밝아졌다.

본 적 없는 벽과 가구들, 그리고 익숙지 않은 냄새까지.

분명 낯선 곳이었다.

“마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목소리가 나는 쪽을 봤다.

짧은 은발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처음엔 은발이라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마님?”

‘이 사람은 왜 자꾸 나를 마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마님이라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너는 가서 공작님께 알려라. 마님께서 방금 막 깨어나셨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은발 남자가 뒤에 섰던 누군가에게 명령하자, 젊은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어디….”

헉, 여긴 어디냐고 물으려 했는데, 입 밖으로 튕겨져 나온 목소리는 내가 알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기는 뎀프샤의 윌트슨 공작성입니다, 마님. 황도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이 오르시더니 지난 사흘 내내 고열로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뎀프샤의 윌트슨 공작성?”

“기억이 안 나십니까?”

은발의 의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이상한 이름이었지만, 왠지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였다.

순간 어떤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온몸에 오싹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무시무시한 긴장감 때문에 내 어깨는 절로 바짝 움츠러들었다.

용기를 내어 은발의 남자에게 물었다.

“…이 공작성의 주인은 누구죠?”

“공작성의 주인? 나를 말하는 건가?”

벌컥 열린 문 사이로 흑발의 남자가 들어섰다.

떡 벌어진 어깨에 근육질 몸매가 인상적인 장신의 남자였다.

“제크론 윌트슨.”

허흡, 그의 이름을 들은 나는 들이마셨던 숨을 다시 뱉어 낼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잔뜩 긴장한 탓이었다.

‘제크론 윌트슨 공작!’

다시 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읊조렸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내가 죽기 전에 읽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쉐리던의 기도하는 밤>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당신 남편이지.”

남편?

그럼 내가 그의 아내라고?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집요한 그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마님! 왜 그러십니까? 호흡이 힘드십니까? 숨을 내쉬십시오! 자, 저를 따라 하십시오, 마님. 흐읍… 하아, 흐읍… 하아.”

너무 놀라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내게 의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의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아직 상태가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로군.”

“네, 공작님. 열이 내리고 의식이 돌아오셨지만,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고열로 인한 뇌손상, 뭐 그런?”

제크론이 가늘어진 눈매로 내 얼굴을 훑으며 의원에게 물었다.

‘뭐어? 뇌손상? 미쳤냐는 말이잖아? 아우씨.’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가 울컥 올라왔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미쳤다니?

그를 힘껏 째려봤다.

내 시선에 그의 얼굴 근육이 움찔 떨렸다.

“완전히 어떻게 된 건 아닌 것 같군. 뇌손상이냐는 말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워낙 오랫동안 의식을 잃으셨던 터라 기억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검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제크론은 몸을 휙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남편이란 자는 부인인 내게 인사 한마디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꽤나 무심하고 매정한 퇴장이었다.

공작이 사라지자 의원은 약을 챙겨 오겠다며, 하녀는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방에서 나갔다.

나만 남았다.

조용해진 방 안에 타닥타닥, 벽난로 장작 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멀뚱멀뚱.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자세 그대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문양의 벽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럴 리 없어!’

두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눈앞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다시!’

또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역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번엔 한쪽 볼을 꼬집어 봤다.

“아야!”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화려한 문양의 벽지도, 커다란 침대도,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도 그대로였다.

“이, 이게 대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흐읍, 하아… 흐읍, 하아….

다시 심호흡을 했다.

침대에서 일어선 나는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푹신한 카펫의 감촉이 그대로 발바닥에 느껴졌다.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내 다리가 맞았고, 내가 걷는 게 맞았다.

거울 앞에 섰다.

아름다운 여인이 비쳤다.

하얀 피부 위에 곱게 자리한 이목구비가 빼어났다.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빛났다.

‘꿈인가? 죽기 전 마지막에 읽은 소설 속 이야기를 꿈으로 꾸고 있는 거야?’

그래, 꿈인가 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여인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 꿈속에서 나는 남자 주인공의 아내인가 보군.’

윌트슨 공작 부인은 엑스트라급의 조연이었다.

하필이면 왜 엑스트라지?

기왕 꾸는 꿈, 여자 주인공이면 좀 좋아?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입술을 삐죽였다.

원작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책 <쉐리던의 기도하는 밤>을 비교적 최근에 읽었고, 매우 몰입해서 읽었지만 남주 아내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소설 초반 한 장 내지 두 장 정도의 분량에서 잠시 나왔다가 사라진 역할이었으니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정정한다.

기억할 사항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소설에서는 그녀의 이름조차 서술되지 않았다.

매번 ‘공작 부인’, ‘마님’, ‘당신’ 정도로만 서술됐을 뿐이었다.

귀족 영애였던 그녀는 제크론과 정략혼으로 맺어졌다.

그녀는 워낙에 체력이 약해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고, 예민한 성격 탓에 신경쇠약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아이를 출산하다가 절명하게 된다.

아내 사망 이후, 제크론은 재혼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여자 주인공, 베로니카를 다시 만나 사랑을 싹틔운다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었다.

소설 초반 극소 분량에 출현하는 공작 부인이 하는 역할은 두 가지 정도였다.

첫째, 제크론의 여성에 대한 무심하고 냉정한 성정을 보여 주는 것.

둘째, 그가 베로니카를 만나기 전까지 무미건조한 흑백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의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역할이 공작 부인이었다.

당연히 제크론과 그의 아내가 함께한 결혼 생활에 ‘사랑’이나 ‘애틋함’ 따위는 없었다.

‘꿈을 꿔도 하필 남편한테 사랑도 못 받고,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죽는 역할이라니, 쳇.’

인생도, 꿈도 참으로 박복하구나.

하아, 짙은 한숨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아니지. 꿈인데 뭔 걱정이야? 깨면 그만인 것을.’

속으로 웃으며 다시 침대에 곱게 누웠다.

잠들었다가 다시 깨면 그땐 꿈도 같이 깨겠지.

‘꿈에서 깨면… 그땐 진짜 죽는 건가?’

살포시 눈꺼풀을 내렸다.

눈앞에 깜깜한 어둠이 들어찼다.

*   *   *

‘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다시 잠에서 깼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아까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잠에서는 깼는데, 꿈에서는 깨지 않았어. 이게 뭔….”

“꿈이라니요, 마님? 여긴 윌트슨 공작성이지 꿈이 아닙니다.”

은발의 의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봤다.

“오래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셔서 아직 현실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은데….”

의원이 뭐라고, 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꿈이 이리도 길고, 디테일 할까?

다시 자야 했다.

그땐 깨겠지.

‘과연 그럴까?’

에라, 모르겠다.

재빨리 드러누워 눈을 딱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절망했다.

화려한 벽지와 벽난로, 그리고 은발의 의원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깨지 않는 꿈이야… 그렇다는 건… 현실이라는 건데….’

새로운 현실은 곧 새로운 인생.

에이, 설마…?

어, 어쩌면!

‘다시 산 거야! 두 번째 인생을 얻은 거야!’

비록 소설 속 세계일지라도, 이곳에도 수많은 인생들이 존재하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 간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된 거야! 새로운 인생이 생긴 거야!’

순간 기쁨의 물결이 내 안에서 넘쳐흘렀다.

하긴,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심부름 가다가 차에 치여 죽는 인생은 너무하잖아!

그래서 신께서 내게 다시 기회를 주신 거야!

당장이라도 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신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은발의 의원이 내가 현재 임신 5개월 차라고 설명해 줬기 때문이었다.

뭐라고요?

‘이 캐릭터는 분명 출산하다가 죽는데?’

이제 막 새롭게 얻은 인생인데… 그런데 5개월 후에 죽는다고?

겨우 5개월짜리 인생이라고?

아… 씨.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물론 침실이었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건 하늘이 아니라 화려한 벽지의 천장이었지만 말이다.

‘감사하다는 말, 취소입니다! 헹!’

혼자 세상 활짝 웃었다가, 다시 혼자 세상 시무룩해진 내 모습이 걱정스러웠을까.

주치의의 얼굴이 내 시야 앞으로 훅 들어왔다.

“저기, 마님? 괜찮으십니까?”

명료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 이성을 현실 세계로 끌어냈다.

‘그래, 일단 정신을 차리고… 그리고 사태를 파악해야지.’

나는 은발의 의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흠, 역시 기억에 좀 문제가 있군요, 마님. 제 이름은 매튜 루이스입니다.”

“매튜, 내가 이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요?”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이 남자를 기억했다.

그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돕는 조연으로 의술이 꽤 뛰어났다.

“작년 제국 내 통계에 의하면, 태아가 유산이나 사산되지 않고 살아남는 경우는 대략 70퍼센트입니다. 그리고 출산의 과정에서 산모가 생존할 확률은 대략 80퍼센트 정도이고요.”

“…….”

“그러니까 마님과 아이, 둘 다 무사할 확률은 대략 56퍼센트 정도 된다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매튜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원작의 흐름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이 아이는 70이라는 숫자에 들어서 살아남았고, 나는 80이라는 숫자에 들지 못해서 죽게 되는 거구나.’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손이 잘게 떨렸다.

매튜가 내 얼굴에서 두려움을 읽었나 보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마님.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나 살고 싶어요. 살려 주세요. 제발….”

매튜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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