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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54)화 (154/156)

153화. 게임의 끝(5)

“아무튼 아직 결혼도 안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당신이 지금 내 걱정을 다 만들었잖아! 목 끝까지 그 말이 나왔지만 나는 억지로 집어삼켰다. 에르셈프와 애를 낳는다면 그렇고 그런 짓을 해야 하잖아. 그런 게 말이 돼……? 그리고 난 아직 열여섯 살인데 이 나이로 애를 낳을 수가 있어……?

“넌 곧 있으면 열일곱일 거고. 일 년 정도 신혼 즐기다가 애 낳으면 열여덟이겠네. 나이도 아주 좋아.”

“그만! 그만!”

내가 귀를 막으며 그에게 소리쳤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대체 저 정령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르셈프는 나에게 결혼하자는 말밖에 안 했는데 지금 엄청나게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고!

“큭큭……. 넌 참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야.”

“장난치지 마요. 완전 소름 돋으니까.”

“알겠어. 뭐, 그 전에 에르셈프가 무사히 돌아와야 하는 일이지만. 안 그래?”

“그건 그렇죠…….”

샐라임은 나를 가지고 놀기라도 하는 듯 내 기분을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요동치게 만들었다. 만약에 그가 혼수상태로 돌아온다거나,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그와 결혼할 수 있을까?

“이리 와. 밥이나 먹자.”

샐라임은 내 상상을 깨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현실에 집중해서 살다 보면 이 기간도 언젠가 끝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옮겼다. 에르셈프를 걱정해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에르셈프도 내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리피아를 불러와 줘, 루나.”

“네.”

그래. 괜찮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야 좋은 미래가 펼쳐질 테니까.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모두 다 잘 풀릴 것이라는 생각만 하는 거라고.

“에리피아. 어서 일어나. 언니랑 같이 밥 먹을까?”

“싫어……. 입맛 없어.”

“에리피아. 어제도 밥을 안 먹었잖아. 이렇게 안 먹다가는 몸이 약해질 거야. 그러면 언니가 얼마나 슬프겠어.”

“내가 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냥 나도 오빠처럼 죽을래. 그래도 아무 상관 없잖아.”

“에리피아……. 에리피아가 죽으면 오빠는 괜찮을까? 하늘에서 너무 슬퍼할 거야. 나에게 에리피아를 맡기고 간다고 했는데 나도 마음이 너무 아플 거고. 한 번만 우리 힘내서 살아 보는 건 어떨까?”

“…….”

“부탁이야. 에리피아. 에리피아가 열심히 살면 잰퓨어도 언젠가 에리피아를 보러 꿈에 나타나 줄 거야. 응? 그리고 힘을 내서 엄마 아빠도 찾으러 가자.”

다행히도 에리피아는 고집이 센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내 말을 잘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내가 에리피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라는 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에리피아를 힘을 내서 일으키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알겠어…….”

침대에서 웅크려 자고 있던 에리피아를 이끌며 나는 에르셈프에 관한 이상한 생각들을 지웠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잘 해결될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 * *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마음을 다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실에서 보낸 키가 작은 중년의 남자는 다시 한번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어째서 이런 밤에 찾아오신 거죠……?”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지금은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게다가 오간 지 며칠 안 되었는데, 또 찾아왔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에르셈프 왕자님께 큰 문제가 생기셨습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큰 문제가 생겼다니. 아니, 큰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저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큰 문제이길래!

“무, 무슨 일이죠?”

내가 그를 집 안으로 들이기도 전에 문 앞에 서서 바로 물었다. 그 또한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그 자리에 서서 즉각적으로 입을 열었다.

“에르셈프 왕자님께서 칼에 베인 상처로 인해 감염이 되셨습니다. 가벼운 상처라고 생각해서 에르셈프 왕자님도 별다른 보고를 안 하신 듯한데, 그 상처가 크게 악화되어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십니다.”

“어, 어떤데요?”

그러자 그는 말하기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대답했다.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십니다. 열은 38도를 훌쩍 넘긴 채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요. 지금 상황으로서는 아마…….”

“아마……?”

“며칠을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무슨 감염이 된 건지 약도 전혀 듣질 않고요. 의사와 힐러 모두를 불러 봤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다고 하더군요.”

“며,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니!”

내가 한 손으로 입을 감싸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예상했던 안 좋은 일이 이렇게 바로 벌어져 버린다고? 의사와 힐러도 아무런 방법도 쓰지 못한다면 가망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닌가!

“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저희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제국의 명의를 불러오려는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공간이 전쟁터인지라 쉽사리 오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제국 측에서도 자칫해서 명의를 잃었다가는 막심한 손해를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오, 이런…….”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죽어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죽기 직전에 나는 에르셈프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마지막이라도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니, 이게 마지막일 리가 없는데. 이렇게 끝낼 순 없는데! 내가 드디어 시스템을 끝내고 나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제야 좀 행복해 보겠다는데 하늘은 이것마저 들어주지 않는다고?

“일단 저도 일이 바빠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 에르셈프 왕자님께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루이아나 님께 보고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요. 정말로 에르셈프 왕자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명을 거부하고 제 소신으로 말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만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는 바쁜 일이라도 있다는 듯 옷깃을 여민 채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루나!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샐라임이 다가와 나에게 묻자 내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에르셈프가, 에르셈프가 죽기 직전이래요…….”

“뭐?!”

“어떡하죠? 저 어떡하죠……? 샐라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다음 일에 대한 방안을 찾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맞는 것일까. 에르셈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마지막이라도 그를 보기 위해 메리어트 섬을 찾아가는 게 맞을까.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나를 보면 그는 기뻐할까? 아니면…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닐까?

수많은 물음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고, 나는 정리되지 않는 기분에 두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왜, 대체 무슨 일인데! 그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칼에 베인 상처로 인해서 감염이 되었다고 했어요. 의사도, 힐러도 다 왔지만 아무런 방법도 찾을 수 없다고 했고요.”

“젠장, 감염이라고? 왜 하필 감염인 거야.”

그는 욕을 내뱉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도 떨리는 입술로 애써 그에게 물었다.

“감염이 왜요……?”

“감염이 되면 거의 죽는 것이나 다름없어. 정말로 의사나 힐러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이미 몸속의 피를 타고 다 번졌을 텐데, 무슨 방법이 있겠어. 그건 온몸의 피 모두를 정화시킬 수 있는 대단한 명의가 와야만 가능할 거야.”

“감염이 그 정도라고요……?”

나는 수척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약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도 전생에 살 때 녹슨 가위를 쓰다가 파상풍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약을 먹고 바로 나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감염이 그렇게까지 아무도 못 고칠 정도로 대단한 병이란 말이야?

“그래. 유일하게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물론 감염으로 인한 부차적인 병들도 모두 포함되지만 말이야.”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상했다. 피를 콸콸 흘리고 있을 때도 포션 한 방으로 멎게 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왜 하필 감염만 고칠 수 없는 병일까?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치료 방법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아.”

그때 나는 입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역시나 이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전생에 살던 세계와 이 세계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전생엔 있었고 여기엔 없는 것…….

“설마 여기엔 항생제가 없어요?”

“항… 뭐?”

“항생제요.”

내가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하자 그는 그게 뭐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뭔데? 내가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단언데.”

“이럴 수가. 여기엔 항생제가 없단 말이야?”

전생에서는 내가 감기에 걸려도, 파상풍에 걸려도,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었다. 감염된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하나의 치료제, 항생제는 인류의 엄청난 발명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게 없다니, 그러면 대체 사람들은 다쳤을 때 무슨 약을 먹는단 말이야?

“이 나라의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을 때 무엇을 먹죠?”

“자가 복구 포션을 먹지.”

“그 약이 대체 어떤 시스템인데요?”

“사람의 대사 활동을 빠르게 해서 생명력을 치솟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 대체적으로 쉽게 감기에 나아. 심할 경우엔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감기에 걸려서 죽는다고요……?”

“그래. 심한 병에 걸리면 다 뒤지는 거야. 차라리 칼에 쑤셔져서 피를 흘린다거나 상처가 벌어진다면 그런 건 쉽게 치료할 수 있지. 힐러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병에 걸렸을 때는 좀 달라. 아마 의학계에서도 관련된 연구를 진행 중일 거야.”

“미친.”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왠지 에르셈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능할까?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만약에 그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실행해 보는 것이 맞았다.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그런데 감기는 왜?”

샐라임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에르셈프 이야기를 하다가 감기 이야기를 하냐는 것이다.

“…….”

“설마 네가 에르셈프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샐라임이 정곡을 찔렀다. 그의 말에는 날이 서 있는 듯 아주 뾰족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고치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의사와 힐러들도 못 고친 병을 네가 어떻게? 차라리 에르셈프가 죽기 전에 옆에 가서 그의 손이라도 붙잡으며 기도를 하라고.”

“기도라뇨. 그런 말도 안 되는 속 편한 소리가 어디에 있어요. 사람의 병은 기도한다고 낫지 않아요. 제가 그를 낫게 할 거예요.”

그러자 샐라임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물음표가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대체 무슨 수로?”

나는 그의 말에 무겁지만 최대한 가뿐한 말투로 대답했다.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시도해 보는 거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테니까.

“전생에 살던 세계에 갔다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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