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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53)화 (153/156)
  • 152화. 게임의 끝(4)

    그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거렸다. 에르셈프에게 나 같은 존재가 있어서 다행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그는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뒤를 돌아가 버렸다. 나는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르셈프를 떠올렸다.

    전쟁터에서 피를 묻힌 채 싸우고 있는 모습. 힘겹게 전쟁 식량을 먹고 있는 모습.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 봐. 왜 이래.”

    하루 종일 떠오르는 에르셈프 생각에 내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돼. 남자를 돌처럼 봤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에르셈프가 대체 뭐길래!

    “에르셈프……?”

    하긴, 에르셈프는 한 나라의 왕자님이자 초절정 미남이었다. 지나가던 누가 스치듯이 봐도 사랑에 빠질 법한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였단 말이다. 조각 같은 얼굴은 말하면 입이 아팠다. 몸매는 또 어떠한가. 다리는 허리가 예의상 존재한다는 듯 길고 잘빠졌으며 두툼한 가슴 근육까지 완벽했다. 저번에 한 번 안았다가 단단한 그의 가슴 근육을 느끼자 나도 모르게 야릇한 상상을 해 버리고 말았을 정도니까. 그리고 나에게 이마에 키스를 했을 때 느껴졌던 그의 부드러운 입술. 그렇다면 혀는 얼마나 부드러울까. 그와 만약에 혀를 섞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와, 진짜 미친 게 분명해. 그만해, 루나.”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야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내 머리를 팡팡 치기도 했다. 이게 사람이 옆에 없으니 온갖 상상을 펼치게 되는구나. 나도 목이 마르다 이건가?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에르셈프 뺨치게 훤칠한 샐라임이 집을 정리하던 도중 나를 바라봤다. 미친, 왜 이 세계에는 잘생긴 남자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샐라임에겐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하지만 눈이 정말 호강이잖아! 샐라임은 누구랑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정령은 복 받을 게 분명해…….

    “집 치우고 있었어요?”

    “응. 에리피아가 집을 자꾸 어지르네.”

    무슨 애라도 같이 키우는 것처럼 샐라임은 말했다. 나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그가 치우고 있던 책 더미를 같이 정리했다.

    “샐라임은 언제 결혼할 거예요?”

    “뭐?!”

    그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나에게 묻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왜 이렇게 발끈하지?

    “너… 너…….”

    “네? 왜요?”

    “완전 우리 아빠가 하는 말이랑 똑같아. 대체 나보고 언제쯤 결혼해서 애를 낳을 거냐고 수시로 물어본다니까?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그 말을 피하려고 온 것이나 다름이 없…….”

    “정말로 샐라임도 결혼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정령은 살면서 적어도 세 번의 결혼을 한다고. 그래야 어린 정령을 낳고 세계가 유지가 되지. 하급 정령이 생겨 줘야 정령술사들도 정령을 부릴 거 아니야.”

    “헉. 그러면 마음에 둔 정령은 있고요?”

    “몰라, 인마.”

    그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부끄러운 건가? 왠지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한가?

    “그러면 샐라임은 지금까지 결혼한 적 있어요?”

    “…….”

    “네?”

    내가 집요하게 묻자 그가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있…어.”

    “헉! 대박. 언제 결혼했는데요? 누구랑?”

    “자꾸만 이상한 거 물을래?!”

    그는 괜히 화를 내듯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궁금했다.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해 봐요. 왜 숨기는 거지?”

    “…….”

    “그럼 애도 있어요?”

    알고 보니 샐라임이 유부남이었다는 것은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정령이 살면서 최소 세 번의 결혼을 한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애가 있다는 것도 그에 버금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있다, 있어. 아주 꼴통 같은 녀석이지.”

    “!!”

    “지금 정령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툭하면 나한테 연락이 와. 애들을 패고 다닌다고. 그 녀석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픈 게 말이 아니야.”

    “와……. 샐라임 아저씨였네요.”

    “아저씨?!”

    그는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며 소리를 높였다. 결혼해서 애 있으면 아저씨 맞지, 뭐. 그러면 뭐 총각인가?

    “아저씨 맞잖아요.”

    “너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아저씨 본 적 있냐!!”

    “원래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아저씨 연예인들을 보면 중년의 미가 섹시하다고 하는데… 샐라임은 그쪽은 아닌 것 같고. 뭐, 말만 아저씨지 이십대 초반 같기는 해요.”

    “그렇지. 암암. 나는 아주 관리가 잘된 정령이라고. 뭐 정령은 늙지를 않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미남인 편이란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하긴 샐라임이 미남이긴 하죠. 저도 인간화한 모습을 보고 놀라긴 했으니까.”

    그러자 샐라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의외인 듯싶었다. 내가 그를 보고 잘생겼다고 하는 게 신기한 건가?

    “뭐, 그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 왔지만… 루나 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좋긴 하네.”

    “그렇죠? 제가 또 눈 하나는 높잖아요.”

    세이먼, 잰퓨어, 레크리드, 베탄 또한 엄청난 미남이었다. 뭐랄까, 게임에서 나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포스와 분위기를 보여 주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세이먼은 정말 귀공자 같았고, 잰퓨어는 자유로운 영혼 같았다. 레크리드는 진짜 귀여웠고, 베탄은… 섹시했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두고도 아무런 마음이 생기지 않은 게 바로 나란 말이다. 물론 에르셈프는 예외긴 하지만, 내가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는 얼빠였다면 이미 그들에게 뭔 짓이라도 하고 남았을 거다.

    “아무튼 결혼은 한 번 했어. 내가 수십 년 동안이나 짝사랑하던 여정령이었지.”

    “정령에도 성별이 있다는 건 신기하군요.”

    “그래. 그런데……. 아니다, 됐다.”

    “왜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그가 갑자기 말을 하려다 말자 내가 그를 잡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입술에 본드를 붙인 듯 딱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빨리 말해요. 궁금해 죽겠으니까.”

    그러자 샐라임은 입술을 삐죽이며 혼자 꿍얼거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혼했어.”

    “네?!”

    “이것 봐. 이런 반응일 줄 알아서 말을 안 한 거라고.”

    “왜, 왜, 왜 이혼을 했는데요?”

    샐라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한숨에는 세월의 한이 느껴지는 듯,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고통을 대변하는 듯 아주 무거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는 이혼당했지. 정령계에서는 이혼이 흔한 일이 아닌데, 내가 그걸 당하고 말았지 뭐야.”

    “왜 당했는데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

    그는 또다시 입을 꾹 다물며 내 옆에서 다른 자리로 피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샐라임 또한 아픔을 심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말해 줘요. 네?”

    우리 정도 사이면 말해 줄 수 있잖아. 한시도 빠짐없이 같이 생활하고, 정신을 공유했던 사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내가 너무 바깥으로 나돈대.”

    “네?!”

    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깔깔 터진 웃음은 그칠 새를 모르고 배를 잡고 웃었고, 샐라임은 그런 모습을 보며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워서라기보다는 장난식이 섞인 타박 같았다.

    “내가 자꾸만 자기를 챙기지 않고 바깥에 있는 내 소환사들이랑 노니까 불만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어떡해. 그때의 나는 싸우고 불태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단 말이야.”

    “하지만 몇십 년 동안이나 짝사랑했던 정령이었다면서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못 하겠어. 말도 잘 못 붙이겠다고. 맨날 말이나 더듬게 되고, 완전 모자라 보이잖아.”

    “풉!”

    나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샐라임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나는 최대한 웃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입술에선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났다.

    “자꾸 웃으면 죽어? 엉?!”

    “미안, 미안해요, 하하하…….”

    “그래. 내 친구들도 하나같이 다 웃고 자빠지더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줄 전혀 몰랐나 봐.”

    “그래도 귀여운데요? 좋아하는 사람, 아니 정령에게 말을 더듬는 샐라임이라니. 샐라임이 전투하는 모습을 그 정령이 한 번이라도 봤으면 완전 멋있다고 느꼈을 텐데.”

    “… 그 아이는 나를 따로 챙겨 본 적이 없어. 그냥… 걔도 혼기가 차서 결혼한 거일 뿐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응? 내가 너에게 더 당부하는 거잖아. 결혼은 장난이 아니라니까?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에르셈프 놈이 괜찮은 녀석인지 다시 한번 판단해 봐야겠어!”

    나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에르셈프를 다시 판단해 본다니, 그는 아주 정상적이기 짝이 없다. 나를 좋아할 때도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던 그인데, 내 앞에서 내숭을 부릴 리도 없고, 말을 더듬을 일도 없다.

    “에이. 에르셈프가 설마 그러겠어요.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 같은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정령 학교 다닐 때는 걔한테 얼마나 잘해 줬다고. 그런데 결혼하고 애를 낳고 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 내 아내가 되었다는 게 너무 묘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말을 더듬었던 거야!”

    “그래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앞에서 바싹 언 채 나에게 말을 더듬는 에르셈프의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와 결혼한다면 상상되는 모습은…….

    “너 이상한 상상 했지?”

    “아니요!”

    내가 급하게 대답하며 한사코 아니라고 하자 이번엔 오히려 그가 눈을 세모나게 뜨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응큼해졌어. 이 녀석.”

    “제가 뭘 했다고요!”

    “방금 완전 그 녀석과의 하룻밤을 상상하는 표정이었는데?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고.”

    “아, 아, 아니에요!!”

    내가 몸을 바르르 떨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니, 아무튼 아니다. 나는 에르셈프와 전혀 그런 이상한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뭐, 그게 당연한 거긴 하지. 너도 에르셈프와 하룻밤을 보내고 애를 낳고 그럴 거니까.”

    “제가 애를 낳는다고요……?”

    내가 갑자기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애를 낳는다니, 내가?

    “당연한 거 아니야? 사랑하면 낳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아, 애 낳기 싫어? 그러면 안 낳으면 되지.”

    “그치만…….”

    “잘 생각해 봐. 너는 왕실의 후손을 낳아야 할 수도 있다고.”

    “…….”

    나는 순식간에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 왕실의 후손? 말도 안 돼!! 누가 내 고개를 잡고 흔들기라도 하는 듯 내가 거세게 도리도리를 치자 샐라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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