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52)화 (152/156)
  • 151화. 게임의 끝(3)

    에르셈프의 입술이 내 이마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는 샐라임이 나왔다.

    “식사하러 들어오세요, 다들.”�

    “나는 이만 가 보지.”

    하지만 에르셈프는 이만 가 봐야겠다며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나는 떠나려는 그의 팔을 잡았다.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요. 그 정돈 괜찮잖아요, 네?”

    내 말에 에르셈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왕자님이 이런 곳에서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도 되는 걸까? 입맛에 맞지 않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에르셈프를 식탁에 앉혔고, 에리피아도 와서 마저 앉았다. 샐라임은 자기는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며 식탁에 앉지 않았다.

    “맛있군.”

    스튜 한 숟갈을 떠먹은 에르셈프가 말했다. 에리피아도 별말 없이 먹는 걸 보면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상황으로서는 맛을 느낄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배가 고팠던지라 빠르게 숟가락을 들었고, 스튜를 맛있게 흡입했다. 중간중간 에리피아의 표정을 확인하며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묵묵하게 밥을 먹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에르셈프는 빠르게 돌아가 보겠다는 말을 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냐는 말에 그는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괜히 그를 붙잡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같이 식사해서 좋았어, 루나.”

    하지만 그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식사 자리가 좋았다고 말해 주었고, 웃음까지 지어 주었다.

    “조심히 가요. 그리고 사람 붙여 주는 것 꼭 잊지 말고요.”

    집 앞까지 그를 배웅하며 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의 소식을 받지 못한다면 난 답답해서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알겠어. 편지도 꼬박꼬박할게.”

    그가 떠났고,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샐라임이 입을 열었다.

    “저놈이 뭐라디?”

    “저놈이라뇨. 전쟁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전쟁?”

    “네. 저희가 베라일 공국에 갔다 온 일이 파장을 불러일으킨 거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다만,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다니 마음이 이상하네요. 저 때문에 나라가 피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아니야. 너는 에르셈프와 비젠티아 왕실의 평생의 염원을 이루어 주었잖아.”

    “그건 맞죠…….”

    “에르셈프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마음이 많이 쓰이는 거야?”

    “네. 너무 걱정되고, 계속 그가 죽는 모습이 상상돼요.”

    대답을 하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 그 녀석을 좋아하는 거냐?”

    그때 샐라임이 비장의 한 수를 던졌다. 좋아하냐는 말을 할 줄이야. 내 눈은 동그랗게 뜨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건…….”

    “말해 봐. 완전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인데? 에르셈프가 자꾸 생각나고 그러지? 걱정되고 계속 보고 싶고?”

    “그건 맞아요. 자꾸만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럼 좋아하는 게 맞네.”

    “제가 에르셈프를 좋아하는 거라구요?”

    그가 내 마음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다른 남자 주인공들과는 달리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고, 또 그의 말을 곱씹기도 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하자고 했었어요.”

    “뭐?!”

    샐라임이 내 말에 펄쩍 뛰었다. 내가 에르셈프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직접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청혼을 했었어요. 베라일 공국에서 돌아오는 길에서요.”

    “그놈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나 정령계에서 계속 너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었구나!”

    “저를 계속 지켜봤어요?”

    “당연하지! 네가 혹여라도 다칠까 봐, 나를 언제쯤 부를까 계속해서 쳐다봤다고.”

    “고마워요, 샐라임.”

    그러자 샐라임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니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 그대로 됐네?! 그 녀석이 너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잖아!”

    “그렇죠. 그때는…….”

    “그때는 한사코 아니라고 말하더니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나?”

    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떠보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청혼이라, 나도 당시 에르셈프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거절의 표시를 보였었다. 하지만…….

    “일단 거절은 했어요. 저는 다른 남자 주인공들의 애뮬릿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뭔가 다른 남자들을 계속해서 만난다는 게 에르셈프에게 미안하기도 했고요.”

    “퀘스트의 일종이었는데 뭐 어때. 진심을 준 것도 아니고.”

    그는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말했다. 그리고 내 양어깨를 부여잡으며 다시 한번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무슨 대답을 할 건데? 결혼할 거야?”

    샐라임은 마치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친구를 쪼아 대는 절친처럼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에이, 결혼이라뇨. 저 아직 열여섯 살이에요.”

    “여기서는 열여섯이라도 결혼할 수 있는 나이야!”

    “그치만 에르셈프는 제 남자 친구이지도 않았고, 사귀기도 전에 결혼부터 하자는 거는 좀…….”

    “무슨 소리야 자꾸. 결혼 전에 사귀는 거는 네가 예전에 있던 세계의 관습이냐? 당연히 상대방이 좋으면 청혼부터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사귀고 말고가 어디에 있어.”

    샐라임은 내가 에르셈프와 결혼해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는 왠지 에르셈프와 결혼하면 샐라임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샐라임은 한 치의 아쉬움도 없어 보이는걸.

    “샐라임은 내가 에르셈프와 결혼해도 괜찮아요?”

    “응?”

    “…….”

    그러자 샐라임은 그제야 내 말의 진의를 이해한 듯 ‘아’ 소리를 냈다.

    “뭐,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산다고 하면 환영이지. 보아하니 에르셈프 놈도 옛날에 비해 훨씬 괜찮아진 것 같고.”

    “그래요?”

    “물론 나의 소중함을 상대적으로 잊을 것 같아서 아쉽긴 하지. 하지만 너도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좋은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 시작해야지. 망할 시스템 놈들도 없애 버렸고.”

    샐라임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샐라임을 부리는 상급 정령술사로 산다는 건 참 좋은 일이긴 했지만,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설레는 일이긴 했다.

    “그렇군요.”

    “그래. 하지만 너의 선택이니까 잘 생각해 보고.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할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붙어 있을 거고. 그러니까 내가 떠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 난 인간이 아니라 정령이라구. 죽을 일도 없어.”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샐라임은 나를 절대 떠나지 않는 존재라니, 아주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 같기도 했다.

    “항상 고마워요, 샐라임.”

    나는 그에게 매번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정령이라는 건 이런 존재인가. 나는 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도 내가 샐라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전혀 없는 듯했다.

    “나한텐 네 존재 자체가 도움이 돼.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나 맘껏 써.”

    샐라임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로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한시도 빠짐없이 붙어 있었던 사이여서 그랬던 것일까. 그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곤 했다.

    “그럼 이제 에리피아를 봐주러 가 볼까.”

    샐라임과 이야기를 오래 하며 에리피아를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무사히 잠재울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나와 샐라임은 거실로 돌아갔다.

    * * *

    거리 곳곳에는 베라일 공국이 라인하르트 왕국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에르셈프를 향한 나의 걱정은 태산처럼 늘어만 갔다.

    오늘은 에리피아가 좋아하는 닭고기 볶음을 하기 위해 장을 봐 온 뒤 부엌에 들어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집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세요?”

    바깥을 향해 소리치자 즉각적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왕실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한걸음에 문 앞으로 뛰어갔다. 분명 에르셈프가 보낸 자일 거다. 그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터. 역시 에르셈프는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끼익.

    내가 문을 열자 왕실에서 온 듯한 차림새를 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탓에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에르셈프, 아니, 3 왕자님의 소식인가요?”

    “그렇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그는 정중하게 물었고, 나는 어서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왕실에서 온 그는 내가 타 준 차를 홀짝 들이켰다. 빨갛게 언 손을 녹이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바깥의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왕실 군대가 딱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사기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요.”

    “그래서요……?”

    “그런데 에르셈프 왕자님이 능력을 발휘해 주셨습니다. 베라일 공국의 1차 도발에서 에르셈프 왕자님이 적군의 기사를 한 번에 처치해 버린 것이죠.”

    “하, 정말…….”

    나는 그의 말에 도저히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몸이 배배 꼬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지금은 휴식 기간을 가지며 부대를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에르셈프 왕자님은 아주 몸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고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전해 주는 말이 내 정신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원래의 나였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가 전쟁터에 나가서일까, 감정이 점점 과열된다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에르셈프 왕자님은 전혀 문제없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실 겁니다.”

    “네……. 그래서 다음번엔 또 언제쯤 방문하실 예정인가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아니다 보니 나는 에르셈프의 소식을 들고 오는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 애탄 나머지 나는 그렇게 물었다.

    “전달해 드릴 만한 소식이 있을 때 또 찾아오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왕실의 일로 바빠서 가 봐야겠군요.”

    그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며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해요.”

    그러자 그는 뒤를 돌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에르셈프 왕자님에게 루이아나 님 같은 분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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