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51)화 (151/156)
  • 150화. 게임의 끝(2)

    “너를 만나러 왔어. 루나.”

    에르셈프가 나를 향해 말했다. 못 본 사이 에르셈프는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를 만나러 왔다고요?”

    그러자 에르셈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 둘이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다가와서 내 팔을 잡고 끌었다. 나는 그의 이끌림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멈춘 뒤 나를 바라본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남자는…….”

    “?”

    “저 남자는 누구지?”

    아, 에르셈프는 샐라임을 향해 묻고 있었다. 하긴, 처음 보는 남자와 한집에서 어린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 이상할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정령이에요.”

    “정령이라고?”

    “네. 상급 정령이라서 인간화를 할 수 있거든요.”

    “아…….”

    그는 자신이 오해한 게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볼이 약간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오해했어요?”

    “너무 건장한 남자와 함께 있으니까……. 정령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듣고 보니 일반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네.”

    “조그만 여자 아이는 잰퓨어의 동생이에요. 잰퓨어를 대신해서 우리가 돌봐 주고 있어요.”

    “잰퓨어는 어디에 있지?”

    그의 물음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머뭇거리고 있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설마…….”

    “…맞아요. 그는 이제 세상에 없어요.”

    그러자 에르셈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충격적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잰퓨어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번은 말을 섞은 사이였다. 그러니 충격일만도 하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나.”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에리피아를 노리는 흑마법사를 만났고, 그들과 싸우다가 잰퓨어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죠.”

    “너는, 너는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은!”

    “저는 괜찮아요. 다친 곳도 긁힌 것 말고는 없고요.”

    “다행이야…….”

    에르셈프는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그는 내가 어딘가로 없어질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에르셈프는 어쩐 일이에요?”

    그게 가장 궁금했다. 에르셈프가 나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시스템이 파괴되어도 남자 주인공들이 나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야. 너를 만나러 왔어. 오늘이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마지막이라니, 이제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보는 건 없었으면 했는데…….

    “베라일 공국이 선전 포고를 날렸어. 메리어트 섬을 공격하겠다고 했지.”

    “설마 프로티칸 기사를 죽인 것으로 그런 건가요?”

    “그거랑 게릴리온을 훔쳐 간 것이 이유지. 그들은 우리가 게릴리온을 가져간 게 도둑질이라고 생각한 거니까.”

    “그건 원래부터 비젠티아 왕실의 것이었잖아요!”

    에르셈프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모두 예상한 일이었어. 몰래 남의 왕궁으로 침입해 보검을 가져간 것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러면 베라일 공국이 다른 나라의 유물들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폭로해요!”

    “안 그래도 그것을 이용해서 다른 나라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고자 할 생각이야. 베라일 공국을 외교적으로 따돌리는 거지.”

    “…그건 참 다행이군요. 하지만 전쟁이라니, 말도 안 돼…….”

    에르셈프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맑게 비치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전쟁의 최전방으로 나서게 될 거야.”

    “최전방이라뇨!”

    “다들 그걸 원해. 골칫덩이로 생각하는 나를 빨리 없애 버리고 싶은 건지,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에르셈프가 죽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 나라의 왕자라고 함은 뒤에서 전략을 짜고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최전방으로 나가서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거냐고.

    “어쩔 수 없어. 아버지의 명이니까.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마지막…….”

    “아니,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인사. 하지만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니까 걱정 같은 건 하지 마. 너를 두고 이 세상 먼저 뜰 계획은 추호도 없으니까.”

    에르셈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미소조차 근사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줄래? 루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이미 에르셈프를 너무나도 크게 생각하고 있었고, 에르셈프는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결혼하자고 했던 말들도 모두… 잊지 않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저도 도울래요.”

    내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의 게임 스토리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내가 의료 봉사를 자처해 그의 전쟁터를 따라갔었다. 비록 거기서 죽고 말았지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네가 전쟁터에 따라온다니.”

    “그게 왜 말이 안 돼요. 분명 그곳도 사람이 필요할 거잖아요. 다친 병사들도 있을 테고, 식량 공급도 해야 할 거고. 제게 일을 맡겨 주세요. 네?”

    하지만 에르셈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표정 또한 너무나도 완강해서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바로 수그러들었을 것 같았다.

    “절대 안 돼. 난 베라일 공국이 메리어트 섬을 친다고 했을 때 무슨 생각부터 들었는지 알아? 루나 네가 다칠 일은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어. 한 나라의 왕자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그 위험한 곳에 쫓아오겠다고? 그건 말도 안 돼.”

    나는 지지 않고 그에게 대꾸했다. 여기서 그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내 마음에 들어온 그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싫어요. 저도 갈 거예요. 어차피 왕궁에서는 봉사진들을 모집할 거죠? 저는 거기에 참가할 거예요. 그리고 에르셈프의 옆에 있을 거라고요.”

    “미쳤어? 그런 짓을 하겠다니, 너는 정말로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거야?”

    “왜 모르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고 섬 전체가 피로 물들 텐데. 저도 에르셈프를 따라가겠다는 말, 절대 쉽게 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 에르셈프는 내 말에 그렇게 토를 다는 편이 아니었다. 저번에 베라일 공국에 갔을 때도, 내가 하자고 하는 것에는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내 말을 들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내 제안을 거절한다니, 그는 정말로 내가 전쟁터에 따라가는 게 용납이 되지 않는 건가?

    “절대 안 돼. 너에게 괜히 말을 꺼낸 것 같군. 너는 여기서 정령과 함께 조심히 지내고 있어. 혹시나 전쟁이 크게 번질 경우엔 내가 먼저 찾아올 테니까, 꼼짝 말고 있고.”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에르셈프. 제가 여기에 산다는 건 어떻게 안 거죠?”

    내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서 그에게 물었다. 나도 오늘 처음 온 집이었다. 그것도 에리피아를 따라서.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기에 지낸다는 걸 바로 알고 찾아온 거지?

    “…….”

    에르셈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말해요. 어떻게 여기에 찾아온 건지!”

    내가 그를 압박하듯 소리를 약간 높여서 묻자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한 것 같았다.

    “…사람을 붙였어.”

    하지만 그는 이내 실토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하는 것이, 나에게 굉장히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붙였다고요? 저번에도 저에게 사람을 붙였었으면서, 또요?”

    “…네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했어. 너와 연락이 되지도 않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택한 방법이야. 미안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저를 믿고 기다려 줄 수도 있었잖아요. 저는 에르셈프가 한 말을 얼마나 여러 번 곱씹고 생각했는데, 에르셈프는 정작 사람이나 붙여 제 뒤를 캐도록 만들었군요.”

    “미안해. 이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

    내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그를 쳐다보자 그는 안절부절 몸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고 내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가, 다시 내리곤 했다.

    “그러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나는 눈을 매섭게 뜨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에르셈프는 왜 그런 표정을 짓냐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무슨 부탁인데?”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에르셈프가 내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참 귀여웠다.

    “전쟁터에 따라가게 해 줘요.”

    “그건 안 돼.”

    “왜요!”

    “절대 안 돼, 그거는.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그는 절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득이 전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단호한 말투와 표정에 내가 할 말을 잃자 그가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정말 무사히 돌아올게. 약속해. 그러니 제발 여기에 조심히만 있어 줘. 부탁이야. 응?”

    에르셈프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부탁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말투가 사람을 부리고 명령하는 식이라 이런 부탁을 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 내 부탁을 들어줘.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백만장자를 원하든, 세계 최고의 정령술사를 원하든, 모든 걸 하게 해 줄게. 그러니까…….”

    그는 내 뜻을 꺾는다는 게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정말 마지막 부탁이 하나 있어요. 에르셈프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붙여 줘요. 편지라도 좋아요. 무슨 상황으로 가고 있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상황을 알고 싶었다.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었다. 만약 그가 위급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달려갈 의향이 있었다.

    “응. 알겠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고마워, 루나.”

    에르셈프는 그렇게 대답하며 나에게 다가와 살며시 나를 안았다. 그러고는 내 이마에다가 입술을 맞췄다.

    “……!”

    “보고 싶을 거야, 루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