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게임의 끝(1)
까만 암흑 화면은 몇 분이나 지속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예전처럼 훈남 신이라도 나타날까 싶었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났을까. 나 혼자 이 세상에 남겨진 듯한 기분에 무서워졌을 때쯤이었다. 점점 세상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작은 빛이 번져 큰 빛으로 변하더니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세상이 아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안한 생각이 몰려왔다.
내 앞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샐라임도, 잰퓨어도 모두 사라져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모든 남자 주인공들도 나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잊는 건 레크리드만으로 족했다. 더 이상은 친구를 잃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루나? 루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내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새, 샐라임?”
“그래! 너 자꾸 어디에 정신을 파는 거야! 정말이지 무서워 죽겠다니까. 얘가 갑자기 미쳐 버렸나 싶었다고.”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나는 내 바로 앞에 있는 샐라임을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시스템이 모두 다 사라진 건지 확인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시스템이 파괴되었다면 그 어떤 상태창도, 알림창도 보여선 안 된다.
“상태창!”
“…….”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내 이름부터 시작해서 스킬까지 모조리 떠야 했을 상태창이 내가 아무리 불러도 묵묵부답인 것이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의 호감도 또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스템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샐라임! 드디어 없앴어요! 드디어 거지 같은 시스템을 파괴해 버렸다고요!”
“정말이야?!”
샐라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덥석 안았다.
“솔직히 나는 네가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를 100%까지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런데 이렇게 통쾌하게 시스템을 파괴해 버리다니! 넌 정말 대단해. 루나.”
샐라임은 아끼지 않고 칭찬을 퍼부어 주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에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샐라임. 모두 다 샐라임 덕분이에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샐라임의 힘 덕분이잖아요. 비록 잰퓨어는…….”
“쉿. 괜찮아. 나는 네가 필요로 할 때 나타나는 정령이잖아. 나를 부리는 건 모두 다 너의 능력이라고. 예전에 말한 것 기억 안 나? 거짓말 보태서 드래곤 급의 마나를 가진 애가 나타났다고. 너는 그만큼 대단했다는 거야. 알아들어?”
“…….”
샐라임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잰퓨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에리피아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그 어린애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잰퓨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 정말이지…….”
나는 또다시 새어 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지금이라도 잰퓨어가 웃으면서 ‘장난이야!’ 하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일단 에리피아를 찾으러 가자. 혹시라도 위험에 처할지 모르니까.”
“…알겠어요.”
“잰퓨어는 내가 들쳐 업을게.”
샐라임은 한 번에 잰퓨어를 들어 올려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나에게 어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나와 샐라임은 개구멍을 통해 숲으로 빠져나갔다. 개구멍의 크기가 작아 잰퓨어를 옮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샐라임은 수월하게 해냈다.
숲을 건너 아까 보았던 동굴을 향해 갔다.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소녀가 훌쩍대며 동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에리피아!”
“언니!”
에리피아는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어찌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오빠는요?! 오빠는 괜찮은 거예요?!”
그녀는 아직 샐라임 뒤에 업힌 잰퓨어를 보지 못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고개를 돌려 샐라임을 쳐다볼 뿐이었다.
“……?”
그리고 에리피아의 얼굴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곧이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 시작했다.
“오빠가… 왜 오빠가 저기에 있는 거예요……? 많이 다친 거예요……?”
“에리피아…….”
“언니, 언니가 말해 줘요. 오빠가 많이 다친 거예요? 정신까지 잃어버린 거예요? 왜 저렇게까지 축 늘어져 있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 오기 시작했다. 아니, 떨리다 못해 울부짖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오빠가 크게 다친 것일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때 샐라임이 입을 열었다. 샐라임은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피아. 네 오빠가 지금 많이 아파. 그래서 병원에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나 좀 도와줄래?”
“많이 아프다구요……?”
“응. 흑마법사와 싸우다가 많이 다쳤어.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지금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우리 어서 눈물을 닦고 마을로 가 볼까?”
그러자 에리피아가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소리쳤다.
“네! 어서 가요! 제발……. 어서 가요.”
“그래. 출발하자. 루나. 너도 어서 일어나.”
에리피아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의 등을 샐라임이 툭툭 두드렸다.
“네. 가요.”
그렇게 우리 넷은 마을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 * *
잰퓨어는 이미 목숨을 잃은 게 확실했지만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맞다고 느껴졌다. 장례를 치르는 것도 전부 병원에서 할 테고, 혹시 모르면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단호하게 말할 뿐이었다.
“이미 사망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에리피아는 기절할 것처럼 휘청댔고, 나는 가까스로 그녀를 잡아 내 품 안에 넣었다. 에리피아는 온갖 몸부림을 치며 나에게서 빠져나와 잰퓨어를 붙잡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에리피아가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의사들은 잰퓨어를 데려갔고, 나와 샐라임, 에리피아는 병원 내에 있는 의자에 앉아 허망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루나,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에리피아를 데려다주고, 에리피아가 진정할 때까지 옆에서 보살필 거예요.”
원래는 애뮬릿을 모두 얻고 시스템을 파괴하면 갈 곳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에리피아를 모른 척하는 것은 잰퓨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부모님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알겠어. 내가 옆에서 도와줄까?”
샐라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샐라임이 뭣 하러 고생을 해요. 괜찮아요.”
“하지만 옆에 사람이라도 한 명 더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
“…….”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에리피아도 한 명보다 두 명이 있는 게 더 나을 거야.”
“알겠어요.”
나는 계속해서 울고 있는 에리피아의 등을 감싸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를 잰퓨어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면 좀 나아질 거야.”
“싫어! 나는 오빠 옆에 계속 있을 거야! 어떻게 오빠를 버리고 갈 수 있어!”
그녀는 이성을 찾지 못하는 듯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병원 홀에는 그녀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너무 울다 못해 갈라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잰퓨어도 그걸 원할 거야. 네가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엉엉 우는 게 아닌, 집으로 가서 편하게 쉬는 걸 원할 거라고.”
“…….”
“잰퓨어는 그 무엇보다 너의 안전과 행복을 생각했어.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 잰퓨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을래?”
에리피아는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의 머리를 품에 꼬옥 안았다.
“알겠어요, 언니…….”
“착하다, 우리 에리피아.”
나는 병원의 접수처로 가 잰퓨어의 장례에 대한 절차를 맡긴 뒤 그들과 함께 에리피아의 집으로 향했다. 집은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았고, 밖에 나와 찬바람을 쐬니 어느 정도 머리가 걷히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여니 싸늘한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사람이 없는지 꽤 된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벽난로에 불을 붙였고, 공기가 훈훈해질 때까지 담요로 그녀를 감싸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충격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계속해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에리피아, 이리 와.”
그때 샐라임이 에리피아를 향해 말했다. 에리피아가 수척한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자 샐라임은 오히려 자신이 다가와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아, 그는 불의 정령이었지. 아마 저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금세 따뜻해질 거다. 그리고 정령의 힘인 건지, 그를 안고 있으면 이상하게 정신 또한 안정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에리피아도 그걸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제가 식사를 준비할게요. 샐라임은 에리피아를 보살펴 주고 있어요.”
“알겠어.”
나는 식사를 준비했고, 샐라임은 에리피아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자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비워져 있던 집은 먼지가 쌓여 있었고, 샐라임은 빠른 속도로 집을 청소했다.
에리피아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루나, 쓰레기를 버리고 올게.”
그리고 샐라임이 집 안에 가득했던 쓰레기들을 모아 밖으로 나갔다.
“알겠어요.”
나는 국자로 스튜를 휘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이어 샐라임이 쓰레기를 버리고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잘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하여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샐라임 혼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
그리고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소파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루나, 바로 앞에서 만났어.”
샐라임은 멋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소파에 에리피아와 샐라임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은…….
“에르셈프?”
그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샐라임을 알아보고 들어온 거지? 샐라임의 인간화된 모습은 본 적이 없을 텐데. 그리고 어떻게 여기에 에르셈프가 와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지?
“에르셈프? 갑자기 여기엔 어쩐 일로……?”
나는 의아한 눈동자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르셈프는 여느 때와 같이 고고한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에르셈프와 나,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