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마지막 남자(4)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는 잰퓨어를 뒤로한 채 나는 일어섰다. 샐라임은 여전히 흑마법사의 등을 걷어차고 있었다. 나는 파들거리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네까짓 게… 잰퓨어를… 죽여……?”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 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눈에 어른거렸다.
“죽어!!”
그리고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내 눈엔 흑마법사 외엔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터널이라도 들어온 듯 앞만 보였고, 자석이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몸이 그쪽을 향해 끌려갔다.
“루나!! 안돼!!”
그때 샐라임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흑마법사는 샐라임에게 얻어맞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의 손에는 아직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흑마법사는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고, 검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악!”
내 발 앞까지 다가온 광선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는 몸을 던지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우당탕!
흙바닥에 몸이 나뒹굴며 주변에 있는 화분들이 부서져 떨어졌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꽉 감은 눈을 떴다.
“이 미친 새끼가, 네 상대는 여기라고 했지?!”
샐라임은 다시 흑마법사에게 다가와 그를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어떻게 된 것인지 흑마법사는 샐라임을 향해 흑마법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에게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루나, 거기서 가만히 있어. 이놈의 마법구에 갇히기라도 하면 낭패라고!”
저놈은 꼭 내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사지를 자르든, 숨통을 끊어 놓든, 잰퓨어의 죽음을 그대로 복수하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샐라임은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왜… 나는 여기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거지? 언제까지고 샐라임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거야? 아무리 내가 정령술사라고 해서 정령을 소환한 것이라고 한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저들을 처치할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몰려오는 회의감과 자괴감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몇 안 되는 내 친구였던 잰퓨어를 죽인 파렴치한 놈이다. 저런 놈을 절대로 멀쩡한 상태로 살려서 보내 주고 싶진 않았다.
나는 다시금 무릎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분 파편들이 팔과 다리에 상처를 내 피가 흘렀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샐라임.”
나는 그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샐라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흑마법사를 쥐어패며 대답했다.
“왜?”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샐라임의 손아귀에 있는 흑마법사를 보았다.
“저놈은… 꼭 제가 처리하고 싶어요.”
“뭐?! 거의 다 끝난 참인데 왜! 네가 다가오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어!”
“아니요. 이번엔 샐라임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아요. 이건 제 목숨이 걸려 있으면서 동시에 제 친구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요.”
“야! 그러다가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이놈 실력은 보통 만만한 게 아니라고!”
샐라임이 나를 향해 소리쳤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죽어도 되니까. 제발 허락해 줘요.”
그러자 샐라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오!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알겠어. 네가 처리해. 대신 너 위험해 보이면 바로 내가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어?”
“알겠어요.”
“그럼 이놈 정신 못 차리게 한 방만 때릴게.”
그 말을 끝으로 샐라임은 주먹을 흑마법사의 배에 내리꽂았다.
“억!”
흑마법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잠시 공격 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네가 감히!”
퍽! 퍽! 퍽! 퍽!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갈겼다. 오른쪽 뺨, 왼쪽 뺨, 오른쪽 뺨, 왼쪽 뺨. 내 주먹이 그의 볼을 때릴 때마다 얼굴이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흑마법사의 코에선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입엔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이 거지 같은 지팡이부터 없애 버려야겠지?”
그러고는 그의 오른손에 잡힌 지팡이를 들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마음 같아선 두 동강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칼을 막을 정도의 단단한 지팡이가 그걸 허용할 것 같진 않았다.
지팡이는 저 멀리 떨어져 나갔고, 나는 흑마법사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아 눌렀다. 온몸에 힘을 실어 수직으로 힘을 쏟자 그가 사지에 몰린 듯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꺼…억…억…….”
지금으로선 힘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목을 조르던 손을 한 손으로 바꾼 후에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명치를 갈겼다.
“!!”
숨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내가 목을 졸라 기도를 짓누르고 있으니 숨이 막힌 그가 죽을 듯한 얼굴을 했다.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잰퓨어가 얼마나 아프게! 고통스럽게! 죽었을지 네가 알아?!”
팔을 굽혀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계속해서 갈겼다. 그는 터져 나오는 숨과 막히는 기도로 인해 눈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발 죽어. 죽으라고!”
그런데 흑마법사는 눈이 돌아간 상황에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게 별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이야? 여기서 웃음을 지을 수가 있다고?
내가 짓누르고 있던 손을 살짝 떼자 그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지팡이가 있어야만 마법을 쓸 수 있는 그런 허접한 애송이로… 보이나?”
“!!”
나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의 목을 다시 짓눌렀다. 목소리를 내뱉을 수 있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바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거다!
꽈악, 내 손 또한 피가 몰려 빨갛게 변했다. 성인 남자의 두꺼운 목을 한 손으로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정신을 집중하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힘을 모았다.
“이대로 죽일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더욱더 고통을 주며 죽이고 싶었다. 이렇게 목을 졸려 한 번에 가게 하고 싶진 않았단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잰퓨어를 저세상으로 가게 만든 죗값은 치러야 할 것이 아닌가.
“끄하…하…….”
흑마법사는 아직도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목을 졸리면서도 웃는 걸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냥 죽어야겠다. 너는.”
나는 옆에 놓인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배에 칼을 내리꽂았다. 예전부터 사람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느껴졌다. 이건 잰퓨어에 대한 복수다. 이런 녀석이 멀쩡히 세상을 살아가게끔 한다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커헉!”
배에 꽂은 칼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피는 흙바닥을 적셨고, 흑마법사의 검은 눈동자는 거의 사라져 가고, 흰자만이 남고 있었다.
“이 세상에 도움 따위 되지 않는 사회악 새끼, 여기서 죽어 버려.”
그리고 나는 더욱더 칼을 깊게 꽂았다. 흑마법사는 온몸을 심하게 떨더니 곧이어 팔을 툭 떨어뜨렸다. 하지만 얼굴 근육은 그대로 굳었는지 아직도 기괴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루나, 이만 나와. 너 꼴이 말이 아니야.”
뒤에선 샐라임이 말을 건넸다. 내 몸에도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걔 이미 죽었어. 이리 나와. 괜찮아.”
샐라임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잰퓨어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이 흑마법사 놈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자 샐라임이 내 뒤쪽으로 다가와 내 겨드랑이 사이에 자신의 팔을 넣었다. 그러고는 뒤로 나를 끌어 자신의 품에 안아 넣었다.
“진정해. 괜찮아. 괜찮아……. 네가 죽인 건 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었어. 잘한 거야. 잘했어. 루나.”
나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그는 계속해서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제야 나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내가… 죽였어……? 정말로……?”
나는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건 피가 잔뜩 묻은 채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 녀석, 죽었다고 해도 영혼은 이미 마물의 것이라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거야. 흑마법사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란 건 없으니까. 하지만 좀비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지. 머저리 같은 녀석들. 저렇게 사는 게 뭐가 좋다고.”
샐라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샐라임은 나를 거세게 안아 주었다.
“우리 루나……. 고생했어. 다시는 이런 일 겪지 마. 너는 이런 일 겪을 필요 없어.”
“샐라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누군가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샐라임의 품에 벗어나 잰퓨어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잰퓨어……. 복수했어. 그러니까 편하게 눈 감아도 돼.”
그리고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은 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 땅에도 떨어졌다. 몇 안 되는 친구를 잃었다는 기분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 왔다.
“이 거지 같은 시스템을 파괴할 거야.”
이 모든 건 시스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만 아니었어도 잰퓨어는 나를 만날 일도 없었을 거고, 나를 좋아할 일도 없었을 거고, 나 대신 죽었을 리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 줘…….
나는 악에 받친 눈동자로 시스템의 로딩 화면을 켰다.
[로딩 중. 98/100]
거의 다 끝났다. 이젠 정말 다 끝이야.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난 벗어날 거야.
나는 여전히 잰퓨어의 손을 부여잡으며 로딩이 다 끝날 때까지를 기다렸다. 시스템이 모두 다 파괴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설마 레크리드 때처럼 모두 다 나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샐라임마저, 내 정령술사의 능력마저 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예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계속해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이어 숫자가 올라갔다.
[로딩 완료. 100/100]
[‘소녀들의 전쟁’ 시스템이 파괴됩니다.]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시스템의 알림음과 함께, 내 시야가 변했다.
팟!
그러고는 정전이 된 것처럼 까만 암흑이 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