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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48)화 (148/156)
  • 147화. 마지막 남자(3)

    심장 부근이 뜨거운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과 살갗과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렇게 칼을 정통으로 맞으면 무조건 죽지 않을까? 지금까지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때는 다 해결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칼을 맞았다면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끄으…….”

    나는 이를 악무는 신음과 함께 땅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내 앞에 서서 여유로운 눈빛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알을 굴려 잰퓨어가 갇혀 있는 검은색 구를 바라보았다. 잰퓨어가 빠져나오기만 한다면 나를 구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나 정말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은데…….

    그때, 잰퓨어를 바라보는 내 눈이 커졌다. 그의 호감도가 아주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 83, 87, 90……. 역시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가. 나는 이 상황에서도 허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막상 죽게 되니 중요한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애뮬릿 하나를 못 얻은 게 너무 억울할 뿐…….

    “급소는 찌르지 않았다. 너에게서 에리피아가 있는 장소를 들어야 하니까.”

    그때 나를 찌른 남자가 말했다. 급소가 아니라고? 지금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그리고 여긴 누가 봐도 심장이잖아.

    “하지만 호흡이 천천히 멈춰 올 거야. 이 칼은 특수한 칼이니까. 산소 부족으로 기절한 다음에 너는 고문실로 끌려갈 것이다.”

    그는 나에게 예정된 미래를 말해 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로 호흡이 막혀 오는 기분이 들었다. 기도가 조이는 느낌이 굉장히 불쾌했고 입을 통해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점점 내 폐엔 산소가 부족해져 갔고, 내 얼굴은 새빨개지며 입을 벌린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마지막 무기가 남아 있었다. 그것도 목소리가 나와 준다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끄…샐…라…이….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샐라임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긴 다리로 나에게 칼을 꽂았던 남자를 걷어차 버렸다.

    “커헉!”

    남자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고, 샐라임은 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 또한 아주 심각해 보였다.

    “억…….”

    이젠 정말 한계였다. 눈이 뒤집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때, 샐라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심장에 박힌 칼을 뽑아 버렸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흡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나는 샐라임의 팔뚝을 손으로 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샐라임이 갑자기 두 손을 내 심장 근처에 갖다 댔다.

    “가만히 있어 봐.”

    그리고 그의 두 손에서는 붉은색 빛이 번져갔다. 그 빛은 내 상처를 타고 들어왔고 안에서 무슨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힐이라는 건가. 샐라임은 힐러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나는 바닥에 털썩 누워 샐라임의 힐을 받고 있었다.

    “젠장, 뭐 이딴 칼이 다 있어. 몸속의 산소 공급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나를 위해 열심히 힐을 해 주고 있는 샐라임이 기특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웃어? 웃어? 나 피 말려 죽일라고 작정을 한 거지?”

    샐라임의 타박 또한 괜찮았다. 그래도 그의 힐을 받으니 아까보다는 조금 기도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아까 샐라임의 발차기로 나가떨어졌던 남자가 이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 제발 집중 좀 하자.”

    샐라임은 힐을 하던 것을 멈추고는 남자의 팔을 잡아 업어치기를 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남자의 팔을 끼우더니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꺾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소리를 내질렀다. 보는 사람도 이렇게 아픈데 당사자는 얼마나 아플까. 아니, 내 심장을 찌른 대가다, 이놈아.

    샐라임은 천천히 일어나 다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저 힐을 해 주며 샐라임은 나에게 물었다.

    “저놈 하나만 없애면 돼?”

    샐라임은 잰퓨어에게 마법을 걸고 있는 흑마법사를 가리켰다. 흑마법사는 잰퓨어를 고문하기 위해 온갖 짓을 벌이고 있었다.

    “네. 빨리하지 않으면 잰퓨어가 죽을지도 몰라요.”

    “저런 늙은이는 식은 죽 먹기지.”

    그리고 샐라임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흑마법사의 팔을 내리쳤다. 흑마법사는 순식간에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지팡이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숨은 쉴 수 있다고 해도 온몸이 쥐어짜지는 것처럼 너무나도 아파 왔다.

    흑마법사가 지팡이를 놓치자 잰퓨어를 가두고 있던 검은 구가 사라졌고, 잰퓨어는 땅에 툭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고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향해 다가오려 했다.

    “루…나……. 괜찮은 거야……?”

    잰퓨어는 땅을 기어서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땅바닥에 누운 채 그에게 말하려 했지만 입에선 바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허억…….”

    “무슨 일이 있어도 죽으면 안 돼. 절대. 네가 죽으면 나는…….”

    그는 애원하듯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내가 거의 죽음의 문턱에 갔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죽지 마…….”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호감도: 97%

    +

    감정이 극대화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호감도가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도달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사지에 몰린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잰…퓨어…….”

    그때 갑자기 목이 무언가 트이는 느낌이 들며 조금씩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잰퓨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울지 마…….”

    잰퓨어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흥건하게 젖은 얼굴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호감도: 100%

    +

    호감도가 100%에 달했다. 나 또한 놀란지라 눈이 크게 떠졌다. 나를 둘러싼 배경이 순식간에 멈추며 그의 심장에서 황금색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애뮬릿을 뱉어 내며 땅에 툭, 떨어졌다.

    “마지막 애뮬릿이야…….”

    나는 엎어진 채로 손을 뻗어 애뮬릿을 주워 들었다.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종 퀘스트를 성공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애뮬릿 5/5]

    [보상으로 ‘시스템 파괴’가 이루어집니다!]

    “미, 미친……. 드디어…….”

    나는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혼잣말을 지껄였다. 정말로 시스템 파괴가 이루어진단 말이야? 이거 꿈 아니지? 갑자기 눈 떴더니 익숙한 천장인 거 아니지?!

    나는 볼 안쪽을 세게 깨물어 보았지만 아플 뿐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들의 전쟁’ 시스템이 파괴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나는 혹시라도 시간제한이라도 걸릴까 싶어 누구보다 빠르게 ‘예’를 외쳤다.

    “예! 예! 제발 예!”

    멈춰 있던 배경이 돌아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 있던 잰퓨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흑마법사와 샐라임도 싸움을 계속했다.

    [파괴가 진행됩니다…….]

    [로딩 중. 1/100]

    뭐야! 로딩이 왜 있어! 바로 파괴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똥컴 쓰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미쳐 팔짝 뛰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년을 잡아야겠어.”

    흑마법사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시선을 나에게로 꽂은 것이다. 흑마법사는 이동기라도 있는 것처럼 휙 날아와 내 앞에 착지했다. 어느새 지팡이를 주웠는지 손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로딩 중. 9/100]

    젠장! 이거 왜 이렇게 느려! 

    시스템을 파괴한다고 해서 흑마법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전에 흑마법사에게 죽고 싶진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 시스템을 깨부쉈는데 이딴 늙은이한테 죽는다고?!

    “끄악!”

    검은색 광선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샐라임은 휙 날아간 흑마법사를 제압하기 위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몸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력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마법 공격이 나를 지배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응……?”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스턴에 걸리지도 않았다. 마법 공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눈을 슬쩍 뜨자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마법 공격으로부터 나를 막아 준 것은 잰퓨어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움직여 나에게 쏘아지는 마법 공격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낸 것이다.

    “잰퓨어!!!!”

    너무나도 놀란 마음에 내가 소리치자 잰퓨어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았다.

    “이 늙은이 놈아, 어딜 가려고. 네 상대는 나다.”

    샐라임은 흑마법사에게 말하며 뒤에서 흑마법사의 등을 걷어찼다. 나는 쓰러진 잰퓨어에게 필사적으로 기어가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무릎을 꿇은 채 허벅지에 그의 얼굴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잰퓨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루…나…….”

    “응! 나야! 괜찮은 거야? 잰퓨어! 괜찮은 거지?”

    “몸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아…….”

    “잠시 마비 상태가 걸린 것일 뿐일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마. 미안해. 잰퓨어. 너무 미안해. 나 때문에…….”

    “…….”

    그러자 잰퓨어는 힘없는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려 내 볼에 갖다 대었다.

    “미안해하지 마……. 네가 죽는 게 더 싫으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살살 쓸더니, 손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동시에 그의 눈꺼풀도 감겼고, 고개 또한 옆으로 떨어졌다.

    “잰퓨어!!”

    정말이야? 말도 안 돼. 정말 잰퓨어가 죽은 거냐고!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죽을 수가 있어?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분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맥박을 확인하자 그는 죽은 게 맞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심한 충격에 손과 발이 덜덜 떨려 왔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욕을 지껄였다.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여기서 잰퓨어가 죽어야 해? 그에겐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작 나 같은 걸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다니. 말도 안 돼.

    움직이지 않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 상태로 바뀌며 아드레날린이 무지막지하게 분비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에너지가 차고 넘쳤다. 나는 꿇고 있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복수는 해 줄게, 잰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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