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마지막 남자(2)
우리 셋은 모두 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화살이 꽂힌 벽을 쳐다보았다. 화살은 거세게 날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벌써 잠복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제야 잰퓨어와 에리피아도 실감이 나는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일단 정령을 꺼내. 결투가 불가피할 땐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니까.”
내가 잰퓨어를 향해 말했다. 잰퓨어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작게 속삭였다.
“운디네.”
나 또한 샐러맨더를 불렀다. 지금은 빠르게 숨는 것이 중요하므로 샐라임 보다는 작은 샐러맨더를 부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샐러맨더.”
붉은 도마뱀이 형상에 나타났고, 나는 샐러맨더를 향해 명령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와.”
그러자 샐러맨더는 하늘로 솟구쳤고, 적의 행방을 탐지하러 갔다.
우리는 화살이 날아올 수 없는 벽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길을 나서려면 이 벽을 나가야만 했고 바로 화살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언니! 이 뒤로 나가요.”
벽 뒤엔 울타리가 있었고, 그 울타리 밑엔 작은 개구멍이 있었다. 개구멍을 통해서 빠져나가면 숲이 나오고 그 속에 숨는다면 놈들도 쉽사리 찾지 못할 것이다.
“잰퓨어! 어서.”
잰퓨어를 향해 말했을 때였다. 마치 바람과 같은 속도로 어떤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서 피할 새도 없었다.
휘익!
남자는 작은 단도를 휘둘렀다.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잰퓨어의 심장을 향했지만 잰퓨어는 재빠르게 피해 다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루나!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에리피아를 데리고 어서 도망가!”
“하지만 어떻게 너를 두고 가!”
그러자 잰퓨어가 인상을 잔뜩 쓰며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이런 표정을 지은 건 처음인데, 그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진지했다. 동생과 나를 위해서 자신의 한몸 희생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보였다.
“어서! 제발 가 줘. 뒤따라갈게.”
“…알겠어.”
잰퓨어는 단도를 든 남자에게서 거리를 슬슬 벌리며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순식간에 창 모양으로 변했고, 얼음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오른손에 얼음 창을 든 잰퓨어는 비장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에리피아를 이끌었다.
“어서 가자!”
“하지만 오빠가…….”
“잰퓨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 잰퓨어에게도 분명 생각이 있을 거야.”
나는 에리피아의 등을 떠밀며 개구멍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먼저 구멍 안으로 들이밀었다.
“언니! 어서요.”
개구멍 안을 빠져나오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가득한 숲이 나왔다. 겨울인지라 나무들엔 하나같이 잎사귀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더욱 몸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일단 이쪽으로 가자.”
나는 길이 나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에리피아를 안전한 곳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잰퓨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분명 잠복해 있는 케이오스의 일원은 한 명이 아닐 것이었고 잰퓨어는 그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에리피아의 손을 잡고 뛰었다. 딱딱하게 굳은 흙바닥엔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그렇게 숲을 어느 정도 건넜을까.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숨자!”
꽤 크기가 있는 동굴은 풀숲과 나무들로 가려져 있어 멀리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추운 바람을 막아 줄 수 있어서 에리피아를 여기에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피아. 혼자 있을 수 있지? 나는 잰퓨어에게 다시 가 볼게.”
“그치만 언니…….”
그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툭 치면 흘러내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잠시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잰퓨어를 저렇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그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빨리 갔다 올게. 그리고 잰퓨어와 함께 같이 돌아올 거야.”
“으응…….”
에리피아는 자신도 이제 고집을 부려선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땅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무서울 나이다.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이 어린아이는 얼마나 겁이 날까.
“안에 숨어 있어.”
나는 에리피아를 동굴 안에 숨겨 둔 채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길이 난 쪽을 향해 걸어가며 우리가 나왔던 개구멍을 찾았다.
바닥을 기며 개구멍을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잰퓨어 앞에는 세 명의 마법사와 한 명의 검을 든 사내가 있었고, 잰퓨어는 죽기 살기로 그들을 대치하고 있었다.
“잰퓨어!”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왜 여기로 온 거야, 루나!”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리피아는 안전한 곳에 놔뒀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놈들의 실력은 어때?”
“만만치 않아. 흑마법사라서 그런지 효과도 잘 안 먹히는 것 같고.”
그랬다. 예전에 케이오스의 본거지에 갔을 때도 샐라임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몸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겠군.”
나는 검을 뽑아 들고는 자세를 잡았다. 흑마법사들은 나를 보더니 코웃음을 살살 쳤다.
“삐쩍 마른 계집애가 뭘 하겠다는 거지?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건 붙어 보고 말하지 그래?”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였다. 세 명의 마법사들은 나와 잰퓨어를 향해 마법을 쏘았다. 보랏빛을 띠는 광선이 우리의 자리를 향해 떨어졌고, 땅이 넓게 파이며 흙 파편들이 튀었다.
나는 잽싸게 몸을 움직이며 자리를 피했지만 마법이 떨어졌던 장소를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면 온몸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흑마법의 힘은 이 정도로 강했다는 건가.
그때, 정찰을 보내왔던 샐러맨더가 돌아왔다. 녀석은 나에게 무어라 전달을 했고, 잰퓨어는 나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숨어 있는 놈들은 없는 것 같아. 우리 앞에 있는 녀석들이 전부야.”
다행이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네 명으로도 벅찬데 다른 사람들까지 더 있었더라면 우리는 필패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은 지금 네 명으로도 우리가 이길지는 미지수였다. 흑마법을 쓴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녀석들에게 거리를 허용한다면 마법을 이용해 그들에게 유리한 공격만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막기 위해 나는 빠르게 한 놈을 향해 달려갔다. 아까 보랏빛 광선을 쏘았던 놈이었다.
“하앗!”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달려가 장검을 휘두르자 녀석은 당황했다는 듯 지팡이로 칼을 막았다. 지팡이 또한 얼마나 단단한지 칼을 온전히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힘차게 발을 들어 녀석의 배를 찼다. 정통으로 공격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녀석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으억!”
역시 마법사라서 육탄전에는 약한 게 분명해. 마법을 쏘지 못할 정도로 타이밍을 주면 안 되겠어.
나는 다시 그에게로 달려가 점프를 하며 팔꿈치로 그의 배를 한 번 더 내리꽂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끄억!”
엄청난 기침을 토해 내며 그는 침을 줄줄 흘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은 세 놈은 잰퓨어가 어찌저찌 상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곧 있으면 나에게로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빠르게 이놈을 공격 불가 상태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한 놈이라도 빨리 처치해야 해.”
나는 주먹으로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갈겼다. 퍼억, 소리가 크게 나며 녀석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마 뇌에 충격이 가서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녀석의 입에선 침이 줄줄 흘렀고, 눈은 뒤집혀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빠르게 일어나 잰퓨어와 대치하고 있는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잰퓨어는 광역 공격을 통해 그들의 발을 묶어 놓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먹히지 않는지 피를 흘리며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를 향해 다가갔다. 한 명은 잰퓨어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때를 노려 녀석의 목을 팔로 감싼 뒤 조였다.
“으윽!”
갑자기 기도가 막히자 그는 팔꿈치로 내 배를 가격하기 위해 마구 몸을 움직였다.
“잰퓨어! 지금!”
그리고 그때, 잰퓨어는 얼음 창을 가져와 그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가차 없이 다리가 날아가며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나는 재빠르게 그의 지팡이를 빼내 저 멀리 던져버렸다.
“무기가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겠지.”
남은 녀석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단도를 쓰는 놈, 한 명은 흑마법사였지만 남은 흑마법사는 다른 보통 내기들과는 다르게 검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조무래기들을 괜히 데리고 와서 나의 위상을 망쳤군.”
녀석은 천천히 걸어와 우리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공격은 전혀 지연되지 않고 바로 날아왔으며 검은색 광선은 잰퓨어를 향해 날아갔다.
“잰퓨어!”
잰퓨어는 빠르게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법 공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
잰퓨어는 검은색 막에 갇혀 허공으로 떠올랐다. 몸이 굳은 채로 스턴에 걸려 버린 잰퓨어는 공격 불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계집애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군. 하지만 검술 실력을 보니 엉성하기 그지없어. 레틴, 저 계집애를 처리해.”
흑마법사는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고, 단도를 쓰는 레틴이라는 녀석은 그의 부하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처럼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장검을 들어 그의 검을 막았고, 두 개의 검은 교차하며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어차피 너한테는 볼 일이 없다. 에리피아를 어디에 놔두었는지 불어.”
“내가 그걸 불 것 같냐?”
“고문을 해서라도 불게 할 생각이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말하지 그래? 흑마법의 고문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거든.”
남자는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비장한 눈빛으로 검을 빗겨 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럼 누가 이기나 해볼까?”
내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고, 남자는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남자는 확실히 실력자가 분명했다. 몸을 움직이는 속도나 검을 쓰는 모습이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베탄이라면 그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억!”
그리고 순식간에, 그가 휘두른 단도가 내 심장에 꽂힌 것은. 나는 엄청난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며 밑을 바라보았다. 뺄 수도 없게 아주 깊숙이, 단도는 내 심장에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