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선생님(4)
내 말을 들은 베탄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나를 꼬옥 안았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포옹을 받자 눈이 살며시 감기는 걸 느꼈다. 재워 준다는 그의 말처럼 잠이 솔솔 몰려오고 있었다. 졸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슬쩍 본 베탄은 어서 자라며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어서 자.”
“하지만 여기는 선생님 방인 걸요…….”
“오늘은 같이 자자.”
“…….”
“오늘이 나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베탄은 약간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마치 애원하는 듯한 느낌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방에 우리는 둘뿐이었고, 몸은 한 치의 틈 없이 밀착된 상태였다. 충분히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상황임에도 베탄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잠은 파도처럼 나를 감싸 왔고, 나는 천천히 빠져들고 있었다. 베탄도 잠이 오는 건지 새근새근 숨소리가 났다. 긴장이 풀리는 기분에 나는 점점 더 꿈속으로 내 몸을 맡겼다.
눈을 뜨니 난 여전히 베탄의 침실이었다.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탓에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보아 아침인 것 같았다.
“헉!”
나는 화들짝 놀라며 내 옆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
하지만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설마 베탄은 먼저 나간 건가?
몰래 뒤따라갈 것이라고 했으면서 잠이나 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실과 드레스 룸 이곳저곳을 살폈다.
“선생님?”
“…….”
방에 딸린 화장실까지 가 보았지만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애초부터 나만 이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방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침실을 나섰다. 바깥엔 누가 있을지 알 수 없어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침실에 갇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자 검은 생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발견했다.
“이봐요!”
1층 홀에 서서 계단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본 그녀는 나를 보더니 입을 떡 벌리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드디어 찾았다!”
쿵쿵쿵쿵. 계단을 올라온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웃음을 환하게 지었다.
“오빠 여자 친구 맞죠!”
“네……?”
“어제부터 메이드가 오빠 여자 친구가 왔다고 했는데 둘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뭐예요? 대체 둘이 뭘 한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아무 일도 없었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는 내 팔목을 덥석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베탄의 말대로 동생에게 들키면 골치 아파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두고 우리에게 소개 시켜주지 않다니! 오빠도 진짜 문제라니까? 대체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이리 와서 저랑 차 한잔해요!”
그녀는 나를 막무가내로 이끌었다. 계단을 위태롭게 내려온 나는 잠깐만 놓으라며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물어볼 게 있어요.”
“뭐죠?!”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베탄처럼 붉은색의 눈동자가 환히 빛났다. 마치 베탄의 여자 버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성격은 완전 정반대였지만.
“선생님은 어디에 있죠?”
드디어 궁금한 걸 물었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구는데 베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불안했다. 정말로 먼저 떠나버린 것 아니야?
“오빠는 밖에 나갔어요.”
그녀는 문을 향해 눈짓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더 물었다.
“밖에 어딜요? 언제요?!”
“새벽 일찍 나가던데요. 며칠 안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어요.”
“……!”
이럴 수가. 진짜로 떠난 거였어? 혹시라도 내가 쫓아오지 못하게 몰래 먼저 나간 거고? 이런 법이 어딨어! 인사라도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못 돌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가만, 베탄이 못 돌아온다고 하면 호감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95%였는데, 그를 다시 못 보게 되기라도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저 방에 좀 갔다 올게요!”
나는 그녀의 손을 확 뿌리치며 계단을 올랐다. 후다닥 이 층으로 올라가 베탄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바로 침대로 향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뒤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침대를 이리저리 뒤졌다. 이불까지 탈탈 털며 확인한 나는 결국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있다…….”
애뮬릿이었다. 잠을 자면서 호감도가 100%를 찍었고, 이걸 침대에 흘리고 간 것이었다. 나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조각을 꽉 쥐었다.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종 퀘스트 중 일부를 성공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애뮬릿은 총 네 개입니다.]
이어서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주머니에 애뮬릿을 숨기며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이 어디로 향한 건지는 모르는 거죠?”
“네. 목적지를 말하진 않았으니까요. 다만 언니를 잘 챙겨 주라고 했어요. 밥을 다섯 번 주랬나……?”
그녀의 말에 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밥에 집착하는 건 여전하군. 그의 말처럼 여기서 지내며 밥을 다섯 끼씩 먹고 있으면 정말로 베탄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애뮬릿을 손에 넣은 순간 나는 베탄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할 것이었고, 다음 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그건 바로…….
“마지막은 잰퓨어야.”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는 정말로 이 게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잰퓨어의 애뮬릿만 얻으면 나는 이제 해방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
나는 베탄의 여동생에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베탄의 셔츠를 갈아입고 있지 않은 게 보였다. 민망함을 느끼며 나는 구석에 놓인 내 전투복을 찾았다.
옷을 갈아입은 뒤에 밖으로 나가자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가 며칠간 여기서 지내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 시라도 일을 늦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일이 있어서요.”
산뜻하게 거절하자 그녀도 아무 말 못 하는 게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가 문 앞까지 나를 배웅해준 그녀는 내가 떠나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언니.”
“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오빠를 잘 부탁해요.”
“…….”
무얼 부탁한다는 걸까. 전 연인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그를 잘 보살피라는 걸까? 아니면 매 순간 다치고 죽을 수 있는 그의 직업에서 그를 도우라는 걸까.
무엇이든 간에 나는 베탄의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말하기에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만 같아 부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베탄의 여자 친구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만 가 볼게요. 감사해요.”
하루 동안 묵게 해 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뒤에선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다만… 나는 베탄이 몸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베탄을 믿고 있었다. 그의 실력과 의지라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제는 그를 온전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자, 어디로 가야 할까.”
잰퓨어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라인하르트 왕국이 아닌 율리우스 제국에 살고 있었고, 집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른 남자 주인공들처럼 집을 찾아갈 수도 없고, 어쩌지?
“레크리드의 새를 이용할까…….”
울리프를 이용하면 잰퓨어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크리드의 얼굴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까만색 물체가 하늘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
나는 깜짝 놀라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자칫하면 내 얼굴에 부딪힐 뻔했기 때문이다.
“새잖아?”
검은색 물체는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내 얼굴 앞으로 날아와 푸드덕댔다.
“뭐야? 얘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까마귀의 다리에는 무언가가 묶여 있었다. 이 새도 울리프처럼 전령조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에 묶인 것을 풀었다. 그러자 작은 쪽지 하나가 나왔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것을 펴자 구불구불한 글씨가 보였다.
루나에게.
백야제 때 우리가 갔던 디저트 가게 앞으로 와 줘. 기다릴게.
“백야제라면…….”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잰퓨어였다. 내가 그를 찾는 걸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주머니에 쏙 넣자 까마귀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다시 하늘로 날아갔다.
“율리우스 제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인 건가.”
나는 마차를 빠르게 잡은 뒤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도 그를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은 향하고 봐야 했다. 수틀리면 울리프를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디저트 가게 앞으로 향한 나는 연한 갈색 머리의 사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를 어떻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잰퓨어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확 들었다.
“루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안아 주곤 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보고 싶었어…….”
와락 껴안으며 나를 품에 가둔 그는 애틋하게 고개를 내 어깨에 비비적거렸다.
“간지러워, 잰퓨어……!”
내 말에 오히려 그는 더욱 고개를 비비며 내 반응을 즐겼다. 내가 억지로 그를 떼어 내자 그는 몸을 뒤로 물리며 환하게 웃었다.
“반가운데 어떡해.”
“어쩜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 상태였다. 나도 케이오스의 소굴에 들어간 이후로는 잰퓨어를 처음 보는지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잰퓨어는 틱틱거리는 내 말투도 마음에 들었는지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들어가자.”
나를 데리고 디저트 가게에 들어간 그는 능숙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자리에 착석한 나와 잰퓨어는 서로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에리피아는 잘 살아?”
“그럼.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한다고.”
“나를 보고 싶어 해?”
“응. 오빠보다 언니가 필요하다고 아주 난리야 난리.”
왠지 모르게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에리피아의 목소리에 내가 웃음을 지었다. 귀여운 녀석이었다. 얼굴을 다시 한번 더 보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나를 왜 부른 거야? 잰퓨어.”
그가 나를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그의 애뮬릿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에게 나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잰퓨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반색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