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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44)화 (144/156)
  • 143화. 선생님(3)

    단호한 베탄의 말에 내가 목소리를 높였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로 선생님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복수도 못 하고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 무시무시한 볼프문트의 굴로 들어간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베탄만큼 아니, 베탄보다도 대단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할 곳이었다.

    “이 서류의 글씨체로 원로를 유추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원로를 찾아가서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알아내는 거지. 그리고 그들만 골라서 죽이는 거야. 그렇게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그치만…….”

    베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었다. 그러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다치는 게 더 싫어. 그럴 가능성을 안고 가는 것 자체가 싫다고.”

    그는 확고한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나는 그가 출발할 때 몰래 그를 뒤쫓을 생각이었다. 그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나에겐 그의 애뮬릿을 얻어 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가야만 했다.

    “…….”

    “일단 오늘은 푹 쉬어. 잠도 푹 자고.”

    베탄은 테이블에 놓인 타르트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서 더 먹으라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나는 타르트를 순순히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간 일을 그르칠 것 같았다. 베탄이라면 어떻게든 수를 쓸 것이었다.

    “다 먹었어요.”

    음식을 다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뭐가 목구멍 속으로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 여기 누워.”

    그는 침대를 가리켰다. 자신의 침대였다. 당연히 손님용 방에서 묵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여기에 누우라고 하는 거지?

    “저는 저번처럼 손님용 방에 갈게요. 여기는 선생님의 침대잖아요.”

    “잔말 말고 누워.”

    “…….”

    “아니다. 갈아입을 옷을 줄게.”

    그는 갑자기 분노 상태에서 다정한 베탄으로 변하더니 나를 챙겨 주었다. 그러고는 옷장으로 가 자신의 셔츠를 꺼내오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이걸 입어. 전투복을 입고 자기에는 너무 불편하잖아.”

    “…알겠어요.”

    맞는 말이긴 했다. 전투복은 허벅지가 드러나는 치마에다가 방어력을 올리기 위한 재질이었기 때문에 편하게 잠을 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옆방으로 가 그의 셔츠를 갈아입고 왔다. 예상대로 사이즈가 커 아빠 옷을 걸쳐 입은 것 같은 꼴이 되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베탄의 방으로 들어가 그의 앞에 섰다. 커다란 셔츠 때문에 속바지가 가려져 다리가 훤히 드러났고, 나는 내가 몇 개월 전보다 훨씬 앙상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방만 맞아도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하고는 무슨 나를 도운다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베탄 또한 나에게 다리를 언급했다. 나뭇가지 같은 다리긴 했지만 나는 정령을 쓰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상관없어요. 저는 선생님을 도울 거니까. 그렇게 말린다고 해도 전혀 듣지 않을 거예요.”

    내가 고집을 부리는 말투로 말하자 베탄이 픽,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알겠어. 대신 네가 며칠만 다섯 끼씩 먹고 살을 찌우면 너를 데려갈게.”

    “……!”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인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시간적 여유가 더 생긴다. 그동안 그의 호감도를 올리면 되니까.

    그런데,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의 눈빛은 달라지고 있었다.

    +

    호감도: 85%

    +

    그는 침대 위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는 순순히 그의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제나의 집에 있을 때 편하게 쉬긴 했지만 나를 온전히 지켜 줄 거라는 생각이 든 베탄의 옆에 있으니 안정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이불을 덮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베탄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재워 줄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놀라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할 말도 있었다. 옆에 누워서 이야기를 하면 호감도 상승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옆으로 와서 누워요.”

    이상야릇한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나도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무엇도 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베탄은 지금 전 연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할 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이리 와.”

    그런데 베탄이 먼저 자신의 팔을 내 쪽으로 향해 내밀었다. 내가 동그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팔베개해 줄게. 이리 누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팔베개라고……? 이런 건 드라마 속 연인이나 하는 거잖아! 나는 태어나서 이런 건 해 본 적 없다구!

    내가 움직이지 않고 침대 구석에서 가만히 고민에 빠져있자 그가 팔로 내 몸을 감싸며 자신의 쪽으로 이끌었다.

    “……!”

    나는 어쩌다 보니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의 품속에 들어가니 남자다운 내음이 확 느껴졌다.

    +

    호감도: 90%

    +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나는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얼어 있었다. 저번의 병원에서부터 그렇고 왜 이렇게 베탄이랑은 짙은 스킨십이 많은 거야.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다고!

    “긴장 풀어.”

    바짝 힘이 들어가 있는 내 몸을 그가 툭툭 두드렸다. 나는 억지로 힘을 풀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그때 베탄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헬렌은 내 마지막 사람이나 다름없었어. 그녀에게 내 모든 걸 바칠 생각이었지. 평생토록 말이야.”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군요.”

    베탄은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 옆으로 돌리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내 모든 걸 이해해 주고 나 자체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지. 그런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격한 감정을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

    베탄은 헬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는 가만히 누워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어쩌다가 볼프문트에 소속이 되어 램클리프의 스파이가 되었는지도 말이다.

    “스파이가 된 건 내가 자초한 일이었어. 내 아래에 있는 기사들을 그 소굴로 보내고 싶지 않았지. 그때 한 선택이 화근이었어. 잘못된 일을 하는 순간부터 내 주변 사람이 인질로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거든.”

    “그건 볼프문트가 너무 악질인 거잖아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죠?”

    내가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말하자 그가 집게손가락을 내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내 동생이 방에 들어오길 원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조용히 해야지, 루나.”

    베탄은 정말 자신이 선생님인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그는 묘하게 나를 다루는 힘이 있었다. 에르셈프와 레크리드는 내 말을 순순히 따랐고, 세이먼과 잰퓨어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타입이었다면, 베탄은 이상하게 한 마디, 한 마디로 나를 쉽사리 다루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를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아.”

    베탄이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쁜 얼굴에 선이 그어지니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미간을 문질렀다.

    “왜요?”

    “…….”

    내 말에 그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뜸을 들인 그는 옆으로 몸을 누이며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커다란 그의 품에 내 몸이 쏙 들어갔다.

    “너를 만났기 때문이야.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너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지.”

    “저 때문이요……?”

    그제야 나는 베탄이 남자 주인공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헬렌에 대한 강한 기억 때문에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

    호감도: 95%

    +

    나에게 고백을 했기 때문일까. 그의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틈 없이 딱 붙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나 같아도 호감도가 오를 것 같았다.

    “네가 좋아, 루나. 헬렌을 위해 복수를 할 건 맞지만 현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호감도가 95%에 달하자 베탄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엄청난 애정이 들끓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짐승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선생님. 하지만…….”

    “맞아. 전 연인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의미가 없지. 그러니 나는 볼프문트로 가서 이 일을 해결하고 올 거야.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지금까지 헬렌에 대한 죄책감에 힘겹게 시달렸다고 했다.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했다는 생각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으로 떠올랐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을 해결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럽게 닿는 그의 숨결에 내가 몸을 잠시 움츠리자 그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더욱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와 만나 줄래? 루나.”

    그리고 그는 나에게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어어…….”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어버버하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 앞으로 훅 다가왔다. 베일 것 같은 높은 콧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밝게 빛나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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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감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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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호감도는 95%였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해야 남은 5%를 더 올릴 수 있을까. 나도 그를 좋아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와의 미래를 약속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니요, 선생님.”

    그에게 거짓말하고 싶진 않았다. 베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행복하길 원했지만 그와 이성적인 마음으로 연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내 마음은 이미…….

    “그래? 알겠어. 나 같아도 이런 모습이 싫을 것 같아. 하지만 일을 끝내고 와서 다시 한번 나를 만나 줘. 그러면 내가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베탄에게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던 나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요. 절대 죽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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