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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43)화 (143/156)

142화. 선생님(2)

그러고 보니 머리띠를 풀지 않은 게 생각이 났다. 이런 건 진작에 풀어 버리려고 했는데.

“아, 맞다.”

내가 바로 손을 올리자 베탄이 내 손목을 잡으며 바로 저지했다. 그리고 손목을 그대로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은 베탄의 방이었다. 그의 방을 들어가자 예전에 느꼈던 익숙한 내음이 코를 감쌌다.

“밥은 먹었어?”

그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그가 대답했다.

“식사를 위로 올려 달라고 할게.”

베탄은 방을 나서더니 밑으로 내려갔다. 메이드에게 말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내 주머니 속을 뒤졌다.

“…….”

꼬깃꼬깃하게 접혀진 서류가 손에 잡혔다. 잰퓨어와 케이오스의 본거지에 갔을 때 우연찮게 발견한 서류였다. ‘폐기 처분’ 서류철에서 나온 헬렌 루비아의 사망 기록서. 그녀는 바로 베탄의 과거 연인이었다.

곧이어 베탄이 방으로 돌아왔다. 가리는 음식이 있냐고 물은 베탄의 말에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고, 그는 알겠다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언제쯤 말을 꺼내야 할까. 그가 충격을 먹진 않을까. 충성을 다했던 자신의 소속이 알고 보니 자신을 배신했던 상대라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똑똑.

메이드가 카트에 음식을 실은 채 문을 열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디저트를 가져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베탄의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어서 먹어. 얼굴이 많이 핼쑥하다.”

“요새 잘 못 먹었거든요.”

“내가 다섯 끼는 챙겨 먹으라고 했지.”

“이렇게 누가 맨날 챙겨 준다면 먹을 자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당장 지낼 곳도 없다고요.”

그러자 베탄이 인상을 약하게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는 뉘앙스 같았다.

“대체 왜 갈 곳이 없는 건데. 너 원래 기숙사에 살았잖아?”

나는 오믈렛을 한 입 떠먹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목 안으로 타고 들어오니 힘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기숙사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갈 곳이 없어진 거죠.”

“왜 못 들어가는데?”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이야기해도 되는 건지.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난 마당에 숨길 게 뭐가 있냐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원래는 세이먼의 도움으로 기숙사에서 지냈던 거예요. 저는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지낼 데가 없었고, 그때 마침 세이먼이 저를 도와주었죠.”

베탄은 찌푸린 인상을 더욱더 찡그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지금은 도와주지 않는 건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먼만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가 줄에 꽁꽁 묶여 끌려가던 마지막 모습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잡혀갔어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죠.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해서 잡혀가길 자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런, 잡혀갔다니. 생각보다 일이 큰 모양이군.”

“맞아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의 집에 찾아오게 된 거죠.”

내 말에 베탄은 몸을 내 쪽으로 숙이며 내 두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 그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으니까 부담 느낄 필요도 없고. 네가 힘든 일을 겪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아녜요.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오늘만 묵게 해 주시면 내일은 바로 나갈 거예요.”

“해야 할 일이란 게 뭐지?”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꽉 쥔 주먹까지. 이제는 게임 시스템만 생각하면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왔다.

“이 모든 걸 끝내는 일이죠. 저는 자유의 몸이 되는 거예요.”

“…….”

알아들을 수 없는 내 말에 베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아까부터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류를 하나 꺼내 들었다.

“?”

작게 접혀 있는 서류를 하나하나 펼쳤다. 종이는 구겨져 있었지만 안에 쓰여 있는 글자만은 아주 선명했다.

“줄 게 있어요.”

보여 주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냥 나만 알고 넘기는 게 나을까 고민을 했다. 그가 알아봤자 그에게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면 받았지, 안 그래도 아물지 않은 그의 마음을 더 후벼 파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여 주려고 하는 까닭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신한 소속을 위해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을 끝까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나는 베탄이 힘들지언정 비참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훑는 듯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선생님이 이해한 게 맞아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애써 잡고 있는 베탄을 향해 말했다. 그가 이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단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겠지.

“헬렌 루비아. 선생님의 전 연인 맞죠?”

“…맞아.”

“그녀가 사망한 것도 맞고요.”

“그래.”

“동명이인일 리도 없고요. 선생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러자 베탄은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마주했다.

“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출처를 묻는 베탄에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케이오스’의 본거지에 들어갔었어요. 잰퓨어의 여동생을 구출하기 위해서였죠.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책상을 뒤지다가 ‘폐기 처분’ 서류철을 발견했어요. 시간이 오래 지나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오히려 나보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나를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밀 서류라고도 적혀 있죠. 이런 걸 제가 왜 위조하겠어요. 저도 서류에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걸 보고는 깜짝 놀라서 바로 가져온 거예요.”

“하긴 루나, 네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겠지…….”

손은 떨고 있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 포커페이스를 하려는 건가?

“그러면 루나 너는 내가 램클리프 협회의 기사로 위장한 볼프문트 소속이라는 것도 알겠네?”

“그렇죠. 저희의 적이었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죠.”

베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어 서류를 구겨 버렸다.

“감히 나를 배신해……? 나를 가지고 놀아? 기껏 스파이 짓까지 해서 램클리프에 잠입했더니, 돌아오는 결과가 이거였다고?”

그는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의 연인이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니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서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

호감도: 80%

+

나를 향한 베탄의 호감도가 오른 것이다. 지금 전 여자 친구를 억울하게 죽인 볼프문트를 향해 화내기에도 모자란데 나를 보고 호감도가 오른다고? 어째서?!

나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은 마음으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눈에 뭐가 들어간 거야? 불어 줄까?”

하지만 그는 바로 나를 신경 쓰며 내 눈에 입김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들어가지도 않았고요.”

내 추측에 따르면 그에게 아주 소중했던 여자에 대해 정보를 올바르게 잡아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의 애뮬릿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 20%나 남았다. 무슨 수로 그의 호감도를 올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그에게 다음으로 할 일을 물었다. 이 일을 덮을지, 아니면 무슨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다.

“…복수해야지.”

“복수라고요?”

“응. 그녀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잖아. 게다가 이건 나의 자존심도 건드린 문제야. 결코 가만히 지나갈 수 없어.”

무려 총 기사단장이라는 직위. 자신의 모든 것을 협회에 바치고 목숨마저 내놓아야 하는 그 자리에서 그는 몇 년이고 버텨 왔다. 그런데 그 버팀의 대가가 이거라면, 복수를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볼프문트는 세력이 강하잖아요. 베탄 혼자서 괜찮겠어요?”

그러자 베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어떤 것도 상관없어. 이 서류를 쓴 사람은 분명 원로일 거야. 원로만 잡으면 돼. 그 과정에서 내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고.”

그는 정말로 남은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나름 내가 들어온 게임의 남자 주인공인데, 나보다 과거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제가 도와줄게요.”

나에게도 힘이 있었다. 임시직이지만 상급 정령술사이기도 하고, 샐라임을 부릴 수 있으니 그에게도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샐라임이 80%는 다 하긴 하지만 나도 베탄에게 배운 검술 실력이 있다고.

“아니, 너는 가만히 있어.”

하지만 베탄은 누구보다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말투 같았다.

“왜요! 베탄이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도 다 제가 이 서류를 가져왔기 때문이잖아요!”

“이 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이야. 누군가를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죽는다고요?”

“그래. 아니면 다치거나.”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선 수많은 상처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보낸 것만 생각해도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해는 되었다. 또 한 번 나를 보내게 된다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겠지.

“그래도, 돕게 해 줘요.”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상관없었다. 내가 베탄을 돕다가 다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나에게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는 죽지 않아요. 옆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구요.”

“…….”

“언제까지 아픔 속에서 살 거예요. 그건 베탄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연이었을 뿐이라고요. 제가 그걸 깨부셔 줄게요.”

베탄도 에르셈프, 레크리드, 세이먼 못지않게 나를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돕고 싶었다. 다른 남자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이 베탄과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에게 마지막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하나 떠올랐다. 예전에 내가 베탄에게 스승님이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베탄이 나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 뭐죠?”

“나중에 내가 널 필요로 할 때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야.”

“절 이용한다고요?”

“그래. 숨겨 놓은 카드 같은 거지.”

바로 언젠가 때가 되면 나를 비장의 카드로 쓰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걸 대가로 나는 그와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저를 카드로 써 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 저를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카드로 남겨 둔다고 했잖아요. 그쵸?”

베탄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카드를 쓸게.”

“!”

“넌 이 집에 잠자코 가만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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