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42)화 (142/156)
  • 141화. 선생님(1)

    나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내 삶은 운이 더럽게 없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 수많은 소녀 중 내가 신들의 유희 거리로 뽑힌 것부터가 화근이었다. 이상한 게임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별짓거리를 다 하고, 그 이후엔 남자 주인공 다섯 명을 공략해야만 했다. 그것도 내 목숨이 담보로 걸린 채로 말이다. 아니,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기구한 인생이 또 어디에 있냐고.

    게다가 죽는 이유가 히아신스의 명을 받은 하녀한테 독살당하는 거라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이블린에게 속았던 것도 모자라 제나에게 또 속은 거잖아.

    하지만 사람을 의심하지 않은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건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 죽은 거 아니었나? 이 생각들은 다 뭐지?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듯이 흘러가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아, 죽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떠오른다더니 지금 그게 이 상황인 건가. 진짜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이 지긋지긋한 게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니까. 그냥 죽자. 죽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면 이 고생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난 이제 자유의 몸인 거야…….

    “헉!”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망치로 내 머리를 내려치듯이 정신이 확 돌아왔다. 눈이 터질 듯이 부릅떠졌고, 입에선 숨을 토해 내듯 호흡이 돌아왔다.

    “이, 이건…….”

    눈앞에 보이는 건 새파란 하늘이었다. 손을 더듬거리자 잡히는 것은 버석버석한 풀떼기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한기가 느껴졌다. 아주 차가운 바람이 나를 휭 하고 스쳐 지나갔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게다가 이미 내 몸은 차디차게 얼어 있는 상태였다.

    “끄…어…….”

    신음을 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몇 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는 할아버지처럼 힘겨운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이 바랜 풀떼기들이 가득한 허허벌판이었다.

    “죽지 않은 건가…….”

    분명 마지막 기억은 제나가 나에게 독을 먹이고,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데. 어떻게 죽지 않은 거지? 설마 이것도 시스템이 개입해서 나를 다시 살린 건가?

    얼음처럼 얼어 있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일 분이라도 더 있다가는 입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돌아가 있을지도?

    천천히 발걸음을 떼 벌판을 걸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벌판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샐라임.”

    그래서 나는 그를 소환했다. 이럴 땐 항상 샐라임이 곁에 있어 주었기에, 그가 필요했다.

    내가 부르자 몇 초 뒤에 허공에서 붉은 형상이 생겨 났다. 그리고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등장했다.

    “루나.”

    그는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세게 잡힌 그는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덥석 안았다.

    “!!”

    얼음장 같던 몸이 샐라임으로 인해 따스하게 녹는 게 느껴졌다. 누가 불의 정령 아니랄까 봐 그는 모닥불을 옆에 두고 있는 듯한 강력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네가 이상한 여자를 만났을 때부터, 샐러맨더가 그 여자를 기피했을 때부터 불안했다고. 왜 그렇게 사람을 잘 믿는 거야, 바보같이!”

    그는 나를 혼냈다. 하지만 그의 타박엔 너무나도 깊은 애정이 느껴져 내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했어요?”

    그러자 샐라임은 내 양어깨를 잡은 뒤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당연하지! 네가 죽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우리 이 망할 게임을 끝내기로 결심했었잖아. 드디어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하게 히아신스의 하녀에게 죽는다는 건 내가 용납이 안 돼!”

    “하하……. 고마워요.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죽지 않았어요. 분명 제나는 저에게 먹인 게 맹독이라고 했는데.”

    “세이먼 녀석 덕분이야.”

    “네?”

    “세이먼 덕분이라고. 너희들이 옷장에서 숨어 있을 때 세이먼이 너에게 입으로 무언갈 전달해줬지?”

    “그걸 어떻게…….”

    “정령계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웬만한 소설책보다 훨씬 재미있더라!”

    “아니, 그래서 세이먼이 저에게 준 게 뭐였는데요? 그럼 왜 날 구해 주진 않은 거지?”

    “큼큼, 나도 직접 보진 못해서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독제의 일종이었던 것 같아. 네가 그걸 삼켜서 제나의 맹독이 씻겨져 나간 거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세이먼이 어떻게 나에게 해독제를 줄 생각을 한 거지?

    “하지만 세이먼은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지 못했을 텐데……. 제나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는 뜻인 건가요?”

    “글쎄다. 그 녀석은 도통 속을 모르겠어서 말이야. 너에 대한 건 전부 다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주 무서운 녀석이야.”

    “말도 안 돼. 그러면 왜 내가 제나의 주변에 있도록 가만히 놔둔 거지?”

    “가만히 놔둔 게 아니라 개입할 시간이 없었겠지. 그는 쫓기고 있던 몸이었다며.”

    “아, 그렇군요.”

    경호대에게 쫓기고 있던 몸인지라 제나가 히아신스의 하녀인 걸 알아챘을지라도 나에게 접근할 수 없었을 거다. 게다가 나는 에르셈프와 함께 베라일 공국에 갔다 왔었고, 레크리드를 만나자마자 제나가 나를 찾아왔었으니까, 접점이 없었겠지.

    “이렇게 나를 살려 주다니…….”

    세이먼을 생각하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의 예쁜 웃음과 황금빛 머리칼, 새파란 눈동자까지. 마치 나만의 기사님 같았던 모습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샐라임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전히 내 몸을 녹이기 위해 나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 있겠죠……?”

    “그 녀석은 똑똑하니까.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샐라임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에게 끌어안긴 채로 나는 온전히 그의 위로를 받았다. 마음 여기저기가 아리듯이 아파 왔지만 꾹 참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세이먼이 나에게 해독제를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 나는 기필코 이 게임을 끝낼 거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자.”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요. 방향 감각도 잃었구요.”

    그러자 샐라임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괜히 상급 정령이겠냐. 나를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라, 꼬마야.”

    오랜만에 듣는 꼬마 소리였다. 괜스레 그 호칭이 반갑다는 걸 느꼈다. 역시 나에겐 샐라임이 필요해.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주잖아.

    펑!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내가 화들짝 놀랐다. 샐라임이 변신하는 소리였다. 연기가 걷히자 그는 아주 큰 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불사조!”

    활활 타오르듯 아주 시뻘건 붉은색의 깃털이 가득한 불사조는 내 몸집보다 거대했다. 불사조로 변한 샐라임은 내 앞으로 걸어와 자세를 낮췄다. 올라타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탔다. 부드러운 깃털이 내 몸을 감쌌고, 나는 떨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잡았다.

    “출발한다, 꼬마.”

    불사조가 말을 하니 굉장히 이상했다. 만화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믿기지 않는 기분도 들었다.

    퍼더덕.

    샐라임의 마지막 말과 함께 그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펄럭거리는 날갯짓은 금세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아찔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무서워요!”

    “곧 익숙해질 거야. 나중엔 더 태워 달라고 부탁해도 안 들어준다.”

    우리는 하늘을 펄럭펄럭 날았다. 어느새 끝도 없이 펼쳐지는 벌판은 끝이 났고, 주거 공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긴 비행 끝에 우리는 마을 초입에서 내릴 수 있었다. 테일러 마을에 돌아오니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히아신스를 생각하니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그녀는 분명 내가 죽은 줄 알고 허허벌판에 나를 던져 놓고 간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다, 바보 같은 것아!

    “다음 행선지는?”

    나는 집이 없었다. 지낼 곳도 없었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기숙사를 한번 들려 볼까 고민도 했지만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다음은 누구 차례인데?”

    “누구 차례라뇨?”

    “남자 주인공 말이야. 애뮬릿을 얻어야 할 다음 상대.”

    “베탄이에요. 그다음은 잰퓨어죠. 두 명 남았어요.”

    “그럼 거기로 가자.”

    “베탄의 집이요?”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한시라도 빨리 남자 주인공을 공략해 애뮬릿을 얻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탄에게 가는 게 맞겠지. 빠르면 이삼일 안에도 끝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마차를 타고 가요. 모습도 얼른 바꾸고요.”

    마을 안에 불사조가 있는 건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전설의 동물 아니랄까 봐 가만히만 있어도 엄청난 아우라를 풍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샐라임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만 돌아갈까?”

    나에게 묻는 샐라임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게임 스토리가 비틀린 순간부터 어떤 위험이 나를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것이 무서워 샐라임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집 앞까지만 같이 가요.”

    그렇게 우리는 마차를 타고 베탄의 집으로 향했다.

    띵동.

    베탄의 집에 다다라 벨을 눌렀다. 벌써 세 번째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그 익숙한 메이드가 나오려나.

    벌컥.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건 메이드가 아니라 익숙한 얼굴의 검은 머리 사내였다.

    “루나?”

    그는 놀란 얼굴 반, 반갑다는 얼굴 반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잘 지냈어요?”

    그의 얼굴을 보자 병원에서 한 그와의 키스가 떠올라 잠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창피한 기분에 내가 시선을 피하자 그가 동그란 눈을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루나. 이렇게 우리 집을 또 찾아오고. 또 데이트를 하자고 말하려는 거야?”

    “뭐……. 그건 아니지만 부탁이 있어서요.”

    “뭐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오늘 안에 끝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란 걸 알았다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선생님. 제가 갈 곳이 없어요.”

    “…….”

    내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손짓했다.

    “들어와. 이번엔 내 동생한테 걸려도 아무 말 못 하겠지만, 갈 곳 없다는 제자를 내칠 수야 없지.”

    그렇게 나는 다시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층 홀에는 메이드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다행인 건지 부모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얌전하게 걸어 들어가는 나를 베탄이 빤히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한 다음 물었다.

    “왜요, 뭐가 묻었어요?”

    그러자 베탄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머리띠, 아직 안 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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