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41)화 (141/156)
  • 140화. 나만의 기사님(3)

    “쥐새끼 같은 게 여기에 숨어 있었어. 이리로 와.”

    경호원은 다른 곳을 뒤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리로 우르르 몰려왔다. 여러 개의 눈이 하나같이 우리를 바라보자 절로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끌어내기 전에.”

    무거운 경호원의 말에 내가 흠칫 떨었다. 그러자 세이먼이 팔을 내 등에 두른 채 손가락으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내 발로 걸어서 나갈 거야. 잠시 시간을 줘.”

    세이먼이 경호원에게 말하자 경호원은 헛웃음을 픽 치며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루나,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

    “사랑한다고 해 줄래요? 거짓이라도 듣고 싶어.”

    그는 애처로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롯이 나만을 담는 그의 눈빛에 나는 마치 시간이 멎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이라도 괜찮다고요……?”

    “응.”

    그렇게 대답하며 세이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짓이라도 괜찮은 걸까.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말뿐이지만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해 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세이먼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면 이렇게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좋아했어요, 세이먼. 우리가 비록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만.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말을 막았다. 길게 늘어놓는 말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 같았다. 그저 그는 내가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이만 나와. 수배자 놈에게 더 이상 시간을 줄 여유 따위 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사랑 고백을 하는 우리를 보며 경호원은 비웃음을 지었다. 이들에게 우리의 상황은 웃기기 짝이 없겠지. 우리가 어떤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알지 못할 테니까.

    “루나, 전 이만 가 볼게요.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세이먼…….”

    “잘 있어요.”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좁은 옷장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경호원에게 말한 대로 그는 정말 순순히 스스로 나갔다. 나는 옷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뒤로 묶어.”

    세이먼은 팔을 뒤로했고, 경호원들은 두꺼운 줄로 그의 손목을 칭칭 감았다. 이제 그는 끌려갈 일만 남았다.

    줄의 끝을 잡은 한 경호원은 세이먼을 이끌었고,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

    그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가라고, 언젠가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땐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입밖으로 내뱉어지진 않았다.

    “…….”

    그렇게 세이먼은 갔다. 나는 옷장 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고, 계단을 쿵쿵 내려가는 소리와 문을 여닫고 나가는 소리만이 내 귓가에 작게 들려왔을 뿐이다.

    그는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몰았을까. 순전히 그의 선택이라고 하기에 그는 그를 둘러싼 수많은 환경의 압박들이 있었다.

    나는 그가 안쓰러웠다.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인간임에도 그를 연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 때문이야.”

    이 모든 건 시스템 때문인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진 게임 속 남자 주인공이 파멸을 맞이하는 것. 처음부터 나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다. 나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알 수 없는 마음과 걷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휘감았다. 나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붙잡혀 끌려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불행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끼익- 

    그때, 누군가 슬며시 반쯤 닫힌 옷장의 문을 여는 게 느껴졌다. 적었던 빛이 옷장 안으로 파고들며 나에게 비쳤다.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들자 나를 쳐다보고 있던 건…….

    “제나.”

    그녀였다. 언제 도착한 건지 들어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덜덜 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이아나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제나……. 금방 돌아왔네?”

    “네. 연회가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어서요.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집 안이 난리도 아니에요. 누군가 왔다 간 거예요? 루이아나 님은 왜 이러고 있는 거고요. 집 안에서 한참을 찾았어요.”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순순히 그녀의 손에 내 몸을 맡긴 채 그녀에게 안기듯이 옷장에서 빠져나왔다.

    “세이먼이 찾아왔었어.”

    “네?!”

    “그가 찾아왔었다고. 대체 내가 여기에 숨어 있었는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이래 왔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집 안 꼴이 이런 건가요?! 다친 곳은 없어요? 그 사람이 루이아나 님을 또 다시 끌고 가려고 하진 않았고요?!”

    제나는 흥분한 듯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괜찮다는 듯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는 쫓기고 있는 몸이었어. 그를 찾는 경호원이 이 집에 들이닥쳤지. 그래서 그를 끌고 갔어.”

    “이럴 수가. 집을 수색한 거였군요. 위험하진 않았나요?”

    “응. 그저……. 마음이 안 좋을 뿐이야.”

    낮게 가라앉은 내 표정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옷장을 뒤로 한 채 창고를 걸어 나오려고 하다가, 몸을 잠시 멈추었다.

    “잠깐만.”

    “네?”

    “기다려 봐.”

    무언가 빛나는 것이 내 눈에 스쳤다. 설마, 저건 애뮬릿인가? 내 입 속에 있는 보석이 애뮬릿인 줄 알았는데, 저건 뭐지? 그러고 보니 입에 있던 보석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옷장 속으로 다시 몸을 들이며 구석에 놓인 그것을 찾았다. 황금색의 조각은 그 자리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애뮬릿.”

    마지막으로 그의 호감도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100%에 달한 건가. 이게 나에게 정말 마지막으로 남기는 그의 흔적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애뮬릿을 들어 올렸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그것은 마치 세이먼의 예쁜 머리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끌려가더라도, 정말로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건 뭐죠?”

    금세 내 뒤로 다가온 제나에 나는 재빨리 애뮬릿을 등 뒤로 숨기며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흘린 것 같아.”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종 퀘스트 중 일부를 성공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애뮬릿은 총 세 개입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를 잔잔히 울렸다. 애뮬릿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천천히 발을 뗐다. 저절로 몸이 휘청거렸다.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게임 따위,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저에게 기대세요.”

    제나는 나를 부축하며 내 팔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2층의 계단은 내려갔다. 소파에 나를 앉힌 제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차를 한 잔 드릴게요.”

    “응.”

    그녀는 부엌으로 가 찻잔을 달그락거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어서 들어요. 따뜻한 걸 마시면 좀 진정이 될 거예요. 지금 루이아나 님의 낯빛이 말이 아니에요. 대체 어떤 충격적인 일이 있었길래…….”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찻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향긋한 내음이 내 코를 타고 찔렀고, 나는 연둣빛의 액체를 홀짝 들이켰다.

    “…….”

    제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세이먼과 정리도 된 것 같고.”

    나는 최대한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뇌 속 회로를 마구 얽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분하게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수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나를 들이닥쳤고 나는 천천히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는 건 수 초 뒤에 인지했다.

    “…….”

    말을 더 하려고 했다. 입술을 열어 혀를 움직이려고 했는데, 갑자기 혀가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어…어…….”

    명치를 거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은 얼굴로 제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제나가 웃고 있었다.

    “……?”

    입꼬리는 올라간 대로 올라가 있었고, 웃겨 죽겠다는 듯 눈꼬리도 접혀 있었다.

    “제…나…….”

    지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순간의 인지 부조화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끝냈네.”

    그리고 제나는 가뿐한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예전에 세이먼에게 가둬진 나를 돌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것처럼 사이코 같은 모습이었다.

    “눈치가 보통 빨라야 말이지. 너 같은 걸 주인님처럼 모시는 게 정말이지 거지같기가 짝이 없었는데.”

    제나는 차갑디차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지껄였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고개를 힘없이 내리자 연둣빛 액체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

    “병신같이 내가 주는 차를 마실 때부터 웃겨 죽는 줄 알았다고. 어쩜 사람이 이렇게 배우는 게 없어?”

    “…지…금…그…게…무슨…말…….”

    점점 마비되어 오는 혀를 억지로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말하자 그녀는 픽, 하고 웃었다.

    “히아신스 님이 왜 당신을 그토록 증오했는지 알겠어. 온갖 불행을 끌어다 오면서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처럼 교묘하게 행동하잖아. 저 가짜 같은 은발은 또 뭐고.”

    그녀는 두 손을 탈탈 털며 나에게 말했다. 지금 제나가 뭐라고 하는 거지? 히아신스?

    “……!”

    모든 퍼즐이 맞추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세이먼과 이어진 후에 학생 식당에서 히아신스에게 독살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예정보다 일찍 일어났고, 이미 한 번 목숨을 위협받았으니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헤리우스가 개입을 했고, 스토리의 흐름은 틀어졌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결말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나는 히아신스 님의 하녀지. 당신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 왔는지 몰라. 난 이제 주인님에게 막대한 돈을 받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어. 아, 이런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려나? 그 독, 엄청난 맹독이거든.”

    제나는 히아신스의 지령을 받고 계획적으로 나에게 접근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세이먼이 날 납치했을 때 나를 돌보는 일을 했던 건 어떻게 된 걸까. 아니, 지금 와서야 이런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 상태가……

    “넌 이제 곧 죽을 거야. 몇 초 남지 않았지. 네가 숨통이 끊어지는 것만 확인하면 돼. 그것의 증거로 네 손가락을 하나 잘라 갈 거고…….”

    이젠 그녀의 목소리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귓가를 빼곡히 메웠다. 나는 그렇게 숨통이 끊어지고 있었다. 내 온몸 속엔 엄청난 독이 파고들어 다시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거기까지였다. 내 생각은 이쯤에서 끊겼다. 그리고 나는 손을 힘없이 소파 밑으로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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