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나만의 기사님(2)
“안녕.”
내 앞에 선 남자는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심지어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순간 이 사람이 누구인지 까먹을 정도였다.
“……!”
그러자 남자는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왜 그래요, 모르는 사람처럼. 저예요, 세이먼.”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그의 차림새는 평소처럼 말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옷 군데군데가 더러워져 있고, 찢어진 곳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처럼 반짝반짝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들어가도 되죠?”
그는 이미 집 안에 들어와 놓고서는 물었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 나가요, 어서.”
이번엔 무작정 납치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걷는 세이먼은 힘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제나의 집이다. 나를 찾아온 건 알겠지만 남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건 안 된다.
“한 번만 봐줘요. 조금만 있다가 나갈게요. 저 다쳤다구요.”
그러고는 부여잡고 있던 배를 슬쩍 보여 주었다. 그곳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세이먼은 매우 아프다는 듯이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예요. 제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안 거죠? 정말 절 미행이라도 하는 거예요?!”
“제가 루나가 있는 곳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
누가 들으면 소름 돋을 법한 말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는 소파로 걸어가 몸을 풀썩 기대앉았다.
“여기는 제나의 집이라구요. 세이먼이 저를 찾는 건 알겠지만 여기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돼요.”
“루나, 이리 앉아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듯 그는 나에게 앉기를 권유했다.
“당장 나가라니까요!”
“어서요. 십 분이면 돼요.”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세이먼은 다시 일어서 나에게로 다가와 내 팔뚝을 잡고는 소파로 이끌었다.
억지로 나를 자신의 옆에 앉힌 세이먼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상처의 아픔 때문인지 미간의 주름은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루나, 그때 왜 도망갔어요?”
“…….”
“저와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잖아요.”
내 입에선 짧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애처로웠다. 정말로 자신을 배신한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단 말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죠. 타국으로 가는 게 싫었던 거예요?”
“저를 막무가내로 잡아 놓고! 묶어 놓은 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배신 당한 척을 한다고요? 세이먼이라면 당신의 말을 듣겠어요?”
“제가 루나를 다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군요.”
“초점은 그게 아니라, 당신은 전혀 제 마음은 고려하고 있지 않잖아요.”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고, 나는 불같이 화가 나려는 마음에 억지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저한테 그럴 수 있었죠? 우리 친구가 아니었나요? 힘들 때 도와주고 의지하던 친구요!”
그러자 세이먼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친구, 친구 좋죠. 그런데 저는 루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
“사랑은 친구와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루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럼 우리 사이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요?”
“…친구였던 적이 없다고요?”
“예비 연인?”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남자의 머릿속에서는 나와 이미 결혼식까지 올린 상황 같았다. 장난해? 이런 일방적인 사랑이 어디 있어. 이건 사랑이 아니야.
“예전에도 말했듯이 세이먼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단지 집착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가 어딘가로 도망갈까 봐 무섭지? 당신을 버릴까 봐 무서운 거지? 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으면서 나에게 어떤 감정을 바란다는 거야?”
내가 말을 길게 늘어놓자 그는 천천히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러고는 애정 어린 눈길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모습도 너무 예뻐.”
“지금 사람 말을 뭐로 듣는 거야?”
“어떡해요.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세이먼은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건 전혀 자신의 알 바가 아니라는 듯 굴었다. 대체 호감도가 몇 퍼센트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
호감도: 89%
+
마지막으로 본 숫자와 같았다. 아직 90%대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사랑을 느낄 정도면 100%에 달했을 땐 나를 어떻게 구워삶겠다는 거야?
세이먼의 속내를 상상하니 나는 무서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얼마나 시꺼먼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엔 왜 온 거예요. 미리 말하지만 저는 세이먼을 따라갈 생각 없어요.”
“이미 늦었어요.”
“…뭐가 늦었다는 거죠?”
허탈해 보이는 그의 말에 나는 일순 불안해졌다. 이미 세이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졌다는 말인 건가?
“저는 이미 쫓기고 있는 몸이에요. 진작에 라인하르트 왕국을 벗어났어야 했는데, 루나를 찾느라 그러지 못했죠.”
“저를 찾느라 도망가지 못했다고요? 왜 그랬어요. 본인이 살길이 우선이잖아요.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갈 법을 알아봐요!”
세이먼이 정말 미웠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잡히는 건 원치 않았다. 나를 잡아 놓고 입에 천을 물려 놓았을 때는 정말이지 죽도록 때리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은 수그러들었다.
그저… 그가 나 없이 행복하길 바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뇨, 루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는 당신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벌이고 말았죠. 그것에 대한 벌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체 왜……. 왜 저를 놓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요.”
“…….”
“당신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는 아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찬란한 금발이 스르륵 넘어가며 그의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다 한때예요. 시간이 지나면 저 같은 건 생각도 안 날 거라고요. 제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세이먼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이 웃기지도 않다는 모양이었다.
“당신에게 내 마음을 알리는 것이 두려워.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 버릴까 봐. 그래서 잡아 두고 싶었던 건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어.”
“제발, 제발 세이먼…….”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가족도, 집도, 친구도 아무것도 없지. 남은 건 너밖에 없었는데 이젠 너마저 나를 떠나려고 해.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해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미칠 지경이라고요.”
내가 세이먼에게 호소하듯이 말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것이 들렸다.
쾅쾅쾅!
내가 화들짝 놀라자 그가 나를 보호하듯이 내 어깨를 감쌌다.
“놀랐죠. 걱정하지 말아요.”
“누구죠? 누군데 또 여길 찾아오는 거죠?”
그러자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경호대입니다! 잠시 확인할 것이 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세이먼을 휙 바라봤다.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을 찾으러 온 거예요?”
“맞아요. 이젠 벼랑 끝이에요. 마지막이라구요, 루나.”
“이런, 젠장. 이런 상황이면 빨리 말을 했어야죠!”
“아무 소용없어요. 저는 그저 마지막 말을 듣고 싶어서 왔을…….”
“이리 와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확 이끌었다. 그를 숨겨야만 한다. 여기서 잡히게 놔둘 순 없다. 경호대에 끌려간다면 더 이상 세이먼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 나는 그가 싫다. 무섭다. 그의 사랑을 받아 줄 마음도 없다. 하지만……
레크리드도 잃었는데, 또 누군가를 잃고 싶진 않다고.
힘없이 나에게 이끌린 그는 나를 따라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쿵쿵 소리를 내며 거센 발걸음으로 이 층으로 올라가 손님용 방으로 그를 집어넣었다.
“창고로 들어가요. 어서.”
“…….”
“여기서 인생 끝내고 싶어요? 빨리 들어가요.”
나는 그와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짐 덩어리들이 가득한 옷장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쪽은 어둡고 넓어서 사람이 숨기엔 적당할 것 같았다. 빠르게 짐을 빼낸 뒤 그의 몸을 욱여넣었다.
“제가 내려가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게요. 쥐죽은 듯이 있으면 돌아갈 거예요. 혹시나 여기로 온다고 해도 짐으로 막아 놓으면 눈치채지 못할 거고요.”
내가 그를 옷장 안으로 들여보낸 뒤 빠르게 뒤를 돌았을 때였다.
“……!”
“가지 마요. 나와 함께 있어요.”
그러고는 나의 손목을 잡고는 휙 당겼다. 거센 힘에 나는 세이먼 쪽으로 이끌렸고, 옷장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쾅! 쾅! 쾅!
“문을 열지 않으시면 억지로 따고 들어가겠습니다.”
밑에서는 경호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헙, 숨을 참으며 옷장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젠장!”
그리고 바깥에 있는 짐을 안으로 들이며 최대한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짐을 쌓았다.
쾅!
1층에서는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지명 수배자가 숨은 곳이니 저렇게 억지로 들어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집은 수납공간이 많아서 샅샅이 수색하는 것이 힘들 수 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지금 정말로 행복해요.”
세이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이는 그는 정말로 행복한 것 같았다. 어두운 옷장 안에서도 그의 얼굴은 말끔하게 빛이 났다.
+
호감도: 93%
+
“마지막으로 루나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꿈만 같아요.”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요! 마지막이라니!”
그러자 그가 손을 들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줄 게 하나 있는데, 받을래요?”
“……?”
“루나만 괜찮다면요.”
“뭔데요.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어서 말해요. 안 그래도 심장 떨려 죽겠으니,”
내 말이 멈추었다. 아니, 저절로 막히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다가와 말캉한 것이 내 입술을 막았다.
“읍.”
부드러운 혀가 내 입 속을 훑었고,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분 좋은 향긋한 내음이 났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음에도 그의 입맞춤은 영롱한 것을 맞이하는 듯 아득한 기분을 주었다.
입술은 금방 떼어졌고, 그는 천천히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나는 내 입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을 느꼈다. 작고 동그란 보석 같은 것이 내 입 안을 굴러다녔다.
“분명 루나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이게 대체…….”
내가 볼 안에 보석을 머금으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빙긋 웃었다.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리고 옷장 문이 부서질 듯이 벌컥, 열린 건 한순간이었다.
쾅!
형형한 눈동자를 한 덩치의 경호원은 우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 있었군. 망할 수배자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