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나만의 기사님(1)
“너, 너는…….”
얼떨떨한 내 표정에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던 그녀가 맞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맞아요, 저 제나예요! 기억하시죠?!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내 손을 잡고 반가운 티를 내는 그녀는 나를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모, 몸은 괜찮은 거야……? 그때 엄청 심하게 다쳤었잖아.”
“수술을 잘 받아서 금세 나았어요! 일어났는데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맑은 얼굴의 그녀는 몸이 말끔하게 나았다는 듯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제나가 살아난 것도 전부 레크리드 덕분이다. 나는 다시 떠오르는 레크리드 생각에 뒤를 돌아 매그넘 마법 상점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해 보이는 상점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해.”
“그……?”
“내가 세이먼에게 잡혀 있을 때 나를 구해 주러 왔던 남자야. 너를 구해 주기도 했지. 네가 살아난 건 그 남자 덕분이나 다름없어.”
“이런,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겠는걸요!”
“아냐, 그는 이 일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아. 나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잊었는걸.”
“이럴 수가…….”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나는 제나를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레크리드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제나가 다시금 표정을 풀며 나에게 말했다.
“어디 가실 곳이 있나요?”
“응? 갈 곳이라니?”
“지낼 데가 있냐는 말씀이에요. 저번에 말을 들어 보니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세이먼에게 잡혀 있을 당시 제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것도 세이먼 덕분에 지내고 있었던 거라 지금은 갈 수 있을지 몰라. 내 방이 전부 빠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자 제나는 기쁜 기색을 했다. 그러고는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와 함께 가요. 제가 사는 집이 있어요.”
“하지만 네가 사는 곳이잖아.”
“제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를 못 하겠어요. 저야 루이아나 님을 모실 수 있다면 영광이라구요. 집은 좀 누추하지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제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맑은 얼굴로 나에게 말하는 그녀는 내가 알던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성격도 전혀 바뀐 것 같지 않고.
“그럼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 곧 나갈 거야. 나는 시간이 얼마 많지 않으니까.”
“네, 그럼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어느새 제나는 나를 이끈 채 길을 걷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그녀의 집을 향하게 되었다.
* * *
“집이 꽤 좋은걸?”
마을 근처에 위치한 제나의 집은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겉은 허름해 보였지만 내부는 깔끔하고 아기자기했다. 그녀의 성격이 보이는 듯한 귀여운 소품들도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지냈던 거야? 그런데 세이먼은 어떻게 알게 된 거고?”
그녀가 세이먼의 손아귀에 어쩌다가 들어간 건지 궁금했다.
“소일거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연락을 했어요. 약속을 잡고 만났더니 세이먼 님이 계셨죠. 설마 사람을 잡아 놓는 일을 시킬 줄은 몰랐지만 말이에요.”
“그렇구나. 원래 세이먼과는 접점이 없었군.”
“맞아요. 연락을 받고 나간 날 처음 본 거니까요.”
그녀는 나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편하게 쉬라는 듯 담요도 하나 걸쳐 주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응. 고마워.”
그는 부엌으로 가더니 찻잔을 달그락거리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네가 건강하게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마음이 놓여……. 그때 세이먼에게 당했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
“다행히 급소를 피해 갔나 봐요. 그리고 바로 죽은 척 쓰러진 것도 한몫했죠.”
“응? 일부러 쓰러진 거였단 말이야?”
“아! 네, 네. 한 번에 죽지 않으면 더 공격을 당할까 봐 일단 엎어졌죠.”
상황에 맞지 않게 유쾌한 듯이 말하는 것도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상황에서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대단한걸.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거야?”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일이 다 생기기 마련이죠. 자, 그나저나 어서 차 좀 드세요.”
“고마워.”
연한 녹색 빛을 띠는 차는 냄새가 아주 향긋했다. 따뜻한 액체를 목으로 넘기니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간만에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이지만 검은 방에서 같이 지냈던 그녀이기에 함께 있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지내고 싶으신 만큼 계셔도 돼요. 저는 어차피 아침마다 일을 하러 나가니까요.”
“무슨 일을 하러 가는데?”
“저택에 가서 연회장을 청소하는 일이에요. 오랫동안 쓰지 않은 저택이었던지라 굉장히 더럽더군요. 아마 일주일 동안은 계속 출근할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홀짝홀짝 차를 들이켰다. 제나는 맞은편에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너무 아름다우세요.”
“낯간지럽게 무슨 그런 말을 해.”
“은발도 너무 탐스럽고요. 저는 이 부스스한 갈색 머리가 빗자루 같아서 너무 싫거든요.”
“…….”
“공작가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분들도 이런 은발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어, 어. 그렇지.”
공작가를 딱 짚어 내는 제나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뭐야?”
작은 깃털이 달린 막대였다. 다른 소품들은 진열장 안에 가지런히 장식되어 있는 반면 깃털 막대만은 바깥에 나와 세로로 꽂혀 있었다.
“고양이 장난감이에요.”
“고양이? 고양이를 키워?”
그러자 제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밖에 나갔지만요.”
도망갔다는 말인 건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지라 더 이상 묻기는 곤란했다. 마침 제나도 나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루이아나 님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세요? 비젠티아 아카데미에 다니신 거면 적성이 하나씩 있는 것 아닌가요?”
“나는 정령을 써.”
“우와! 정령이요? 저는 검술 쓰는 사람 밖엔 보지 못했는데!”
“검술이 흔하긴 하지.”
“정령을 보여 주시면 안 돼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아. 샐러맨더.”
작게 부르자 금세 허공에는 붉은색 도마뱀이 생겨났다. 퐁, 하고 생겨난 도마뱀은 나를 오랜만에 본다는 듯 반가운 기색을 하며 내 품으로 쏙 들어왔다.
“헉, 뜨겁지 않으세요?”
“전혀. 만져 볼래?”
내 말에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샐러맨더에게 갖다 대었다.
“앗! 뜨거워!”
낯선 이가 손을 대자 샐러맨더는 놀랐는지 불꽃을 확 뿜어냈다.
“뭐 하는 거야, 샐러맨더. 그러면 안 되지. 제나, 괜찮아?”
“네, 괜찮아요. 화끈한 녀석이네요. 애완동물 같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과거의 기억에 잠기는 걸 느꼈다. 내 샐러맨더를 보고 애완동물 같다고 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지. 이블린이 나무에 걸린 지팡이를 내려 달라고 했을 때였는데, 그때가 정말 옛날 같군. 그녀는 그때도 나를 속이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던 걸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이블린은 나에게 전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처음 사귀었던 친구나 다름없었는데, 그녀에게 나는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샐러맨더, 제나에게로 가 봐.”
나는 샐러맨더에게 명령했지만 녀석은 가기 싫다는 듯한 몸부림을 치며 내 품에 있기를 고수했다.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봐.”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녀석이었는데 내 명령을 거부하는 걸 보니 오랜만에 만나 친화력이 떨어진 건가.
“괜찮아요. 본 걸로 충분해요. 루이아나 님처럼 굉장히 귀엽네요.”
“내가 귀엽다고……?”
“그럼요. 겉으로는 강한 척하시지만 속으로는 여린 분 같아서요. 아, 실례되는 말이었을까요?”
그녀는 윗사람을 대하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나는 자꾸만 나에게 예의를 차렸다.
“아냐, 귀엽다는 말은 칭찬이잖아.”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세요. 저는 집안일을 하러 갈게요.”
“도울게! 뭐라도 할 게 있을까?”
“아니에요. 제가 하는 게 편해요.”
“그치만…….”
“여기서 편히 쉬시는 게 저한텐 더 좋답니다. 차가 식기 전에 마저 드세요.”
제나는 참 착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데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절망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고마워.”
그녀의 말에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여기저기 쏘다닌 탓에 피곤함이 절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받아들이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나와 제나는 그 이후로 며칠간 같이 지내게 되었다. 작은 집이었지만 손님용 방도 있었기에 그곳에서 묵었고, 제나는 매일같이 아침만 되면 출근하기 바빴다.
그녀가 없는 집에서 나는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바닥을 청소하는 일을 했다. 먼지를 닦고 물건을 가지런히 올려두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제나는 밤이 되면 돌아왔고, 항상 손에는 빵과 같은 음식을 잔뜩 안고 있었다.
“저택에서 남는 음식이라고 주셨어요! 같이 들어요.”
항상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나는 것 같았고,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을 느꼈다. 밝은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오는 길에 루이아나 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가끔은 선물을 사 오기도 했는데, 진주 장식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비쌀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모조품이지만요.”
그녀는 추위에 빨개진 손으로 나에게 머리끈을 건넸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한기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고마워, 제나.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야.”
“그런 말씀 마세요. 저야말로 이 적적한 집에 루이아나 님이 계셔서 퇴근할 맛이 나니까요.”
나는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묘한 갈색빛을 띠는 그녀의 홍채엔 내가 비쳤다. 매일같이 거울을 보지만 이렇게 남의 눈을 통해 보는 내 모습은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이 고마움, 잊지 않을게.”
“잊어도 돼요.”
“…….”
“머리를 묶어 드릴게요. 이리 앉으세요.”
그녀는 내 뒤에 앉아 빗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 주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자 목 뒤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밤에도 나갔다 올 거예요. 연회가 시작하는 날이어서 일을 도우러 가야 하거든요.”
“…알겠어.”
그녀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고생을 하러 나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러웠지만 그녀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대견하기도 했다.
“조심히 갔다 와.”
“네. 루이아나 님도요.”
“…….”
그리고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바깥으로 나갔다. 텅 빈 집을 바라보니 쓸쓸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소파에 세로로 누워 책이나 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 같지 않은 여유로움이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제나가 무언갈 두고 간 건가?
“제나?”
문 가까이 가기만 해도 틈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담요를 여미며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