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38)화 (138/156)

137화. 그의 정체(2)

“행운……?”

“일종의 선물이나 다름없죠.”

나는 선물이라는 단어에 열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선물? 선물이라니. 장난해? 당장 나를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당신이라면 그럴 능력이 있을 거 아냐! 맨날 선물, 선물! 시스템에서 꺼내 주지 못할망정 맨날 선물만 주는 게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그러자 헤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은 이 게임을 끝까지 완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죠. 저에게도 그런 권한이 없답니다.”

“진짜 남주인공을 찾는 것 말하는 거야? 그걸 내가 왜 해야 해!”

“진정해요. 전 아까도 말했듯이 선물을 주러 온 것이니까. 당신이 진정하지 않으면 강제로 당신의 몸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허, 허.”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상황에 내가 헛웃음만 짓고 있자 그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알던 레크리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자, 받아요. 저를 즐겁게 해 준 보상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작은 결정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작게 모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내뱉어 냈다.

“이건…….”

“맞아요. 애뮬릿이에요.”

“이걸 왜 당신이……?”

헤리우스는 예쁘게 웃으며 나에게 빛나는 황금색 조각을 건넸다.

“제가 아니면 누가 주겠어요. 저는 지금 레크리드의 자리에 있다구요.”

“하지만 호감도가 100%까지 오르지 않았는데…….”

애뮬릿을 얻은 건 완전 이득이었다. 하지만 얼떨떨한 기분에 말끝을 흐리자 레크리드가 나에게 말했다.

“다시 호감도를 확인해 보세요.”

그의 말에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

호감도: 100%

+

에르셈프와 똑같이 호감도 100%가 찍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정말로 100%였다.

나는 바보가 되어 가는 듯한 기분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요?”

“하, 하…….”

절로 나오는 헛웃음에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뮬릿을 주었다고 지금 기뻐해야 하는 건지, 신을 앞에 두고 시스템을 없애 달라고 졸라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걸 하나 말씀드리죠.”

그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한번 분위기를 잡고 입을 열었다.

“대체 뭐죠?”

불안한 기분이 나를 휘감았다. 이 남자가 뭐라 지껄일지에 따라 내 운명이 휙휙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최종 퀘스트에 참여해 당신에게 애뮬릿을 주었기 때문에, 게임 스토리는 비틀어질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게임 스토리가 비틀어진다니?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거야?

“이 게임은 기존의 스토리 대로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예전에 당신이 만났던 신이 준 힌트대로 말이죠. 하지만 제가 개입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기가 차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마음대로 개입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게임이 더 재미있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원래라면 당신은 레크리드와 엔딩을 본 뒤 상사병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개입함으로 인해서 당신은 상사병에서 죽게 될 운명에서 벗어났죠. 따라서 앞으로의 이야기도 바뀌게 될 겁니다.”

그렇다. 원래의 스토리라면 나는 레크리드와 이어진 뒤 8일 후에 상사병이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신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스토리에 개입했기 때문에 미래가 바뀐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면 저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거죠?”

“모든 건 루이아나 씨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애뮬릿을 손에 넣어 이 시스템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비틀린 스토리로 인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될지는요.”

“…….”

젠장, 젠장. 욕설이 절로 나왔다. 저번에 만났던 칵테일을 먹던 신은 양반인 수준이었다. 그가 준 선물은 기존의 스토리 대로 가게 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을 떠올리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행운을 빌어요. 루이아나 씨.”

그는 정말로 나를 게임 속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불행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거야?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을지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냐고.

잠깐만. 그러면 예전에 세이먼에게 납치되었을 때 배에 실려 갈 뻔했던 날 구해 준 것도 헤리우스 덕분이었던 거야? 죽어가던 제나를 순간이동 시켜 준 것도?

“신이어서 그런 거였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레크리드는 자신이 마법 상점의 주인이라서 그렇다고 했었지만 모두 다 신의 권능 덕분이었다. 본인이 직접 움직여 저세상 갈 뻔한 나를 구해 준 거였다니, 좀 전에 느꼈던 배신감과 신의 능력을 써서 나를 구해 줬다는 고마움이 모순적으로 동시에 느껴졌다.

“이만 가 보도록 해요. 바쁠 테니까요.”

“잠시만요…….”

너무나도 평온한 그의 말에 나는 오히려 눈을 질끈 감으며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여기서 어떻게 여기서 자리를 뜰 수 있겠나.

하지만 헤리우스는 이번엔 단호한 말투로 나에게 내뱉었다.

“어서 나가 봐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

내 말에 그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턱짓했다.

“어서요.”

재촉하는 그에 나는 성에 차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대체 누구지? 다음 이야기를 진행할 사람인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익숙한 상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어리숙해 보이는 소년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나를 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드디어 퇴근할 수 있겠다.”

그러고는 계산대로 가 잽싸게 가방을 챙기더니 안에 있는 레크리드를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저 가 볼게요.”

그러고는 쏜살같이 바깥으로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지 문이 열리는 것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헤리우스가 나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잠시 불러 놓은 알바생인가.

나는 찝찝한 얼굴로 상점 문을 나섰다. 아직까지는 의문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 온갖 질문들을 되뇌며 나는 길을 나섰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상점 앞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 어디로 걷든 간에 만나겠지. 이 게임 시스템이라면 말이야.

“하아…….”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헤리우스는 신이니까 내 미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나처럼 불려 온 다른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거나?

나는 길을 걷던 도중 우뚝, 몸을 멈추었다. 그래, 이렇게 헤리우스를 보내는 건 너무 손해야.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서 작은 단서라도 알아내야겠어. 단호한 목소리로 봐서는 절대 알려 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잖아? 다시 가서 물어보자.

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매그넘 마법 상점으로 향했다. 빨리 가야겠다는 기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처 없이 걷던 탓에 이미 멀리 나와 있던지라 돌아가는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딸랑.

빠른 걸음 탓에 숨이 찼다. 헉헉, 숨을 고르며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엔 키가 훤칠한 남자가 나를 반겨 주었다. 레크리드는 계산대에 서서 벌컥 문을 연 나를 바라보며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다.

“헤리우스!”

나는 헤리우스의 이름을 불렀고,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어서 오세요.”

아무렇지 않게 손님을 맞이하듯 나를 대하는 그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지금 연기라도 하는 거야?

“헤리우스. 조금 더 힌트를 줘요. 그게 더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레크리드의 얼굴을 한 헤리우스를 향해 묻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낯선 표정이었다.

“저는 헤리우스가 아니라 상점 주인, 레크리드입니다. 사람을 잘못 찾으셨어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어디서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헤리우스가 아니란 말이야?

“헤, 헤리우스가 아니라 레크리드란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손님.”

빙의를 풀었다는 건가? 그럼 지금은 헤리우스가 아니라 레크리드의 상태라는 거야?

“정말이죠? 당신은 레크리드라는 거죠?”

“네. 무슨 문제라도……?”

나는 진짜 레크리드를 만났다는 것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최종 퀘스트부터 나는 가짜 레크리드를 만나고 있었다는 거잖아. 자신의 집에 데려가 당근 스튜를 해 주고 다정하게 장난을 쳤던 레크리드 말이야. 어쩐지 레크리드가 갑자기 나에게 애정이 없어 보였던 이유가 있었어. 그건 헤리우스였기 때문이야. 그럼 지금의 레크리드는 내가 알던 사랑스러운 레크리드라는 건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데 레크리드의 말투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거야……?

“레크리드, 저예요. 루이아나. 잘 지냈어요?”

다정하게 묻는 나를 보며 레크리드는 오히려 표정을 구겼다.

“저를 아시나요? 오랜만에 오시는 손님인가……?”

그러고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나라고. 루이아나. 빙의를 당했다고 나를 잊어버린 거야?

“저 기억 안 나요? 레크리드네 집에 가서 음식도 만들어 먹고, 같이 잠도 잤었잖아요! 비무 대회 때는 우리 학교에도 들어왔었고요!”

“…….”

그는 말이 없었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절로 미간이 모아졌다. 레크리드가 왜, 왜 이러지?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잘못 찾으신 것 같아요. 저는 손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정말로 절 잊어버린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러자 레크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나에게 말했다. 마치 진상 손님을 대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정중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손님이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물건을 사실 게 아니라면… 출구는 저쪽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크리드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최종 퀘스트 때부터는 기억을 못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거야? 전부 다?

나는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내가 알던 사람이 나를 까맣게 지워 버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탈하고 슬픈 마음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출입문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 안녕히 계세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힘없이 출입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내 팔을 낚아챘다. 깜짝 놀랄 만한 타이밍에 내가 꺅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을 쳐다보자 상대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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