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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37)화 (137/156)
  • 136화. 그의 정체(1)

    이,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방금 ‘결혼’을 입에 담은 게 맞냐고!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를 일관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를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진, 진심이에요?”

    “당연하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거짓말을 치겠나?”

    “하, 하지만 에르셈프는 왕자님이고, 저는 아무런 신분도 없는 일개 평범한 여자애일 뿐인데…….”

    “사실 넌 밀리센트 공작 가문의 영애잖아. 나와 결혼하면 가문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신원도 보장받을 수 있어. 지금 이대로 살아가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나?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와의 결혼이 절대 너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치만 결혼이라니……. 그럼 저와 결혼해서 에르셈프가 얻는 건 뭔데요?”

    “얻는 것이라니……. 너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막대한 부를 얻는 것보다 더 행복해. 나는 루나 너를…….”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결혼이라뇨. 그런 중요한 문제를 여기서 논할 것도 아니고요.”

    나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져 버릴 뻔했다는 것을 가까스로 인지하며 현실을 마주하고자 정신을 차렸다.

    예전에 샐라임이 말했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에르셈프가 나중에 나한테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쩔 거냐고 물었던 샐라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다다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 조르지 않을게.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해 줘.”

    게다가 나한테는 아직 최종 퀘스트가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남주인공 중 진짜 남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에르셈프와 결혼을 약속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에르셈프의 애뮬릿을 얻었지만 최종 퀘스트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에르셈프는 진짜 남자 주인공이 아님을 의미했다. 젠장, 그러면 대체 누가 진짜 남주인공이란 말이야?

    부우우웅.

    배가 계속해서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손톱을 깨물며 가끔씩 침음을 내기도 했고, 에르셈프는 그걸 바라보았다.

    그래, 나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걸 끝내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자칫해서 최종 퀘스트를 실패한다면 사망할 것이었고, 그런 미래를 가지고 있는 나는 에르셈프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할 일을 끝내고 돌아올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결의를 다지는 말이기도 했다.

    에르셈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배가 왕국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우리가 라인하르트 왕국에 도착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무사히 배에서 내려 수도까지 도착한 우리는 그제야 땀에 젖은 손을 털을 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험버트 시장으로 갈 거예요. 에르셈프는요?”

    “궁으로 가서 게릴리온을 가져온 것을 알려야지. 그리고 베라일 공국이 아마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지 프로티칸을 죽인 자들을 알아내겠지.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네. 정말 일어난답니다. 속으로 대답하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에르셈프는…….”

    “당연히 불려 나가겠지.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어. 하지만 아직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죽지만 마요. 제가 어떻게 해서든 에르셈프를 찾을 거니까, 죽지만 말라고요.”

    “하하, 지금 저주하는 거 아니지? 나는 절대 죽을 리 없어. 루나를 옆에 두고 저세상 갈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에르셈프는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강하니까 괜찮겠지. 아무런 문제 없을 거야.

    괜스레 다가오는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 볼게요. 몸조심해야 해요.”

    “루나, 잠시만.”

    “네?”

    그러자 에르셈프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다물고 말았다.

    “아니야. 돌아오면 말해 줄게.”

    잠깐만, 이거 완전 사망 플래그 아냐? 나는 흔히 영화에서 보던 그런 장면들을 떠올리며 에르셈프를 붙잡았다.

    “안 돼요! 그런 말을 하면 무조건 죽는다고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요? 말해 주고 가요. 듣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그러자 에르셈프는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내뱉었다.

    “그냥… 너를 많이 아끼고 있다고 말하려 했어.”

    “…그게 다예요?”

    “응.”

    생각보다 별거 아닌 말에 미심쩍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캐내는 게 더 이상하겠지.

    “가 볼게요.”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굳은살로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느껴졌고, 그가 힘을 주어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응. 잘 가.”

    손은 놓아졌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등을 돌렸다. 고개를 틀어 잠시 뒤를 바라보니 그가 아까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안녕.”

    내가 손을 흔들자 그가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인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는 들었다는 듯이 자신도 입을 움직였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나는 옷깃을 여몄고, 발걸음을 재촉해 시장으로 향했다.

    딸랑.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익숙한 인테리어와 특유의 마법 약품 냄새. 그리고 키가 훤칠한 남자가 반겨 주는 이곳. 매그넘 마법 상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키가 훤칠한 남자가 있는 대신 키가 작은 어리숙해 보이는 소년이 계산대에 있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 레크리드는 없나요?”

    “사장님은 안쪽에 계시답니다.”

    소년은 상점 안쪽에 딸린 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들어가 보세요.”

    그의 말에 나는 가판대를 넘어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조명 하나와 함께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는 방에는 정말로 레크리드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루이아나 씨.”

    그는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그럼요. 어서 앉아요.”

    그의 말에 나는 의자를 빼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먼저 그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지만, 오히려 그가 나에게 볼일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

    호감도: 90%

    +

    어느새 그의 호감도는 90%를 달해 있었다. 나와 어떤 접점이 없어도 호감도가 쑥쑥 오르는 것은 이전에도 확인했기에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나는 약간 당황했다.

    어떻게 호감도가 오르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잖아……? 이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야?

    “방금 제 호감도를 보고 놀랐죠?”

    “?!”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호감도? 내가 잘못 들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방금 제 눈동자를 보고 호감도를 확인했잖아요. 아닌가요?”

    여유롭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두 배로 당황했다. 어, 어떻게 호감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그,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내 목소리가 떨려 왔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누구이며, ‘가이즈 인 러브’ 속 남자 주인공이 맞는 건가?

    “하하, 긴장하지 말아요. 전부 다 말해 줄 테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긴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나를 구워삶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을 더욱더 흙빛이 되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헤리우스. 마티스 소속의 신입니다.”

    “시, 신……? 당신은 분명 레크리드… 레크리드잖아요……?”

    “어떻게 보면 레크리드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저는 당신이 최종 퀘스트를 시작할 때부터 레크리드에게 빙의한 헤리우스입니다. 레크리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 레크리드가 아니죠. 진짜 레크리드는 제 유희를 위해 잠시 잠들어 있답니다. 놀랐나요?”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이가 없는 마음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최종 퀘스트를 시작할 때부터 빙의를 했다고? 그럼 이 레크리드는 내가 알고 있는 레크리드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은 온 우주를 관장하고 있는 신들을 위해 뽑힌 열 명의 소녀 중 하나입니다. 각자 다른 게임 속에 빙의되어 그 게임을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발탁된 운이 더럽게도 나쁜 소녀죠. 당신이 어째서 전생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알아듣게, 알아듣게 설명해요. 지금 제가 당신들을 위해 뽑혀 온 하나의 게임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레크리드는 너무나도 여유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플레이어죠. 신들은 다들 어떤 소녀가 이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이길지 내기를 걸었고, 저는 당신에게 걸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죠. 당신이 밀리센트 공작가에서 탈출할 때부터, 목숨을 걸고 정령술과 시험을 통과하며, 템트의 꿈속에 들어가는 것도 전부 말이에요.”

    “말도 안 돼. 그럼 당신이 시스템이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나를 다 지켜봐 왔단 말이야? 에르셈프랑 여관에서 누워 있던 것도, 아니, 베탄이랑 입을 맞추었던 것도, 아니, 템트의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 모두?! 말도 안 돼! 이건 완전 수치플이잖아!

    “아뇨. 시스템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게임 진행 도구의 일부일 뿐입니다. 시스템을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맞지만 우리가 시스템이라는 건 아니죠.”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러면 레크리드 당신이, 아니 헤리우스 당신이 왜 레크리드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거죠? 레크리드는 내가 공략해야 할 남주인공이 아니었나요?”

    그러자 헤리우스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진정하고 말을 들으라는 듯한 표시 같았다.

    “당신이 다른 소녀들에 비해 월등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여 줬기 때문이죠. 설마설마했는데 오성석까지 손에 넣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결정했습니다. 제가 직접 이 게임에 참여하기로요.”

    “그러면…….”

    “맞습니다. 저는 이 게임을 더 가까이서 즐기고 싶어서 레크리드의 몸에 빙의한 거예요. 그렇다면 많은 물음 중 당신이 가장 궁금해할 것은…….”

    “왜 호감도가 올랐느냐…….”

    “맞아요. 당신을 향한 제 호감도가 오른 까닭은 당신을 지켜보는 게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이죠. 이야기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당신의 능력 덕분이었어요.”

    나는 그의 말에 무언가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불려 온 것이며, 나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며, 이 게임의 목적은 무엇인지 말이다.

    가만, 그러면 내가 전생에서 어이없게 벤치 프레스를 하다가 죽게 된 것도, 순식간에 이곳으로 환생하게 된 것도 전부 다 이 사람들 때문이란 말이야? 가만히 잘 사는 사람을 한순간에 죽여 버린 게 이 사람들 때문이냐고!

    “지금 저를 가지고 놀았다는 걸 직접 찾아와서 말해 주고 있는 건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언제나 이 X 같은 게임 시스템을 만나게 되면 시원하게 욕을 갈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만나게 되었다. 날 이 거지 같은 고통에 빠지게 한 작자들이 당신이란 말이야?!

    그는 손을 내밀어 덜덜 떨고 있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이런 거로 진정이 되게 생겼냔 말이야!

    “흥분하지 말아요. 저는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러 온 거니까요.”

    그러고는 그는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갖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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