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베라일 공국(6)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르셈프에게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수년 전에 잃어버린 보검을 찾기 위해 타국에 침입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탈출하는 와중에 무슨 말을 하냐고!
“그… 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시선 또한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자꾸만 고개를 돌리자 에르셈프도 이상한 것을 느낀 건지 진지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는 거야, 루나. 아까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지금으로선 이 상황에 집중을 해야 해.”
그는 오로지 탈출만이 목적인 사람처럼 말했다. 하긴 그렇겠지. 나도 영화를 볼 때 꼭 위험한 상황에서 고백을 하는 주인공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 말이에요, 에르셈프.”
“…….”
“좋아해요!!”
“……?”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말하던 입이 뚝 멈춘 채로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는 머리에 망치라도 거세게 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아한다구요, 에르셈프. 예전부터 좋아해 왔어요. 저를 지켜 줄 때부터, 당신에게 의지하고 싶었어요. 그런 당신이 저를 믿어 줄 때도 너무나 행복했고요.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에르셈프.”
“그, 그런…….”
“여기서 빠져나가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하는 거예요. 이 말조차 하지 못하고 죽으면 너무 후회스러울 것 같아서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눈동자를 통해 보이는 호감도의 숫자가 느릿느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97, 98, 99.
그리고 마침내…….
+
호감도: 100%
+
그토록 염원해 왔던 호감도가 100%에 달했다. 꿈꿔 왔던 숫자가 내 눈앞에 보이니 믿기지 않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리고 호감도가 100%에 달한 에르셈프의 눈빛은 벌써 애정에 가득 차 흘러넘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루나, 진심이야……? 나도 지금껏 루나를 좋아해 왔어. 이 일이 끝나면 내가 멋지게 고백을 하고 싶었는데 루나가 이렇게 미리 말할 줄이야.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그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
시공간이 멈추는 듯 주변 배경들이 굳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색깔은 바래지고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의 움직임마저 멈추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이 시공간을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뭐야!”
그리고 나 혼자만이 움직일 수 있었으며,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마구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앞에 서 있는 에르셈프는 마치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허, 헉!”
곧이어 에르셈프의 심장이 황금빛으로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더 커지더니, 일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애뮬릿?”
마름모 모양으로 된 황금빛 조각은 그의 심장에서 튀어나와 내 손에 툭 하고 떨어졌다.
[‘진짜 남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종 퀘스트 중 일부를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의 마력이 증가합니다!]
시스템 음성이 나오자 순간 멈춰 있던 시공간이 툭! 하고 풀렸다.
나는 손에 잡힌 애뮬릿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에르셈프를 향해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에르셈프?!”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나 너야말로 내 고백이 맘에 들지 않았겠지.”
그는 이 시공간이 멈추었던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어서 고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나도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해 주었다.
“아니에요. 에르셈프. 아직 당신에 대해 백 퍼센트의 확신은 없지만 당신은 이미 저에게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되었어요.”
진심이었다. 예전부터, 에르셈프가 내 수련을 도와줄 때부터, 나와 세이먼의 집을 찾아 가다가 괴한을 만났을 때부터, 같이 여관에서 묵었을 때부터 느꼈던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는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물론 그것이 사, 사랑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크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고마워, 루나. 널 내 온몸으로 지켜 줄게. 절대 네가 다치는 꼴 따위 보지 않아.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어라도 꼭 너를 지켜서 왕국으로 돌아가게 만들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무조건 같이 살아야죠. 한 명이라도 죽는 건 제가 용납 못 한다고요. 아, 그리고 에르셈프. 마력이 어느 정도 찼나 봐 봐요.”
“아직 마력이 부족할 텐데…….”
하지만 게릴리온을 손에 잡고 마력을 활성화한 에르셈프는 이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마력이 이렇게 충만하게 차 있는 거지?”
“그 정도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죠?”
“별일이 없다면 가능할 거야.”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가자는 표시를 보냈다. 그는 발을 움직이기 전에 나를 한번 붙잡고는 눈을 마주했다.
“루나, 왕국에 돌아가면, 정식으로 고백을 할게. 그때까지 죽지만 말아 줘.”
보랏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올곧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를 향해 있는 콧대도, 입술도, 그의 이마, 볼도 모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 멋진 남자가 나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벅차올랐다.
“고, 고마워요.”
나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까까진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정말로 에르셈프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나?
이리저리 헷갈리는 마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 어서 나가지.”
에르셈프가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성 뒤쪽에서 나와 숲을 건너 동상이 있는 분수대 쪽을 바라보니 여러 명의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런, 꽤 숫자가 많은데요. 힘에 부치지 않겠어요?”
“나도 오늘 처음 잡아 본 칼이라 잘은 모르겠어. 아까까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역부족일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어.”
그는 미간에 인상을 잔뜩 썼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기분에 스스로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생각보다 병사들이 강한 듯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귀 좀 빌릴게요.”
“응.”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그리고 나는 그에게 천천히 속삭였다. 주변에는 우리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굳이 귓속말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하고 싶었다.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고?”
내 말을 들은 에르셈프는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밖엔 없어요. 저 많은 병사들을 우리가 해치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알겠어.”
에르셈프는 내 말에 있어서는 고집을 부린 적이 없었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고마움까지 표시해 주곤 했다. 누구한테 배운 건지 참 바람직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럼 아무렇지 않게 저쪽에서부터 나오는 걸로 하죠.”
“우리가 마법사 망토를 입고 있다는 게 제보되었을 수도 있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그걸 이용할 거니까.”
나와 에르셈프는 숲속 뒤편에서부터 빠져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걷기로 했다. 마법사 망토는 그대로 걸친 채였다.
얼마 걷지 않아서, 마법사 망토를 본 병사 세 명이 정말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손에는 창을 든 채, 무장한 상태였다. 뾰족한 창을 보니 자칫하면 정말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감이 확 몰려왔다.
“긴장하지 말고요. 아무렇지 않게.”
나는 불안한 마음에 괜히 에르셈프를 향해 속삭였다. 그리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는데, 그는 어느 때보다 엄청난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었다. 내가 걱정할 건 아니었구만.
“검문이 있겠습니다. 현재 왕궁 내부에 신원 미상의 침입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병사들은 우리에게 마법사 망토의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 순순히 모자를 벗은 나와 에르셈프는 실시간으로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이에요! 어서!”
“이제부터 나와 이 여자를 빌렌과 체이스라고 명한다. 저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러자 순식간에 그들의 눈동자가 혼탁해지더니 힘없는 입술로 우리에게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빌렌 님, 체이스 님.”
“그럼 어서 가 봐.”
병사 셋은 바로 등을 돌리더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신원을 확인했냐고 묻는 듯한 다른 병사의 질문에 그들은 우리가 시킨 대로 대답한 것 같았다.
“휴, 다행이다. 이제 빠져나갈 길만 남았군요.”
“어서 나가자.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의심을 받을 게 뻔해.”
나와 에르셈프는 빠른 걸음으로 분수대를 지나 성문 앞으로 나갔다. 아까 보았던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보내 주었다.
“하. 진짜 심장 떨려서 죽을 뻔했네.”
무사히 왕궁을 빠져나온 우리는 성벽 옆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직도 기절해 있는 진짜 빌렌과 체이스를 볼 수 있었다.
“깨울까요?”
“아니, 스스로 깨어나게 놔두지.”
우리는 마법사 망토를 벗어 그들의 몸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
“이제 배만 무사히 타면 아무 문제 없어.”
나와 에르셈프는 다시 마차를 잡고 항구로 향했다. 왕궁에서 일어난 일들은 바깥으로 퍼지면 백성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입막음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항구에서 우리를 잡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여기 있소. 잘 부탁하오.”
저번처럼 금화 한 주머니를 직원에게 넘겨준 에르셈프는 나를 데리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 배 안쪽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이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성공했어요. 정말로 우리가 성공했다고요.”
참을 수 없이 기뻤다. 짜릿한 쾌감이 몰려올 정도였다. 에르셈프의 평생의 염원을 내가 도왔다는 것이 엄청난 뿌듯함을 가져왔다. 게다가 애뮬릿까지 얻지 않았는가.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왕국으로 돌아가면 말하고 싶었는데…….”
그는 배 구석에 나와 같이 앉아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계속해서 뜸을 들였다.
“못 참겠어.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다고.”
밤에 오가는 배여서 그런지 배 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적었다. 그것도 다들 바깥에 나가 있기 마련이었고 우리처럼 내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부우우웅.
배가 움직이는 소리와 거센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닷물의 짠 내도 조금씩 올라오는 것 같았다.
횃불로 밝혀 놓았기에 내부는 어두컴컴했고, 나는 그 불에 의지해 에르셈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러자 에르셈프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망설임조차 없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와 결혼해 줘, 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