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35)화 (135/156)
  • 134화. 베라일 공국(5)

    “윽!”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한 남자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동시에 나를 향한 에르셈프의 호감도가 올랐다.

    +

    호감도: 96%

    +

    “꺅!”

    데구르르 구르는 프로티칸의 머리통에 나는 저절로 비명을 꽥 질렀고, 에르셈프는 다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해야 해.”

    “주, 죽었어. 죽었다고요…….”

    “어쩔 수 없었어. 너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다리를 잘랐으면 과다 출혈로 네가 먼저 죽고 말았을 거야.”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애써 프로티칸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자 귓가엔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압 혹은 죽음’ 서브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보검의 위치’ 퀘스트 기회가 3회 추가됩니다!]

    그리고 시야 위쪽엔 또다시 서랍 세 개의 그림이 떠올랐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난 뒤 아직 닫혀 있는 일곱 개의 서랍 앞으로 갔다. 기회는 세 번뿐.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열게요.”

    멀리서 잠자코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에르셈프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내 눈높이에 있는 서랍 하나를 벌컥 열었다.

    “……!”

    실패다. 서랍 그림 하나가 지워졌고, ‘게릴리온’은 없었다.

    “그 어떤 단서도 없단 말이야? 그저 운이라고?”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또 다른 서랍들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외관으로 알 수 있을 만한 차이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르셈프, 에르셈프가 와서 골라 봐요. 당신이라면 ‘게릴리온’의 기운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에르셈프가 가까이 다가왔고, 층층이 쌓인 서랍 앞에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게릴리온’의 기운을 느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이 두 개 중 하나일 것 같아.”

    그리고 두 개의 서랍을 동시에 골랐다. 이 두 개를 전부 연다면 앞으로 남은 기회는 없어진다. 그래도 에르셈프의 감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단서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망설임 없이 두 개의 서랍을 벌컥 열었다.

    드르륵!

    “기운이 느껴져……. 이건 분명 선대 왕들의 힘이 분명해.”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에르셈프는 아닌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열린 서랍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보랏빛 보석이 박힌 커다란 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야. 이게 ‘게릴리온’일 거야.”

    [‘보검의 위치’ 서브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게릴리온’을 획득합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말 이건 ‘게릴리온’이 확실한 것 같았다. 에르셈프는 손으로 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표정을 보니 벅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왕자의 증표를 잃어버렸다가 이제야 찾은 셈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제 나가야 해요.”

    회상에 잠겨 있는 듯한 에르셈프의 팔뚝을 붙잡고 내가 말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였다.

    “정말 산 넘어 산이로구만.”

    한숨을 푹 쉬며 출입문 앞으로 걸어갔다. 피를 흘리고 있는 프로티칸의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때마침 퀘스트가 도착했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

    # 제4 서브 퀘스트(5/6)

    제목: ‘게릴리온의 힘’

    내용: 게릴리온이 가진 마력을 통해 병사들을 조종하여 무사히 성 밖으로 빠져나오시오.

    제한 시간: 1시간

    보상: 탈출

    페널티: 사망

    +

    “게릴리온이 가진 마력……?”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에르셈프도 게릴리온을 손에 든 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힘이 느껴져. 나를 감싸는 듯한 엄청난 마력이야.”

    “평소에 쓰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가요?”

    “완전히 달라. 온전히 나에게로 흡수되고 있어.”

    그의 말마따나 에르셈프의 얼굴빛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정말로 엄청난 마력이 그를 보호하는 것처럼 투명하고 빛나는 힘이 그의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힘으로 남들을 조종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걸 통해서 탈출하도록 하죠.”

    “조종할 수 있다고?”

    “마침 왔네요. 한 번 해 봐요.”

    에르셈프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을 때였다. 출입문 밖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대장님! 안에 계십니까!”

    프로티칸을 찾으러 온 병사인 것 같았다. 나는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가 잠금장치를 푼 뒤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

    내가 무표정을 한 채 아무 말이 없자 병사는 오히려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그리고 에르셈프가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릴리온을 병사에게 겨눈 뒤 천천히 입을 떼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불어.”

    그러자 병사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혼탁해졌다. 예전에 잰퓨어의 여동생이 대사제에게 정신 공격을 당했을 때와 똑같은 형태였다.

    “바깥에선 비상사태가 걸렸습니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고 원래의 출구를 통해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바깥 복도로 나가서 걷다 보면 창고가 하나 더 나오는데 그쪽 창문을 통해서 나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병사는 정말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술술 불었다. 고작 칼을 겨누었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이 걸리다니,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나한테도 이걸 쓰는 건 아니겠지?

    “정신을 잃어라.”

    에르셈프의 말에 병사는 픽, 하고 꺾인 나무처럼 쓰러졌다.

    “이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보검이었다니. 베라일 공국은 이런 무기를 가지고도 왜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거죠?”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보검의 경우엔 맞는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올바른 주인을 찾은 게릴리온은 이제야 진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르셈프 또한 완벽한 무기를 만났다는 듯 표정이 아주 좋았다.

    “나가지.”

    방 밖으로는 두 갈래 길이 있었고, 한 갈래 길은 우리가 들어온 쪽이었다. 그곳에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나머지 한 갈래는 얼마 안 가 벽으로 막혀 있는 길이었다.

    “이곳으로 가면 창고가 하나 나온다는 거지, 아, 저건가 보군.”

    그리고 우리는 살금살금 빠져나와 창고 앞으로 갔다.

    “뭐야, 암호가 걸려 있잖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병사들이 올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반대쪽 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살핀 뒤 암호를 어떻게 풀지 고민했다.

    “젠장, 우리가 베라일 공국의 비밀 창고의 암호를 알 리가 없잖아.”

    “…병사 하나를 끌고 오죠.”

    “병사?”

    “아까 기절시킨 병사 있잖아요. 걔한테 불라고 하는 거죠.”

    에르셈프와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걸어가 비밀 무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앞으로 갔던 병사 하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병사들 무리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 예상할 것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행동하는 게 중요했다.

    “야, 일어나. 정신을 차리라고.”

    에르셈프가 게릴리온을 겨눈 뒤 병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병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있는 상태에서만 말을 듣나 봐요.”

    “이런, 어쩌지.”

    “다른 병사를 이용해야겠어요.”

    “무슨 수로!”

    “게릴리온의 효과가 어디까지 가는지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요.”

    나는 에르셈프의 팔뚝을 잡은 뒤 원래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를 향해 걸었다. 이곳으로 걸어가다 보면 분명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이 보일 것이다.

    “적어도 열 명, 아니 많으면 스무 명까지 있을 수 있어요.”

    “설마 그 많은 사람들을 조종하라고?”

    “네. 할 수 있을 거예요.”

    에르셈프는 어렵다는 투로 말했지만 발걸음은 시원시원했다. 마음 한편엔 자신도 칼의 효과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있다! 저기에 침입자가 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은 우리를 발견했다. 에르셈프는 침착한 얼굴로 칼을 겨누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내 명령을 들어라.”

    열 명의 병사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게릴리온의 마법에 온전히 먹혀 버렸다. 순식간에 혼탁해진 눈동자로 에르셈프를 바라보더니 하나같이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오른편 길목에 있는 비밀 창고의 암호가 무엇이지?”

    에르셈프가 가장 앞에 있는 병사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입을 열었지만, 입에서 나온 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였다.

    “우읍, 읍, 으윽…….”

    마치 누군가 억지로 입을 봉쇄해 놓은 것처럼 그의 입술이 막혀 열리지 않았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입을 막는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건가?

    “너, 이리로 와라.”

    에르셈프는 한 명의 병사를 자신의 쪽으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비밀 창고 앞까지 데려간 다음, 암호를 풀도록 명했다.

    “풀어.”

    그러자 병사는 힘없는 손을 휙 들어 잠금장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을 위로 돌리고 아래로 돌린 뒤 움직이자 철커덕, 하고 문이 열렸다.

    “좋았어. 고맙군, 그래.”

    에르셈프는 짧은 인사를 남긴 뒤 나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앞에 작게 나 있는 창문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와장창!

    에르셈프는 거침없이 창문을 깼고, 그 사이로 내가 먼저 나가기를 권유했다.

    “다리를 잡아 줄게. 어서 나가.”

    그가 자신의 어깨에 내 발을 올리도록 했다. 나는 왕자님을 발로 밟는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 밖으로 나가자 성 뒤편이었다. 보이는 것은 성벽뿐이었고 우릴 찾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에르셈프! 어서요!”

    그리고 에르셈프가 마저 빠져나왔다. 우리는 풀숲에 서서 이 성벽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 고민했다.

    “정문은 막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개구멍이라도 찾아야 하나?”

    “맘 같아선 게릴리온으로 다 조종해 버리고 싶지만 마력이 부족해졌어. 아까 열 명을 한 번에 잠재운 게 타격이 컸나 봐.”

    덧붙여 에르셈프는 체력에 비해 마력이 모자란 편이라고 말했다. 하긴 기사인 걸 생각해 보면 마력이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은 게 당연했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퀘스트다!”

    “응?”

    “아, 아니에요.”

    때마침 퀘스트가 내려왔고, 나는 재빨리 확인했다.

    이 베라일 공국 침입 작전은 이 퀘스트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인 것이나 다름없어……!

    +

    # 제4 서브 퀘스트(6/6)

    제목: ‘애뮬릿을 얻어라’

    내용: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의 마음을 쟁취해 그의 애뮬릿을 얻어 내시오.

    제한 시간: 없음

    보상: 마력 증가

    페널티: 없음

    +

    이런 미친……!

    탈출물을 찍다가 갑자기 로맨스 영화가 등장하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퀘스트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에르셈프의 호감도도 확인했다.

    +

    호감도: 96%

    +

    고작 4%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내가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4%를 올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100%가 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잖아! 아니, 우리가 지금까지 벌인 일로 따지면 전쟁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퀘스트는 제한 시간도, 페널티도 없었다. 그러니 애뮬릿을 얻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언제가 되었든 그의 애뮬릿은 얻어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루나, 왜 그래. 정신을 어따 둔 거야.”

    아무것도 알 턱이 없는 에르셈프는 순진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내가 비치는 맑은 눈망울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것은 이것밖에 없겠지.

    나는 분위기를 잔뜩 잡은 채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에르셈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웃긴 걸 알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