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34)화 (134/156)

133화. 베라일 공국(4)

프로티칸은 아주 아무렇지 않은 몸짓으로 에르셈프의 칼날을 피했다. 그 정도는 눈에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성격이 급하시군. 어머니라 하는 거면 수년 전에 죽은 테일트 왕비를 말하는 건가?”

“어디 감히 왕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지!?”

“에르셈프, 잠깐만요! 너무 흥분……!”

내가 그를 저지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이미 프로티칸을 향해 몸을 날린 상태였다.

캉!

두 개의 장검이 교차하며 파르르 떨렸다. 에르셈프는 단숨에라도 그의 목을 따 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을까? 타국의 고위 기사를 죽인다면 이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우리의 얼굴을 본 사람도 존재하고, 불가피하게 전쟁이 이루어질 것이다. 설마 게임에서 일어나는 베라일 공국과 라인하르트 왕국 사이의 전쟁이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에르셈프! 잠깐 기다려요.”

“옆에 끼고 온 여자는 누구지? 여자를 데리고 올 정도라니, 아주 웃기기 짝이 없어.”

프로티칸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에르셈프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저지에 에르셈프는 잠시 멈칫했고, 그 틈을 타 나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에르셈프가 이 기사를 죽이게 되면 베라일 공국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피해 보는 건 왕국의 국민뿐이라고요.”

“하지만 이건 내 인생을 건 복수야, 루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고.”

“에르셈프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저 기사를 죽이기 전에 칼부터 찾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는 거예요. 에르셈프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에르셈프는 인상을 거세게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원래 같았으면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그이지만, 내가 말해서 그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았다.

“죽이면 안 돼요. 그냥 ‘게릴리온’만 가지고 나간다면 침입의 문제이지만 타국의 기사를 죽이는 것은 엄연한 전쟁 선포나 다름이 없다고요. 일단 제압만 하는 거예요. 우리의 원래 목적은 보검을 가져오는 거였잖아요. 제발 제 말을 들어요.”

그러자 에르셈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마음속에선 수많은 고민들이 오가는 것 같았다.

“‘게릴리온’을 찾으러 오신 거였군? 안타깝지만 그 검을 당신들이 찾을 수 있을까? 그 전에 이 프로티칸 손에 잡혀가고 말 텐데 말이야.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타국에 몰래 들어온 것은 확실한 처형의 이유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이 자식이……!”

캉! 캉!

에르셈프와 프로티칸의 검이 계속해서 교차했다. 프로티칸 또한 고위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한 것 같았고,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제압을 어떻게 하겠다는 셈이지? 나이도 어리고 전장 경험도 짧을 네가 나를 상대한다는 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일 뿐이야. 마음을 접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의향도 있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마음이지만. 하하.”

프로티칸은 싹수없는 소리를 해대며 코웃음을 쳤다.

“루나, 네 말이 맞아. 한 나라의 왕자로서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순 없지.”

“에르셈프…….”

그리고 에르셈프는 프로티칸을 향하던 검을 물리고는 맨주먹을 날렸다. 나조차도 눈을 의심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제대로 상황을 볼 순 없었지만 프로티칸이 저 멀리 나동그라져 있는 건 볼 수 있었다.

우당탕!

“이 미친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감히 내 얼굴을 치다니. 배짱이 두둑하구나. 자고로 참된 기사라 함은 같은 수준이 아닌 상대와 겨루는 것이 아니라고 했거늘, 그 생각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군.”

“계속 입만 털지 말고 덤비시지. 공국 최고의 기사라는 사람이 입놀림만 수련했나 보군, 그래.”

그 말에 프로티칸은 큰 소리로 웃음을 내보이며 칼을 내던졌다.

“주먹으로 겨루길 원한다면 나 또한 장단을 맞춰 주마. 나도 너희들이 죽지 않는 게 진급에 있어서 더 유리하거든.”

그렇게 프로티칸과 에르셈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이 비밀 무기고 안에는 살이, 주먹이 맞닿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둘은 몸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손과 발을 겨루었다.

나는 그 상황을 보며 빠르게 샐라임을 소환하려 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안내 메시지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해당 공간에서는 ‘정령 소환’이 불가합니다.]

비밀 무기고인 만큼 정령으로 도난당하지 않도록 수를 써 놓은 것 같았다.

“젠장!”

샐러맨더와 카사도 쓸 수 없는 노릇에 나는 어떻게 에르셈프를 도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퍽! 퍽! 퍽!

그들은 계속해서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에르셈프도 적지 않게 얼굴을 얻어맞았고, 예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곤죽이 된 쪽은 프로티칸이 심했다.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며 핀치에 몰렸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실력이 꽤 쓸 만하군! 이런 전사가 고작 라인하르트 왕국에 있다는 게 아까울 정도야.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 커헉!”

“입 좀 작작 놀리지?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큭, 크큭……. 너는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야……. 네 약점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긴장감 자체가 생기지 않는걸.”

그렇게 지껄인 프로티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순식간에 허공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고, 길이가 쫙 길어지며 내 몸을 휘리릭 휘감았다.

“채찍!”

쇠사슬 채찍을 던져 내 몸을 제압한 프로티칸은 자신 쪽으로 나를 확 끌어당겼다.

“악!”

단숨에 나는 프로티칸이 있는 쪽으로 몸이 날아가고 말았다.

“큭……. 이 계집년이 바로 네 약점이지? 성질머리 더럽다고 소문난 왕자님께서 이 계집애 한 마디에 쩔쩔맬 정도면 보통 사이가 아닌 듯한데? 응?”

프로티칸은 나를 뒤에서 제압한 뒤 허리춤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 목에 갖다 대었다.

“……!”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수틀리면 바로 그어 버릴 거니까.”

“루나!!!”

에르셈프는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

호감도: 87%

+

내가 제압당한 모습을 보며 그의 호감도가 올랐다. 역시 일촉즉발의 상황이 호감도를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되는……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내가 당장 죽게 생겼잖아!

“당장 그녀를 놓지 못해? 참된 기사 운운하던 사람이 여자를 인질로 잡다니 수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닌가?”

“너희 왕국에서는 기사도 정신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공국에서는 오로지 승리만이 주된 목표지. 승리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 것이 우리의 태도다!”

“루나, 루나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다칠 거야.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에르셈프……. 저는 괜찮아요. 에르셈프만 믿고 있을게요.”

나는 속으로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프로티칸은 칼을 목에 들이댔지만 쉽게 그으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프로티칸을 죽이지 말고 제압만 하라고 하다가 오히려 인질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악화될 때까지 악화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퀘스트의 내용에 따라 에르셈프가 프로티칸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뭐지?”

에르셈프가 프로티칸을 향해 물었다.

“네가 해야 할 건 없어. 어차피 곧 있으면 병사들이 들이닥칠 테니까.”

“……!”

“이미 통신구를 통해 비상 상태를 선포했다. 너희들은 이미 덫에 걸린 쥐나 다름없어.”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프로티칸이 혼자서 여기로 와서 아무런 통신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 그때까지 심문이나 해 볼까?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

“…….”

“하나라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간 이 여자의 목숨이 날아갈 거다. 아니, 적어도 치명상이겠지. 평생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도 괜찮으려나?”

“…배를 타고 왔다. 표 검수원을 매수했어.”

“이 성안엔 어떻게 들어온 거고, 이곳에 ‘게릴리온’이 있는지는 어떻게 안 것이냐. 이 정보는 기밀 중에서도 1급 기밀인데. 정보를 판 자가 누구지?”

“알 수 없다.”

“하,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이 년의 성대 정도는 그어주마.”

그리고 프로티칸은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내 목을 그었다.

“!!!”

“나는 정말 알지 못해!!! 멈춰!!”

뚝뚝, 핏방울이 흘렀다. 하지만 베인 정도로만 그었을 뿐이었고 몹시 따갑긴 했지만 이전에 히아신스가 나에게 그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였다.

“이런 젠장…….”

에르셈프는 내가 다쳤다는 것에 좌절하며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

호감도: 92%

+

호감도가 90%대에 들어서자마자 에르셈프의 눈빛이 확연하게 바뀌었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인질로 붙잡혀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것만 같았다.

“제, 제가 알아요. 에르셈프는 정말로 모른다고요. 제가 데리고 온 거예요.”

나는 내 뒤에 바싹 붙어 있는 프로티칸을 향해 말했다.

“네가 정보를 캤다고? 무슨 수로 가능했던 거지? 첩자가 있다면 당장 이름을 불어라.”

“…….”

“당장 말 안 해?”

“말, 말할게요. 당신네 병사들 중에 주황색 머리를 가진 채 귀가 뾰족한 소년이 있어요. 그에게서 정보를 산 거예요.”

“주황색 머리에 귀가 뾰족한 소년……?”

“네. 맞아요.”

“지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계집년 따위가 감히 나를 속이겠다고?”

“정말이에요. 정말 믿어 주세요.”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에게 애원했다. 물론 주황 머리에 귀가 뾰족한 소년이라는 정보는 전부 거짓말이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프로티칸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인지 코웃음을 쳐 댈 뿐이었다.

“네년의 목소리는 중요한 듯하니 다리나 하나 없애야겠군.”

그러고는 뒤쪽에 떨어져 있던 장검 하나를 다시 들어 올렸다.

“사실이에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정말로 병사들 중에 그런 사람을 가서 찾아보세요.”

“내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 주지.”

“…….”

“우리 왕실 기사단은 말이야. 베라일 공국에서 태어난 순혈 혈통의 남자들 아니면 뽑지 않아. 그리고 베라일 공국에서는 절대 뾰족한 귀의 남자가 나올 리가 없지. 귀가 뾰족하다는 것은 몬스터와 피가 섞였다는 것이고, 우리는 순혈 혈통만을 고집하니까.”

“……!”

“네년이 얼마나 바보 같은 거짓말을 쳤다가 들킨지 이제야 알겠나?”

“사실, 사실을 말할게요!”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프로티칸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그런 말은 다리 하나를 없앤 상태에서 하지 그래.”

그리고 포물선을 그린 장검은 내 다리를 향해 다가왔고, 에르셈프가 프로티칸을 향해 몸을 던진 건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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