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베라일 공국(2)
그는 아주 침착했다. 정말 마법사를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인 것 같이 연기했다.
에르셈프와 나는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성벽 끝으로 갔다. 나무 그늘 때문에 우리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고, 에르셈프는 순식간에 그들의 목 뒤를 쳤다.
“억!”
“으억!”
무릎이 풀린 그들은 바닥으로 쓰러지며 기절했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마음에 에르셈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
[‘병사 구워삶기’ 서브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입구 통과’가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힘없이 쓰러져 있는 마법사 두 명을 한 번 본 뒤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입죠.”
에르셈프는 쓰러진 마법사의 망토를 벗기기 시작했다. 망토는 사이즈와 관계없이 커다래서 나와 에르셈프가 뒤집어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잘 어울리나요?”
내가 망토 모자를 눌러쓰며 에르셈프를 향해 묻자 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법사로 직업을 바꾸는 건 어때?”
“이참에 그럴까 봐요.”
에르셈프와 나는 마법사들을 성벽 옆으로 끌고 가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욱여넣었다.
“미안해요, 여러분.”
그리고 성벽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아까 보았던 병사들이 여전히 서 있었기에 꽤 긴장이 되었지만 나는 퀘스트를 믿은 채 에르셈프를 이끌었다.
“금방 돌아오셨군요. 어서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은 보라색 망토를 입은 우리들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은 뒤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는 고개만 까닥 움직인 채 궁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요.”
베라일 공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동상이 있는 곳을 넘어 분수대를 지나갔다. 어두컴컴한 성 내부는 곳곳이 횃불로 밝혀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마법사 망토를 입은 우리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듯했고, 자연스러운 척을 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두 번째 퀘스트가 등장했다.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 의심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찰나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퀘스트를 확인했다.
+
# 제4 서브 퀘스트(2/6)
제목: ‘무기고를 향하라’
내용: 맵에 나타난 길을 따라 ‘게릴리온’이 있는 비밀 무기고를 향하시오.
제한 시간: 15분
보상: 무기고 잠금장치 해제
페널티: ???
+
“무기고로 향하라고…….”
퀘스트 창을 끄자마자 내 눈에 펼쳐지는 것은 익숙한 분홍색 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쪽 상단에 15분의 제한 시간이 떨어지는 타이머가 떠올랐다.
“어서 이리로 와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대체 어딜 향해 가는 거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그럼요. 제가 괜히 에르셈프를 여기까지 끌고 왔겠어요.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분홍색 라인이 그려진 길을 따라서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15분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임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조용한 성 내부엔 우리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가장 우측 편에 있는 성을 끼고 돌아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더욱 다니지 않는 작은 길이 나왔다. 주변은 온통 나무와 풀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도 예쁜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꽤 거리가 되잖아.”
분홍색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무기고이기에 야외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길은 우리를 성안 쪽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이 쪽문으로 들어가라고?”
에르셈프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이 안으로 들어가면 무기고가 하나 나와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지금 저를 의심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한시가 급해요, 한시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에르셈프는 자꾸만 나에게 적절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무려 보상이 ‘무기고 잠금장치 해제’였다고. 그리고 페널티가 ‘???’ 였고. 그렇다면 제한 시간 안에 무기고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잠금장치를 못 풀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러면 거기서부터 또 일이 발생한다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쪽문을 열었다. 나무로 된 쪽문은 비상시에만 쓰는 문 같았고, 문을 열자 돌벽으로 사방이 막힌 좁은 복도가 나왔다.
“제가 앞장설게요.”
여전히 에르셈프의 한쪽 손을 잡은 채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코너를 돌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하나 일렁이더니 갑옷을 입은 병사 한 명이 등장했다.
“……!”
병사는 보라색 망토를 둘러쓴 나와 에르셈프를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마법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일반 병사들도 잘 오지 않는 퀴퀴한 창고인데 말입죠.”
“…….”
“마법사님들은 이쪽에 전혀 안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봅니다? 다들 이곳에 오기를 왜 그렇게 꺼리는지 모르겠어요.”
당황한 나와 에르셈프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자, 병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째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차, 싶어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했다. 그래서 입을 여는 순간, 에르셈프가 나와 잡았던 손을 툭, 놓더니 자기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너는 누구냐.”
에르셈프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속으로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완전 왕자님 같은 말투잖아! 본인이 왕궁에 있을 때 남을 대하듯이 말을 꺼내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병사는 갸웃거리던 고개를 똑바로 하더니 헤헤, 하고 웃었다.
“아, 제가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저는 오늘 신입 병사로 배정된 나탈리온이라고 합니다. 다들 제가 맘에 안 드시는 건지 처음부터 여기로 가라고 저를 배정하시길래 입 꾹 다물고 보초나 서러 가고 있었죠.”
“그렇군. 처음 보는 얼굴이라 경계했다. 미안하네.”
그러자 나탈리온은 우리를 향해 마구 손사래를 쳤다.
“아유, 아닙니다. 제가 먼저 마법사 나리님들께 인사를 올리지 못한 탓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
내가 온몸이 경직된 상태로 나탈리온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마법사님들은 다들 깐깐하다고 하시던데 이렇게 먼저 사과를 해 주시는 걸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나불나불 잘도 혼자서 말을 해 대는 것이다. 왠지 그가 왜 다른 병사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바로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나는 시야에 놓인 타이머를 한 번 확인한 뒤 에르셈프의 옷깃을 흔들었다.
‘07:45’
십 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자 에르셈프는 근엄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내뱉었다.
“바쁘니 먼저 가도록 하지.”
그러자 나탈리온은 바로 자리를 비키며 길을 터주었다.
“그럼요! 어서 가시지요. 제가 귀한 시간을 뺏었군요. 조심히 가십시오.”
나와 에르셈프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지나쳤다. 곧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뭐야, 나탈리온. 하란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코너에서 덩치가 커다란 병사 한 명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동공이 터질 듯이 확장되며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음?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덩치가 커다란 병사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며 우리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려 했다.
나는 놀란 마음에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나도 그대를 처음 보는군. 이곳의 마법부로 발령받은 루시아나다.”
“에리칼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자 병사는 표정을 바로 풀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1소대 대장 마히클입니다. 이런 곳이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반갑네.”
“나 또한.”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한 우리는 다시금 마히클에게 고갯짓을 하며 이만 가 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고생하십시오.”
“그대도.”
그렇게 나와 에르셈프는 눈치를 보며 마히클의 옆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일방향인 복도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아,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마히클이 우리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죠?”
“이 내부는 업무에 할당된 병사들을 제외한 인원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나탈리온, 방문자 명단은 작성한 거야?”
“아, 아뇨. 잊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식이, 잘하라니까. 루시아나 님, 에리칼 님. 여기에 방문자 명단을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마히클은 우리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받은 뒤 가명을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히클이 갑자기 눈썹 한쪽을 찡긋 올리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희가 사전에 방문 예정자 정보를 들은 적이 없는데……. 정말 이곳에 오기로 하신 거 맞으십니까?”
자꾸만 마히클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며 우리를 막아섰다.
그리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타이머를 보았다.
‘03:25’
삼 분 남짓한 시간. 여기서 분홍색 길이 얼마나 더 나올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들을 어떻게든 따돌리고 갈 길을 갈지, 아니면 이들을 납득시킨 뒤 ‘???’인 페널티를 받을지.
하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페널티와 함께 이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니 나는 이렇게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에리칼.”
그래서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단번에 마히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고작 한 방으로 그가 쓰러질 줄은 몰랐는데 마히클은 퍽!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겁에 질린 나탈리온만이 우리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에르셈프가 한 번 더 주먹을 날렸다.
‘01:53’
이제 남은 시간은 약 이 분. 우리는 마법사 두 명, 병사 두 명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동안 필사적으로 달려서 비밀 무기고로 향해야만 했다. 이 사람들이 깨어나서 무슨 일을 벌이건 간에 우리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건 퀘스트가 하라는 지시일 뿐이었다.
“어서 가요! 빨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는 에르셈프를 붙잡고 다시 달렸다. 제발 다른 사람이 또 나타나지 않기를 빌며 정신 없이 분홍색 라인을 밟으며 뛰었다.
“저기다!”
저 멀리서 분홍색 라인이 끝나는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아주 커다란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제발!”
‘00:09’
약 십 초를 남긴 채 우리는 그곳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잠금장치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손에 잡았다. 동시에 시야에 잡히는 어렴풋한 타이머를 볼 수 있었다.
‘00:01’
그리고… 나는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