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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31)화 (131/156)

130화. 베라일 공국(1)

예상한 대로 레크리드의 집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오른 호감도와는 달리 그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침이 되고,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재워 줘서 고마웠어요. 절 구해 준 것도요. 덕분에 발 뻗고 잘 수 있었어요.”

“뭘요.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앞으로는 혼자서도 몸조심 잘 해야 해요.”

“알겠어요.”

나는 그와 악수를 한 뒤 그의 집을 나섰다.

에르셈프를 만나야 했다. 그와 약속한 장소인 광장으로 가자 에르셈프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잊지 않고 나왔군. 까맣게 잊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럼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그와 나는 말을 이어 나가며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내가 잘 지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지냈지? 잘 지낸 거야? 얼굴이 핼쑥한데. 밥이라도 못 먹고 다닌 사람처럼.”

“하하……. 별일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이런저런 일들이 좀 있었어요.”

베탄과 병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본 일, 잰퓨어와 함께 ‘케이오스’ 본거지에 들어가 여동생을 구한 일, 세이먼에게 납치를 당해 레크리드가 구해 준 일이 있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에르셈프를 굳이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나로 인해 분노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괜찮은 거야?”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느샌가부터 내가 에르셈프의 감정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나로 인해서 부정적인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발을 맞춰 걷던 도중 나는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유려한 얼굴선과 오뚝 솟은 코가 여전히 남성스럽게 근사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안심이 돼요.”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에르셈프의 옆에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거든요.”

그는 누구보다 강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길을 가다가 괴한을 만나도, 칼부림이 일어나도 그와 함께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거 정말 영광이군.”

언제나 나를 지켜 줄 것만 같은 든든함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안심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 줄게.”

에르셈프 또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처럼 민망해 보이지 않았다. 진심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름: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

나이: 18

직위: 비젠티아 왕실의 제3 왕자

호감도: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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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게이트에 도착했다. 우리는 게이트를 타고 항구로 가야 했고, 거기서 배를 타고 베라일 공국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라일 공국까지 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따라서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은 어두운 밤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아직도 의문이 들어. 이 일에 루나 너를 개입시키는 게 맞는 건지. 하루에도 몇번이나 생각이 바뀌거든. 자칫 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돼. 그게 나로 인한 거라면 내 자신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수차례 말했지만 이건 제 의지로, 스스로 하는 일이에요. 꼭 이뤄 내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제 손으로 에르셈프를 도울 수만 있다면 전 너무나도 기쁠 것 같아요.”

내 말에 에르셈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나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온기 어린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감겨 왔다.

“가요. 어서. 그리고 고민하지 마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 * *

에르셈프는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온종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배 안에서도 혹시나 신분이 노출될까 봐 최대한 말수를 줄이고 죽은 듯이 숨어 있어야만 했다.

지루한 바닷길 여정이 끝나고, 해가 전부 떨어졌을 때 베라일 공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구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밟는 통로에 들어가자 에르셈프가 자연스럽게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고는 우리의 차례가 되자 심사국 직원의 옷깃 안에 금화 주머니를 슬쩍 넣어 주었다.

“…부탁하오.”

심사국 직원은 주머니 안의 금화 양을 확인하더니 주변을 한번 살폈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들어가시오.”

나와 에르셈프는 로브의 모자를 끝까지 눌러쓴 뒤 통로를 빠져나왔다. 걸어 나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에르셈프 또한 엄청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태연하게 베라일 공국 출신인 척을 하고 있었다.

“연기력이 뛰어난데요, 에르셈프.”

“표정 관리를 하는 건 왕궁에서 태어나서부터 지겹도록 해 왔지.”

나와 에르셈프는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는 마차를 잡았다. 에르셈프는 마부에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했는데, 아마도 베라일 왕궁으로 가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카리브 제국의 언어군요. 원래 할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 배웠지. 유학도 갔다 왔고. 하지만 두 번 가고 싶지는 않아. 그곳 사람들은 특유의 체취가 고약하거든. 그곳에 비하면 라인하르트 왕국의 사람들은 양반인 셈이지.”

“신기하네요. 에르셈프에게선 항상 좋은 향이 나는데요.”

“…….”

에르셈프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느꼈던 것이었다. 라벤더 향이 섞인 미묘한 살 내음이 항상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나에게서 향이 난다고? 매일같이 훈련을 해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에요. 정말 좋은 향이 나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있는 에르셈프의 어깨에 코를 갖다 대었다.

“…….”

킁킁,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에르셈프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빛을 달리했다.

+

호감도: 77%

+

“네 향도 맡고 싶어.”

그리고 에르셈프는 갑자기 내 양어깨를 부여잡더니 목덜미에 자신의 고개를 묻었다. 아무리 마차 안이고 우리 둘만 있다고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아, 간지러워요.”

코를 박고 내 목을 탐하는 그는 마음껏 내 향을 느낀 뒤에야 고개를 떼었다.

“저, 저리 가요. 뭐 하는 거야, 정말.”

내가 그의 어깨를 밀치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띤 채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밤새 맡고 싶군.”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냐. 도착한 모양이네.”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온 에르셈프가 내게 말했다. 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나는 그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상 딱딱한 표정만 짓는 그가 나를 보며 웃자 마음이 묘해지는 것 같았다.

“왜 웃어요. 적진에 들어가는 건데.”

괜스레 어색해진 내가 꿍얼대자 그가 대답했다.

“로맨틱하지 않나. 같이 손잡고 지옥에 들어가는 건데.”

“손은 안 잡았거든요.”

그러자 그가 내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의미였다. 나는 눈을 흘기며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이끌었다.

왕궁의 근처에서 내린 우리는 멀리서 입구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각이 잡힌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쉽게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을 각도로 왕궁 근처에 가까이 다가갔고, 특정 반경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한 대로 시스템의 알림이 들렸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

# 제4 서브 퀘스트(1/6)

제목: ‘병사 구워삶기’

내용: 입구를 철통 보안으로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이용하여 ‘마법사’를 만나기.

제한 시간: 없음

보상: 입구 통과

페널티: ???

+

퀘스트가 장소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성석을 이용해 소원을 빈 다음부터는 퀘스트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에르셈프, 저를 따라와요. 이제부터는 제가 이끌게요.”

내가 자신 있게 말하자 에르셈프가 탐탁지 않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신분을 밝혀라.”

외부인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쓴 에르셈프를 뒤에 둔 채 그들에게 말했다.

“안에 들어가려는 건 아니고요. 잠시 만날 사람이 있는데 도무지 나오질 않아서요.”

“누굴 만나려는 겁니까?”

“입구에서 ‘마법사’ 님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자 내 말을 듣던 병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내 모습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잠시 대기하시오.”

병사는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옆에 있는 병사에게 귓속말을 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수상한 자 같습니다. 행색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저 뒤에 있는 키 큰 남자가…….”

병사의 귓속말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대로는 실패잖아. 이러다가 수상하다는 이유로 붙잡히기라도 하면 끝장인데, 설마 그렇게 붙잡혀서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는 별생각을 다 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도망갈 타이밍을 잡아야 하는데……!

그때, 병사들 뒤에서 다른 병사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팔에 완장을 찬 것이 문지기들보다는 계급이 더 높은 것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마법사’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완장을 찬 병사는 눈을 심드렁하게 뜨며 ‘아’ 소리를 냈다.

“체이스 님과 빌렌 님을 말하는 거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던데 이 자들인가 보네. 내가 불러오도록 하지.”

그의 말에 나는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저 완장 찬 병사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붙잡힐 수도 있었던 노릇이었잖아!

“그럼 부탁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나 성벽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난 여전히 초조했다. 마법사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퀘스트가 그것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는데…….

곧이어 보라색 망토를 뒤집어쓴,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남자 둘이 성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는 듯했다.

병사들이 저쪽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 것 같았고, 마법사들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에르셈프, 어쩌죠? 뭐라 말할지 생각을 안 해놨어요.”

“뭐? 미리 다 생각해 놓은 것 아니었어?”

그가 속삭이자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쯤 되면 퀘스트가 또 내려올 줄 알았지!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마음으로 에르셈프의 옷깃을 꾹 잡았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가.

“안녕하시오. 물건은 준비되었소?”

마법사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자마자 물었다. 그것이 본래의 목적인 것 같았다.

그러자 에르셈프가 내 앞으로 불쑥 나서며 그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물건은 이쪽에 있소. 나를 따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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