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검은 방(4)
레크리드는 나를 업고 배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배 입구에서 지키고 있던 안내원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이번에도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을 할 뿐이었다.
“저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요. 여기는 너무 위험해요. 루이아나 씨를 어떻게든 찾으러 올 거예요.”
“잠시만요.”
길을 따라 뛰어가고 있는 레크리드를 향해 나는 잠시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레크리드가 나를 구하러 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꼼짝없이 세이먼에게 잡혀 노예처럼 살아야 할 수도 있었던 내 미래를 바꿔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갈 수는 없었다. 도저히 마음에 걸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다시,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야 한다뇨?”
“제나가 있어요. 제나는 저 때문에 죽었어요. 그녀의 시신이라도 가져가야 해요.”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제나의 말간 얼굴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자 레크리드는 군말 없이 나에게 말했다.
“지시해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철창에 갇힌 채로 이곳을 왔기에 길을 알고 있었다. 레크리드의 등에 업힌 채로 그에게 지시하자 그가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이먼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어요. 만약 아직 있다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다시 붙잡힐 수도 있고요.”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내가 붙잡혀 있던 세이먼의 아지트에 도착하자 레크리드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서요.”
나는 그를 재촉했고, 우리는 목재로 이루어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꾸만 손이 떨려 왔지만 이를 꽉 문 채 검은 방을 찾았다.
“제나!”
검은 방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엔 아무도 없었다. 제나는 축 늘어진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레크리드의 등에서 내려 간신히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이제는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미안해. 정말, 너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제나의 손을 부여잡았다.
“괘…괜찮…아요…….”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제나가 목소리를 낸 것이다. 간신히 벌린 입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제나의 것이었다.
“살아 있었어!”
“끄윽…….”
그녀의 배에선 피가 많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들어 올려 레크리드에게 부탁했다.
“부축해 줄 수 있겠어요? 부탁해요.”
그러자 레크리드는 무거운 얼굴로 나와 제나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살리고 싶어요?”
나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지금으로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이죠! 그녀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요!”
그러자 레크리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제나를 번갈아 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는 바닥에 앉았다.
“두 눈을 감아요.”
“……?”
“여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당장 눈을 감아요. 공간을 옮길게요.”
레크리드는 말을 하며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려 주었다.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고, 제나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탁!
레크리드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았는데도 검은 화면이 핑핑 돌았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더니, 이내 평온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여긴!”
테일하트 지역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부둣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얕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병원이에요.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우리는 병원으로 텔레포트한 것이었다. 예전에 베탄이 쓰던 것처럼 레크리드에게도 마법석이 있었던 건지, 순식간에 우리는 그 소름 끼치던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제나는 급하게 수술에 들어갔고, 입원 절차를 밟았다. 다행히 늦지 않아서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했고, 치료를 받으면 무사히 나을 것이라고 했다.
나와 레크리드는 병원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하나씩 들었다.
“제가 어떻게 거기에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거죠?”
의문이었다. 내가 화물선 안에 갇혀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그런데 레크리드는 묘한 미소를 지을 뿐 알쏭달쏭한 대답을 내놓았다.
“루이아나 씨가 위험한 것 같아 보였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대체 어떻게……?”
“좋아하면 알 수 있어요. 예전에도 말했듯이, 저는 촉이 좋은 편이랍니다.”
레크리드는 샐라임이 들어 있던 검을 단번에 알아챈 적이 있었다. 이렇게 도움이 필요할 때 구하러 온 게 단지 감이었다고? 말도 안 된다. 차라리 게임 속 남주인공이어서 가능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철창은 어떻게 연 거죠? 절 묶었던 줄은요! 텔레포트한 건 이해가 된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투성이에요.”
그러자 레크리드는 음료수를 홀짝 들이켜며 대답했다.
“잊었어요, 루이아나 씨? 저는 마법 상점 주인이라고요. 마법에 관련된 모든 물건을 다루죠. 저에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랍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가 무언갈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레크리드 니엘
나이: 17
직위: 매그넘 마법 상점의 주인
호감도: 60%
+
저번에 확인했을 때보다 10%가 높았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레크리드를 다시 볼 때마다 그의 호감도는 10%씩 올라 있었다.
“루이아나 씨는 지금 몹시 위험해요. 세이먼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고요. 당분간 제 옆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레크리드의 옆에서요……?”
그의 말이 맞았다. 저번처럼 혼자 길을 걷다가 세이먼에게 납치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이먼이라는 폭탄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자칫하면 진짜 남주인공을 찾아 애뮬릿을 얻으려는 내 계획이 망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그럼 오늘만이라도 제 옆에서 지내요. 제가 옆에 있으면 납치당하는 위험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레크리드는 다섯 남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일을 겪고 나니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고 느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를 구해 주고, 마법 같은 걸 일으키는 그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
“그러면 오늘만 신세를 질게요.”
게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레크리드의 호감도를 올리는 것. 다른 남주인공들 중에서 레크리드의 호감도가 가장 낮았기에 나는 그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둘째치고, 나는 너무나도 쉬고 싶었다. 세이먼의 감금 아래에서 보낸 나흘은 정말 지옥 같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안색이 안 좋아요. 집으로 가서 쉬죠.”
레크리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의 손에 잡혀 순순히 그의 집으로 향했다.
* * *
레크리드의 집에 도착한 나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며칠간 제대로 잠을 못 잔 까닭이었다.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레크리드가 밥을 준비해 주었다.
“어서 들어요.”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레크리드는 딱히 말이 별로 없었고,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원래 레크리드가 이렇게 말이 없었나……? 장난기도 많고 수다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은데. 평소답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나는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밥을 꿀꺽 삼킨 뒤 나에게 물었다.
“내일은 무슨 일을 해요?”
내일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말해서인지 그가 궁금해했다. 내일은 바로 에르셈프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시스템 파괴 계획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베라일 공국에 갈 거예요.”
레크리드가 날 구해 주지 않았으면 내일 에르셈프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 이 정도는 말해 줘도 괜찮겠지 싶어서 말했는데, 내 말에 레크리드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
뭐지? 엄청 흥미로워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로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물건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죠. 잠시 남에게 뺏긴 것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일을 할 거예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위험하겠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국경을 넘어서는 어떻게 할 건가요? 물건이 숨겨져 있는 곳이 있을 텐데, 그곳으로 향하는 건가요?”
그는 확실히 내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가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네. 직접 저희 손으로 가져올 거거든요.”
“어떻게 그곳에 들어갈 건데요?”
“그거야…….”
“…….”
“몰래 침입할 거예요.”
내가 가뿐하게 대답하자 그가 하하, 하고 웃었다.
“몰래 침입한다고요?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을 텐데요?”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레크리드는 내 말에 활짝 웃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잡히면 어쩌려고요?”
“그러면… 오늘처럼 레크리드가 구해 주지 않을까요.”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레크리드가 또 한 번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역시 루이아나 씨는 재밌어요.”
“제가 재밌다뇨. 레크리드 인생이 너무 지루한 거 아녜요?”
그러자 레크리드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뇨, 저는 살면서 지금이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답니다. 멀리서 보던 것과는 천지 차이예요.”
“…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저 밥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호감도를 확인했다.
+
호감도: 70%
+
또다. 또 10%가 올라 있었다. 대체 뭐지?! 그렇게 올리기 힘들었던 호감도였다. 잰퓨어 같은 경우는 잰퓨어의 여동생을 구해 가면서 어렵사리 올렸던 호감도인데, 레크리드에게는 이렇게 쉽게 큰 폭으로 상승하니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지……?”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건지 레크리드가 대꾸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
그리고 그는 자신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 거리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이상한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하자.
나는 밥을 다 먹고 그와 함께 잘 준비를 했다.
“…기분 탓인가.”
그에게서는 예전에 같이 잤을 때처럼 나를 향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과장해서 말하면 나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거다.
남주인공도 나에게 흥미가 떨어질 수 있나? 여주인공 버프가 점점 사라지는 건가? 아니, 그럼 호감도는 왜 올라? 별생각을 다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
# 돌발 퀘스트
제목: ‘게릴리온의 행방’
내용: ‘에르셈프 카이센 비젠티아’를 도와 그가 잃어버린 보검 ‘게릴리온’을 찾아 돌아오시오.
제한 시간: 3일
보상: ???
페널티: 사망
+
기다리고 있었던 퀘스트가 왔다. 이번엔 등장하지 않는 건가, 싶었지만 역시나 도착하고야 말았다. 시스템은 내 계획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저절로 긴장이 올라왔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한 내 계획의 초장.
그 첫 번째 페이지를 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