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검은 방(3)
“날 사랑한다는 증거를 내보이라고.”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맹세하길 원하고 있었다.
“…….”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그깟 키스 한 번이 뭐라고 눈 딱 감고 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치만 그에게 마음 없는 키스를 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그를 기만하는 게 되는 것 같았다. 이미 말로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이상으로 세이먼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을 쳤다.
“허, 허. 감히 날 갖고 놀았군요?”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상관없어요. 네 의사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엔 그렇게도 온화해 보이던 얼굴이 이제는 누구보다 차가워 보였다.
“기분을 잡쳤군. 이만 가 봐야겠어.”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멀어지는 그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쿵 하고 닫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옆에 남아 있던 사용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남은 동아줄은 이 여자 하나뿐이라고.
“…부탁할게요.”
“…뭘요?”
“제발 절 도와줘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날 도와 달라구요. 뭐든지 할게요. 당신의 도움 없이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부탁합니다…….”
사용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그녀에게 먹힐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수많은 돈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할 수도 없었고,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해 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땅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을 때였다.
“내일모레, 당신을 데리고 갈 상자를 가져올 때를 노려요.”
“상자를 가져올 때……?”
“세이먼 님의 방은 이 방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서 항시 당신을 지켜볼 수 있어요. 하지만 상자를 가져올 때는 분명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가져올 거예요.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는 거죠.”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묶여서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인걸요. 게다가 줄은 마법으로 묶여 있다고 했잖아요.”
사용인은 입술을 깨물며 몇 초간 생각하더니 나에게 답을 내놓았다.
“당신의 마나를 정지시킨 약의 해독제가 있을 거예요. 만약 마나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줄을 풀 수 있어요?”
“있어요! 정령을 이용하면 무조건 가능할 거예요.”
샐라임을 불러낸다면 이깟 줄쯤은 쉽게 풀 수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세이먼을 처리할 수도 있을 거다. 마나만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된다. 모든 게……!
“세이먼 님 방에 해독제가 있을 거예요……. 그걸 가져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나는 애원했다. 그녀는 내 동아줄이 맞았다. 그녀가 성공하기만 하면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제발 부탁할게요. 제발. 한 번만 시도해 줘요.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알겠어요.”
그녀는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타이밍을 노려볼게요.”
* * *
시간은 금세 흘렀고, 사용인은 해독제를 가져오는 것에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방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항상 세이먼 님이 상주해 있어서 방을 뒤질 수가 없어요.”
“서랍 몇 개는 열어 볼 수 있었지만 해독제를 찾을 순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세이먼과 떠나기로 한 당일이 되었다. 바깥에서는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세이먼은 잠시 방에 들어와 나에게 짧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곧 떠날 거예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세이먼이 가고 머지않아, 사용인이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이먼 님이 자리를 비우셨어요! 빨리 들어갔다 와 볼게요!”
“제발……!”
그녀는 정말 자신의 일처럼 나를 도와주었다. 세이먼에게 걸리면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나를 위해서 위험한 짓까지 감행하는 것이다.
나는 엄청난 감사를 느끼며 그녀가 성공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알이 시릴 정도가 되었을 때, 문이 달칵, 하고 열렸다.
“쉿, 곧 있으면 세이먼 님이 도착할 거예요.”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는 사용인의 손에는 보라색 약병이 들려 있었다.
“성공한 거예요?!”
그러자 말간 얼굴의 사용인은 순수한 미소를 내보이며 내 눈앞에 약병을 보여 주었다.
“주머니에 꽁꽁 숨겨 놓으셨더군요. 이게 해독제일 게 분명해요. 마나를 정지시키는 약을 구하면서 해독제도 같이 받는 걸 제가 봤으니까요.”
“이런, 세상에. 감사합니다…….”
나는 감격 어린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역시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이 해독제만 먹으면 샐라임이 날 구해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천사 같은 사용인을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갈 거다.
“입을 벌리세요. 아.”
그녀가 나에게 말했고, 나는 입을 벌렸다. 보라색 액체가 내 목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미묘한 맛에 표정을 찌푸렸지만 마나만 돌아온다면 그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힘이 되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또한 마음이 떨렸다. 일 분? 삼 분이면 되돌아올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
삼 분이 지났다. 아직은 힘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마음을 급하게 먹을 것 없다. 세이먼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힘만 돌아온다면 샐라임이 무찔러 줄 수 있으니까.
“아직…인가요?”
“뭐 다른 거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몸을 움직여야 한다거나!”
“아니면 힘을 쓰려고 정신을 집중해 봐요!”
“잠시만요, 해 볼게요.”
그렇게 눈을 감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나를 모으려 정신을 집중할 때였다.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네.”
문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분명… 틀림없이 세이먼이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고, 사용인은 화들짝 놀라며 빈 병을 등 뒤로 감췄다.
“애써 감출 필요 없어, 제나. 네가 쓸모없는 녀석이라는 건 방금 알았으니까.”
“세, 세이먼 님…….”
“배신하지 않는 조건으로 적었던 계약서는 파기해도 된다고 여겨도 되겠지? 네 목숨이 나한테 달려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세이먼의 말에 제나는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급기야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깨져 버렸다.
“마나를 되돌리면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 발칙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
“세이먼.”
“제나가 수상하게 내 방을 들락거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지? 그리고 진짜 약은 나한테 있다는 생각도 전혀 못 했을 거야. 그치?”
세이먼은 여유롭게 방을 거닐며 말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있는 긴 칼을 뽑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칼끝이 제나를 향했다.
그녀는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싹싹 빌며 그에게 애원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에 젖은 목소리로 그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세이먼의 눈빛은 싸늘했다.
“루나, 너 때문에 이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
“……!”
“너를 돕지만 않았더라도 몇 년은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세이먼, 제발. 그러지 마요.”
칼이 그녀를 향하자 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굳는 것을 느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하지 말라고 빌 뿐이었다.
촤악!
하지만 세이먼은 칼을 그었고, 사방엔 피가 흩뿌려졌다. 제나는 힘없이 쓰러졌고 손가락만을 꿈틀거렸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나는 믿을 수가 없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루나를 옮겨.”
그리고 세이먼의 말에 따라 방 밖에서는 인부들이 들어왔다. 내 팔다리를 잡은 인부들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바깥으로 걸어갔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놈들아!”
나는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제나를 뒤로 한 채 바깥으로 이송되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철장으로 막힌 커다란 상자였다.
인부들은 나를 상자 안으로 처박았고, 나는 내동댕이쳐지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커덕.
문이 잠겼고, 나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채 몸만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먼! 제발 정신 좀 차려. 당신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거라고. 나를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널 사랑할 거 같아? 네가 히아신스와 다를 게 뭐야!”
나는 예전에 히아신스가 학생 식당에서 칼부림 쇼를 부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인부들에게 지시할 뿐이었다.
“배에 들어가면 지정된 위치가 있을 거야. 그쪽으로 옮겨.”
“알겠습니다.”
인부들은 상자의 모서리를 하나씩 잡고 나를 옮겼다. 이곳에서 바다는 멀지 않았고, 부둣가로 향한 그들은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나를 배 지하에 처박아 넣었다.
사람이 이렇게 버젓이 가두어져 있는데 아무도 이상한 점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길을 알려 주던 안내원도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모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나는 철장에 갇혀 지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물들이 많이 실려 있었고, 원숭이와 돼지가 갇힌 철장들도 보였다.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듦과 동시에 아까 보았던 제나의 충격적인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괴로웠다.
“젠장,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나를 마구 자책하며 몸서리치고 있었을 때였다. 내 앞에 무언가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보나 마나 세이먼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도 들지 않았고, 그가 철장을 잠근 자물쇠를 풀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루이아나 씨.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그런데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그리고 목소리까지도 달랐다. 다정했는데, 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었고, 내 시야에 담기는 누군가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울지 마요. 울어도 나한테 기대서 울어요. 이 철장부터 풀어 줄게요.”
그는 레크리드였다. 귀엽고 오밀조밀한 얼굴의 그가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자물쇠를 풀고 있었다.
어디서 열쇠를 구한 건지 잠금장치를 푼 그는 철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레크리드, 정말 레크리드가 맞아요……?”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내 팔목에 묶인 줄에 손을 댔다. 분명 마법으로 묶여 있어서 풀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레크리드가 손을 대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르륵.
마치 줄이 부서지듯 형체를 잃으며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발에 묶인 줄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걸을 수 있겠어요?”
오랫동안 묶여 있던 탓에 나는 다리를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그가 나를 향해 등을 내보였다.
“업혀요. 어서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