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검은 방(2)
세이먼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평범한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 의사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무 대회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도망치듯이 떠난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지배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나는 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구렁이에게 잡힌 무력한 토끼 같았다. 내 몸을 결박한 줄과 온통 검은색뿐인 방은 나를 더욱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건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달칵.
세이먼이 문을 열자 여자 사용인이 들어왔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세이먼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바닥을 기다시피 사용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죠? 제발 알려 줘요. 저는 여기를 나가야 해요. 여기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고요.”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바람에 횡설수설 지껄였다. 다행히 사용인은 냉정한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일으켜 세워 주며 대답했다.
“여기는 테일하트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에요. 모험가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이죠. 마차도 다니지 않기 때문에 여길 빠져나간다고 해도 걸어서 마을로 돌아가긴 힘들 거예요.”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단념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식사를 가져올게요.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거예요.”
방을 빠져나간 그녀는 곧이어 빵을 비롯한 먹을거리를 가져왔다. 손이 묶여 있는 탓에 나는 스스로 먹을 수 없었고, 사용인의 손을 빌려 받아먹어야만 했다.
“그래도 이틀 후면 세이먼 님과 함께 떠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절망스러워하지 마세요.”
“절망스러워…하지 말라고요?”
“네……. 세이먼 님은 당신을 아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지금 영문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 내 인생이 통째로 망가지게 생겼는데 절망스러워하지 말라고요?”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에 그녀에게 마구 쏘아붙였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그녀는 꽤 어려 보였는데, 내가 신경질을 내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해요. 화를 낼 사람이 당신이 아닌 걸 아는데도 말이 잘못 나왔어요.”
“아녜요. 충분히 이해해요. 저 같아도 당황스럽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겠죠. 그럴 만해요.”
“…고마워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녀는 나를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포물선을 그린 입술로 나에게 말했다.
“멋진 남자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잖아요……?”
“…….”
나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날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기가 차는 마음에 그녀가 내민 숟가락을 두고도 입에 넣지 않았다.
“왜요. 더 안 드시게요?”
나는 멍한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했다.
“…입맛이 없네요.”
“네. 그럼 정리할게요.”
그녀는 내 말에 음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배고픔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바닥에 새우 자세로 누워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흐흥.”
그녀는 왠지 신나는 듯한 몸짓으로 식기를 정리하더니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나에게 말했다.
“저를 부르려면 이 종을 치세요.”
입으로 줄을 물고 흔들면 종이 울리는 형태였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미소를 내보인 채 바깥으로 나갔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 이젠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온갖 일을 겪다 보니 내 정신이 분열되기라도 한 걸까?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정령들을 불렀다.
“샐러맨더, 샐러맨더, 카사. 샐라임.”
하지만 세이먼의 조언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약을 먹인 건지 내 몸에 넘치던 마나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힘을 아예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제기랄……. 망할 시스템은 왜 이럴 때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거야. 뭐라도 나오란 말이야. 내가 꼼짝없이 세이먼의 아내가 되어서 목줄에 묶인 것처럼 살길 바라는 거야? 그건 너네들이 원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어떻게든 아등바등 시스템에서 벗어나려 생쇼를 하는 꼴이 보고 싶은 거잖아! 그러면 당장 여기서 벗어나게 해 달란 말이야…….”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어딘가의 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방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창문 하나 없는 이곳엔 무거운 공기만 가득했고, 바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멍하니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기를 계속했다. 그러던 와중, 나는 홀린 듯이 종을 울렸다.
그러자 친절한 얼굴의 사용인이 방에 들어왔다.
나는 ‘얘도 제정신은 아니다.’라는 걸 인지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틀 뒤에 내가 어떻게 끌려갈지 알아요? 아는 게 있으면 다 말해 줘요.”
“세이먼 님이 분명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전혀 티 안 낼게요. 전 어차피 끌려갈 운명이잖아요? 그냥 미리 알고만 있을게요. 제발 알려 줘요.”
“그렇다면…….”
뜸을 들이던 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이내 나에게 털어놓았다.
“커다란 상자 안에 넣어서 데려갈 것이라고 했어요. 동물들을 옮기는 화물선을 타고 갈 것이라고 했고요.”
“…이럴 수가.”
그가 나를 동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용인에게 말했다.
“제발 이 줄 좀 풀어 줘요. 저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해요.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렇게 있다가는 저는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요.”
‘가이즈 인 러브’의 가장 큰 설정은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거였다. 지금 내가 세이먼을 따라 카리브 제국에 가게 된다면 다섯 남주인공들의 애뮬릿을 얻는 건 꿈도 못 꾸게 어려워질 거다. 그러면 시스템도 파괴하지 못할 텐데. 그러면 난 예정대로 죽는 거잖아.
“미안해요. 줄은 풀어 줄 수 없어요. 게다가 이 줄은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제 손으로 풀 수 없어요.”
“이런 미친! 젠장!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내일이 되면 세이먼 님이 찾아오실 거예요. 그때… 이야기를 잘 해 보세요.”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나는 세이먼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눈을 뜨자 여전히 검은 방에 나는 한 번 더 절망스러움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는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입으로 종을 울렸다.
하지만 들어오는 건 사용인이 아닌 세이먼이었다.
“세이먼! 세이먼! 기다렸어요. 제가 계속 기다렸다고요……!”
증오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세이먼이 마음을 바꾸어 나를 풀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잘 풀어 나간 뒤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잘 있었어요? 루나. 손목이 많이 상했네요. 발목도.”
네가 그런 거잖아, 미친놈아.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 끝까지 삼키며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밤새 세이먼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내 결론은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춰 주자는 것이었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네요. 사용인이 제대로 씻겨 주지 않던가요?”
“아뇨.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나랑 있는 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아니요. 아니요. 저는 세이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세이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억지로 내뱉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 말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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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도: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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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해 봐요.”
“저는 세이먼이랑 같이 있는 게 좋아요. 항상 함께 있고 싶어요. 지금도요. 그러니까 여기에 가두지 말고 세이먼 옆에 있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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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도: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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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진짜 이런 말을 하니까 호감도가 오르잖아? 그래. 말뿐이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지껄여 줄 수 있다. 그러니까 제발 마음 좀 바꿔 줘.
“세이먼이 지내는 곳이 어디예요? 저도 거기에 가고 싶어요. 아무 짓도 안 하고…….”
“거짓말이면 죽여 버릴 거야.”
“…….”
그는 살벌한 눈동자로 나에게 말했다. 감히 거짓을 고할 시엔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는 악마 같은 얼굴이었다.
“왜 거짓말이겠어요. 우리 지금까지 친했잖아요. 서로 특별한 사이였잖아요.”
내 말에 세이먼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 바닥에 앉혔다. 자신 또한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내 앞에 앉아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금세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렇지. 특별한 사이였지.”
“…그쵸?”
세이먼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케이오스’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수배가 됐어. 망할 녀석들이 나를 불어 버렸더군. 한마디로 도망 다니고 있는 입장이야. 하지만 카리브 제국으로 가면 놈들은 날 찾지 못할 거야.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고. 물론 너와 함께.”
“…그렇군요.”
세이먼은 내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보듯이 살폈다.
“너도 좋지? 나와 함께한다는 게 좋다고 했으니 말이야.”
“…그, 그럼요.”
내 말에 그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살살 쓸었다. 그러고는 처연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내 비참한 과거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야…….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내 마음을 알겠어?”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최대한 감추며 대답했다. 그의 곧은 눈동자를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저도 세이먼에게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그런데 뜻밖의 반응을 보이며 세이먼의 표정이 굳었다. 내 말에 좋아할 줄 알았던 그가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다.
“진심만을 말해. 제발.”
“…….”
“어? 내 말 못 알아들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그는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평소엔 그토록 이성적이던 그가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그저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왜 그래요. 세이먼. 진정, 해요. 저는 세이먼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최대한 세이먼에게 남아있던 애정을 끌어모아 그에게 대답했다. 지금같이 행동하는 짓거리를 보면 다시는 안 보고 싶지만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널뛰는 기분을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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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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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도가 오르는 동시에 그가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갑작스레 다가온 그의 행동에 나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세이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증명해 봐.”
“……?”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를 일관하자 그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내게 키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