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검은 방(1)
정신을 차리자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져 인상을 세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천에 시야가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야……?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온몸이 묶인 채로 의자에 앉아 있던 것이다.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려 봐도 완전히 꽉 묶인 탓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은 막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소리쳤다.
“세이먼?! 세이먼!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눈 가린 것 좀 풀어 줘요!”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내 눈을 가린 사람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세이먼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가? 하지만 그가 나에게 이럴 이유가 없는데……!
그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루나, 일어났어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 이 상황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음성이었다.
“이건 풀어 줄게요. 대신 얌전히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는 내 뒤통수에 묶인 천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시야가 트였고, 희미한 빛뿐인 어두컴컴한 방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다 아팠다.
“뭐 하는 거죠, 세이먼? 지금 여기는 어디고요! 또 제 몸을 이렇게 묶어 놓은 이유는 뭐죠?!”
“…….”
“이거 범죄인 거 알아요?! 사람을 이렇게 가둬다가 묶어 놓는 거 중범죄나 다름없다고요! 세이먼은 저를 상대로 지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당장 이걸 풀어 주고 저에게 사과해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당장 사람들에게 알릴 거예요! 그리고 책임을 물을 거라고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나는 바로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소리쳤다. 흥분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건데!
“우읍!”
그러자 세이먼이 내 눈을 가렸던 검은 천을 내 입에 쑤셔 박았다. 그러자 천 뭉텅이가 목젖까지 깊게 들어왔다.
“제가 얌전히 있으랬잖아요.”
“읍! 으읍!”
입에 천이 들어오자 말이 나오지 않았고, 나는 아무리 내뱉으려고 했지만 버둥거리는 꼴만 보여 줄 뿐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질머리를 꺾어야 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세이먼이 이전부터 나에게 집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군 적은 없었다.
그는 내 앞에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루나는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해요?”
“…….”
“검은색을 가장 좋아하면 좋겠는데.”
나는 반쯤 눈물이 고인 상태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기에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은 온통 검은색이거든요. 혼자 있을 수 있죠? 루나가 착한 아이가 될 때 다시 돌아올게요.”
세이먼은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맑게 빛내며 나에게 말했다. 착한 아이라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는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읍! 으읍! 읍!”
내가 몸부림을 치며 목으로 소리를 내자 천천히 걸어가던 그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절 실망시키지 말아요, 루나.”
그러고는 그는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이 전부 차단되었고 사방이 새까만 벽으로 이루어진 방만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이먼은 나와 친한 친구가 아니었나?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흔쾌히 도와주던 그런 조력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에게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검은 방 한가운데에 묶여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령을 부를 수도 없었기에 그저… 두 눈을 뜨고 검은색 방을 쳐다봐야만 할 뿐이었다.
그 어떤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가다가 바람이 거세게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는 마음에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지? 일단 이 손부터 풀어야 하는데……!
손을 마구 버둥거렸다. 하지만 두꺼운 줄로 꽁꽁 묶인 손은 오히려 움직일 때마다 아프게 쓰라릴 뿐이었다. 이미 상처가 난 것 같았다.
몇 분 내내 몸을 움직이던 나는 오랫동안 먹은 것이 없다는 걸 인지했다. 그러자 너무나도 배고프기 시작했고, 온몸에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꼬르륵 소리가 나며 목도 말라 왔다. 그러자 세이먼이 나타나 물과 먹을 것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굶기면서까지 나를 가둬 두진 않겠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도 없는 검은 방 안에서는 시간 개념이 흐려져 갔다. 의자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나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허망한 눈동자로 문을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세이먼이 나타나길 빌었다. 얌전히 있을 테니, 인간적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였다. 지금은 잠시 세이먼이 미친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 * *
반나절이 지난 것 같았다. 이제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먹은 게 없어 급하진 않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읍! 으읍!”
마지막 남은 힘으로 또다시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가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졌고 나도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소리라도 계속 낼 생각으로 몸을 버둥거리듯 움직이며 의자를 바닥에 박아 쿵쿵 소리를 냈다.
쿵. 쿵. 쿵. 쿵.
그리고 소리를 낸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문 쪽으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들렸다. 곧이어 문이 벌컥 열렸고, 늘씬한 긴 다리의 세이먼이 저벅저벅 들어왔다.
“제 말을 못 알아들은 거예요? 너무 어렵게 말했나?”
“으읍…….”
그는 의자를 다시 세워 바닥에 앉힌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나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먼이라면 내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을 사람일 것 같았다.
“읍! 으읍!!!”
하도 소리를 질러 목은 아플 대로 아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크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세이먼이 다시 한번, 등을 돌렸다.
“이런…….”
그리고 내 얼굴을 본 그가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울고 있었군요.”
내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채로 그를 노려보고 있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내 볼을 쓸었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세이먼 유리츠
나이: 19
직위: 유리츠 가문의 기사
호감도: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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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도가 81%여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건가? 나를 향한 감정이 집착 어린 애정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나를 감금하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잖아!
“마나는 전혀 쓸 수 없을 테니 괜한 힘 빼지 마요.”
세이먼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입에서 천을 빼 주었다. 침 범벅이 된 천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세, 세이먼?”
쿨럭, 쿨럭.
오랫동안 입이 막혀 있던 상태라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목소리도 다 갈라져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거 같은 소리도 났지만, 난 최선을 다해 말을 이었다.
“다 알겠어요. 당신이 저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마음은 알겠다고요. 하란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이것만 풀어 줘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왜 저를 여기에 가둬 둔 건지만 알려 달라고요. 사람을 가둬 두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자 세이먼이 눈을 심드렁하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나는 그의 말에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이러다간 다시 천을 입에 물릴지 모른다. 나는 입을 헙, 하고 다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시선만 그에게 고정했다.
그러자 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나, 날 얼마나 좋아하죠?”
“네, 네……?”
나를 납치해 영문도 모를 곳에 가둬 놓고 온몸을 결박시켜 놓은 채 물을 법한 질문은 아니지 않나? 나는 얼이 빠지는 듯한 기분에 그저 입술만 벌리자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결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세이먼은 멈추지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 듯한 질문을 나에게 묻는 그는 점점 표정을 굳혔다.
“무, 무슨…….”
“물었잖아. 나랑 결혼할 수 있냐고.”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눈은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한 뱀의 눈알 같았고, 낯빛은 언제든지 나를 죽일 것만 같은 창백한 모습이었다.
“결혼, 이라뇨. 그건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잖아요…….”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가 갑자기 확, 내 턱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동자로 내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나를 얼마나 사랑하지?”
나는 이제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이먼은 진심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촉매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단단히 미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려 왔다. 그가 붙잡은 턱 때문에 고개가 아파 왔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의 표정, 말투, 목소리 하나하나가 나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내 혀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이 붙은 것처럼 어버버하며 시선을 회피하자 그가 내 턱을 놔주었다.
“윽!”
세게 놓은 탓에 내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다쳐도 세심하게 걱정해 주던 세이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루나는 저와 함께 떠날 거예요.”
세이먼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애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말투였다.
“어, 어디로……?”
“카리브 제국. 이틀 뒤 배를 타고 떠날 거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여자 사용인을 붙여 줄 테니 그녀의 도움을 받아요.”
그리고 그는 의자에 묶인 내 손과 발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과 손은 수갑처럼 묶인 채였고, 발도 마찬가지였다.
“약을 먹였으니 정령을 부르는 건 힘들 겁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물었다.
“세이먼, 내가 세이먼을 좋아한다고 하면 여기서 풀어 줄 거였어요?”
나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받으려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좋아한다고 대답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세이먼은 조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설마요. 당신의 애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