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여동생을 찾아줘(3)
잰퓨어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에리피아는 자신의 오빠를 경멸하는 듯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잰퓨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 에리피아. 왜 그래. 나 네 오빠 잰퓨어야. 널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
“오빠가 할머니를 막기만 했더라도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야. 난 지금에서야 날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았어. 난 지금 행복해. 날 버린 사람의 손을 다시 잡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 안 해?”
“지금 이런 철장 안에서 사는 게 행복하다고? 너는 수상한 곳에 갇혀서 인간적인 대우도 못 받고 있어! 그러면서 어떻게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거야! 당장 나와. 오빠랑 가자.”
잰퓨어는 에리피아의 팔목을 붙잡으며 에리피아를 억지로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안 놔? 놓으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빠는 안 따라가!”
에리피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잰퓨어에게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 와중에 샐라임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러다간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고 말 거야. 곧 있으면 간수들도 깨어날 거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은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잰퓨어. 시간이 없어. 어떻게든 에리피아를 빨리 설득시켜야 해……!”
“기절시키면 안 되냐?”
“헛소리하지 마요, 샐라임.”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는 잰퓨어와 에리피아를 바라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에리피아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꾀죄죄한 얼굴과 산발이 된 머리, 핼쑥하게 팬 볼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에리피아. 네가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널 빼내 줄 사람은 오직 네 오빠밖에 없어. 마지막으로 잰퓨어를 믿어 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러자 에리피아는 눈을 매섭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 몸에서 손 안 떼? 이 더러운 년아! 난 위대한 ‘케이오스’의 계획을 실현할 숭고한 제물이란 말이야!”
“에리피아……. 제발…….”
“너 때문에 더러워졌어! 이러다가 내가 간택 받지 못하면……! 못하면 끝장인데……!”
그녀는 반쯤 맛이 간 눈동자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댔다. 손으로는 자신의 팔을 마구 털어 댔다.
“시간이 거의 다 됐어. 이제는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가야 해.”
옆에선 샐라임이 중얼댔고, 그 말을 들은 잰퓨어가 에리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어떤 계획이라도 너를 희생양으로 내보낼 순 없어. 평생을 속죄하며 살게. 그러니까 한 번만 오빠 손을……. ”
잰퓨어가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던 중이었다.
“윽!”
갑자기 잰퓨어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모든 행동이 정지했다.
“대사제님!!”
에리피아가 어두운 반대편 복도를 향해 소리쳤고, 그쪽을 보니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볼 수 있었다.
“잰퓨어, 괜찮아?!”
그의 등에는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대사제의 마법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겁 없는 침입자 여러분들이 쥐새끼처럼 여기에 숨어 계셨군. 제물을 빼내기라도 할 셈이었나? 무슨 배짱으로 그런 계획이 성공할 거라 생각한 거지?”
나와 잰퓨어, 샐라임은 대사제를 반대편에 둔 채 거리를 벌렸다. 샐라임은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항상 뿜어져 나오던 불꽃의 아우라는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샐러맨더.”
“…….”
“샐러맨더?”
게다가 샐러맨더는 아예 소환조차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 샐라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이곳에 흑마법의 기운이 너무 강해. 신성 마법만 쓰는 정령과는 상극이야. 그래서 하급 정령인 샐러맨더 또한 소환되지 못하는 거고. 나도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잰퓨어는 등을 다친 것에 무리가 간 건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에 기대고 있었다. 대사제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내뱉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지는 모르겠지만 상을 줘야겠지? 보아 하니 제물의 남매인 것 같은데, 저 녀석이 여기서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았는지 손수 보여줘야겠군.”
“뭐……?”
하얀색 로브를 차려입은 채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대사제는 자신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내 에리피아에게 던졌다.
“받아라, 제물아.”
그녀는 두 손으로 단검을 받아 든 채 대사제를 쳐다보았고, 대사제는 지팡이를 꺼내 그녀를 향해 겨눴다.
“네 오빠를 찔러 죽여. 명령이다.”
그러자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사제를 쳐다보던 에리피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혼탁해졌다. 세뇌 마법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리피아는 천천히 잰퓨어를 향해 걸어갔다. 잰퓨어는 그런 에리피아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고, 아무런 방어 태세조차 취하지 않았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잰퓨어를 공격하려는 그녀를 막을 셈으로 잰퓨어의 앞에 가서 섰지만 잰퓨어는 오히려 나를 저지했다.
“괜찮아, 루나. 비켜 줘.”
“그치만……!”
“정말 괜찮아. 내 동생이잖아.”
에리피아는 잰퓨어의 앞까지 다다랐고, 그녀는 칼을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
모두가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막지 못했고,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리피아는 쳐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파들파들 떨었다.
“으으……!”
주먹이 덜덜 떨리며 칼을 잰퓨어에게 꽂지 못하는 에리피아의 표정은 가히 가관이었다. 증오와 슬픔, 애정이 섞인 미묘한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제물이여. 찔러라. 죽이라고.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셈이냐?”
허공으로 높게 들어 올린 손. 모두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커헉!”
“……!”
그녀는 잰퓨어의 배를 찌르고 말았다. 잰퓨어의 입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못 참아. 아무리 잰퓨어의 동생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샐라임! 저 망할 대사제부터 어떻게 해 줘요!”
그리고 나는 에리피아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쾅 밀쳤다. 세뇌고 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오빠를 자기 손으로……!
“……!”
그런데 에리피아의 얼굴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혼탁한 눈동자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으며 이미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었다.
“에리피아……. 나는 너밖에 없어. 네가 날 죽인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넌 내 동생이야. 지켜 준다는 약속을 저버려서 미안해. 앞으로는 꼭 지켜 주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잰퓨어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에리피아를 향해 말했다.
“이 늙은이 할배야. 어린 애를 가지고 놀면 쓰나.”
샐라임은 대사제를 향해 불꽃을 쏘았다. 그러자 에리피아의 세뇌가 풀리며 그녀의 혼탁한 눈동자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허, 허억……. 오빠……?”
그러고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건지 쓰러져 있는 잰퓨어를 끌어안았다.
“지금, 지금 내가 무슨 짓을…….”
“괜찮아. 오빠는 다 괜찮아.”
에리피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의 눈물이 잰퓨어의 옷을 적셨고, 잰퓨어는 그 와중에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라도 안으니 좋다…….”
“주, 죽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이제야 만났는데 왜 죽는 거냐고!”
“안 죽어. 왜 죽어, 내가.”
그때, 내 쪽을 향해 마법 공격이 퍼부어져 왔다. 근원지를 바라보니 대사제가 천천히 걸어오며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고 있었다.
“새, 샐라임은?!”
당연히 샐라임이 제압했을 거라 생각한 나는 뜻밖의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샐라임은 검은색 구 모양의 구속구 안에 갇혀 있었다.
“정령술과 흑마법은 상극 중에서도 상극이지. 정령술은 흑마법 앞에서 전부 무효화되니 말이야. 아무리 상급 정령이라고 하지만 상대를 잘 못 만났다고 말하고 싶군.”
대사제는 구속구 안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샐라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정령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검술을 쓰고자 아이템창을 열었다.
“아이템창.”
그러자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낯선 아이템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
이름: 북쪽 숲의 대검
등급: 신화급
설명: 북쪽 숲의 정기를 물려받은 대검으로 폭발적인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 공격력 56+50, 체력 56+400, 스킬 가속 56+25, 모든 피해 흡혈 56+15%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
북쪽 숲의 내장에 들어갔을 때 나타났던 검이 그대로 아이템창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두 손으로 잡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고, 긴 길이의 검신이 천장을 찌를 듯이 높게 치솟았다.
“정령술이 안 되면 칼로 써는 수밖에.”
나는 대검을 손에 든 채 곧장 대사제에게 달려가려 발을 떼었다. 그런데 뜻밖의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바로 대사제의 세뇌 마법에 걸린 에리피아였다.
“지금까지 훈련받은 것의 결과를 보여 줘야겠지. 당장 네 앞에 있는 계집을 없애. 명령이다.”
“…….”
에리피아는 또다시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되어 단검을 손에 든 채 나에게로 달려왔다.
“좀비도 아니고 뭐야!”
나는 잽싸게 그녀의 칼부림을 피하며 대사제에게로 접근했다. 에리피아는 공격력이나 민첩성이 좋은 건 아닌 모양인지 움직임이 둔했고 조악했다. 대사제에게 다가간 나는 두 손의 검을 쥔 채 입을 열었다.
“우릴 무사히 꺼내 주면 당신을 죽이지 않겠어. 당신도 죽고 싶지 않지? 그렇다면 저 망할 세뇌 마법을 풀고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줘!”
그러자 대사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길 들어온 사람 중에 살아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지. 너희들은 그대로 ‘케이오스’신의 먹잇감 행이야.”
“허,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도 상관없나 보지?”
그리고 나는 높이 쳐든 칼을 대사제에게 겨눴다. 대사제는 지팡이로 내 칼을 막아 냈고, 지팡이가 손상되어 샐라임을 구속하고 있던 구속구가 풀렸다.
“샐라임! 정신 차리고 빨리 이쪽으로!”
샐라임은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좀비처럼 나에게 걸어오고 있는 에리피아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그녀의 턱을 가격했다.
퍼억!
“억!”
그녀가 저 멀리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대사제와 공방전을 벌이며 샐라임을 향해 소리치자 그가 대꾸했다.
“얘 몸속에 있는 걸 꺼내야 해. 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얘를 조종하고 있다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그러다 애 죽겠어요!!”
나는 가차 없이 에리피아를 패고 있는 샐라임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샐라임에게 제안했다.
“샐라임이 이 망할 대사제를 맡아 줘요. 에리피아 몸속에 있는 건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미친 짓 하지 말고 이리 오라고요! 애 반죽음 만들 작정이에요?”
그러자 샐라임이 에리피아를 구석에 처박아 놓은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절대 구속구에 걸리면 안 돼요. 육탄전으로 가는 거. 알죠?”
“두 번은 실수 안 한다, 꼬마야.”
나는 대사제를 샐라임에게 맡긴 후 에리피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온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삐걱삐걱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팔다리가 실에 묶인 채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서 꾸물대고 있는 그녀를 잡아 눕혔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칼 때문에 계속해서 팔에 생채기가 났다.
“아오, 좀 가만히 있으라고!”
나는 그녀를 제압하며 시야 안에 잡히는 잰퓨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는 부상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바닥에 쓰러져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무시한 채 에리피아의 얼굴을 붙잡았다.
“미안해, 에리피아!”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