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24시간이 모자라(6)
베탄을 따라서 들어간 곳은 병원 내에 마련된 객실이었다.
“이곳은 환자가 아니라 거처를 잃은 모험가, 또는 우리처럼 봉사를 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야.”
“협소하지만 깔끔하네요.”
평소에 지내는 내 기숙사와 비슷할 정도로 깔끔했기에 하룻밤을 묵는 것에는 별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넓은 방 안에는 침대가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지만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네가 안쪽에서 자. 내가 여기서 잘게.”
베탄이 방의 가장 안쪽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침대의 스프링이 그대로 다 느껴지는 싸구려 침대였지만 병원 특유의 위생적이고 하얀 시트 덕분에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반듯하게 접힌 이불을 펴서 꼬물꼬물 그 안으로 들어가자 베탄이 가만히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왜요?”
“아니야, 아무것도.”
“싱겁긴.”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뒤 옆으로 누웠다. 바로 맞은 편엔 베탄의 침대가 있었다.
“외간 남자랑 자는 게 겁나지도 않나 보지?”
“전혀요.”
외간 남자랑 자 본 적이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임무를 나갈 때는 잰퓨어와 첸테 선배와도 함께 여러 번 잤고, 에르셈프와는 여관에서 단둘이, 레크리드와는 그의 집에서 단둘이… 잔 적이 있다. 물론 그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오늘도 그럴 거니까 상관없었다.
“선생님은 외간 여자랑 자는 게 신경 쓰이나 봐요?”
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를 보며 물었다. 베탄은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응. 신경 쓰여.”
“…왜, 왜요? 저라서요?”
“하, 아니.”
내 말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왜요? 제가 선생님을 잡아먹을 일도 없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신경이 쓰이는 거야.”
“무슨 일……?”
“그래. 옛날에도 비슷했어. 꼭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고, 느낌도 같았지. 내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상대방이 없어질 것 같은 느낌.”
“선생님 걱정도 참. 제가 어딜 가겠어요. 이런 병원에서.”
“누가 잡아가면 어떡해?”
누가 잡아가면 어떡하냐는 말…이 보통 이런 맥락에서 쓰이나? 보통은 상대방이 예뻐 죽겠을 때 누가 잡아가면 어떡하냐고 너스레를 떨면서 쓰지 않나?
“진짜로 널 잡아갈 수도 있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선생님이 총기사단장이어서요?”
“…그래. 나만 아는 사실을 불게 만들 인질을 잡으면 적 입장에서는 가장 손쉽게 기밀 정보를 빼낼 수 있잖아. 나와 붙을 일도 없고.”
직위가 총기사단장이기에 주변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 물음에 베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기 싫어 묻어 둔 일을 다시 힘겹게 꺼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응. 맞아. 나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어. 나는 그 상황을 타개하지 못했고, 결말은 안 좋았지.”
“그게 설마… 선생님의 전 연인이에요?”
그러자 베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엔 작은 주름이 진 채였다.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게 너든, 아니면 다른 누가 되었든, 나에겐 좋은 기억은 아니지.”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절로 써지는 인상을 계속해서 풀려고 했고,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커지는 목소리를 더 낮추려고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었다.
“다신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선생님이 지켜 줄 거고, 저라면 제 몸을 지킬 힘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혹시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있다면 버려 버려요.”
“…….”
사건의 양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베탄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애꿎은 사람을 해하다니. 자기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아도 그것에 대한 죄책감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환자들이 쓰는 병동이랑은 다른 건물이었기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베탄 말대로 적막함만이 감도는 객실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어.”
“…….”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그 어떤 걸 잃더라도 그 여자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내 모든 걸 걸면 무조건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 신념이 깨진 거야.”
“지키지 못했다면…….”
“적의 손에서 생을 마감했지. 그것도 나는 그 모습을 손 놓고 지켜봐야만 했어. 내 옆에 동료가 있었거든. 내 결정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아뇨, 선생님은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잖아요. 그 누구도 선생님을 원망…….”
“그녀가 나를 원망해. 나는 그녀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 죽기 직전까지 배신 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때가 생각나. 그리고 자꾸만 내 꿈에 나타나 나를 탓하곤 하지.”
“그치만…….”
예전에 베탄의 집에 갔었을 때 그가 자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그 모습이 죄책감에서 비롯된 그 꿈을 꾸던 도중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움이 확 몰려왔다.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내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녀를 향한 기만이라고 느껴져. 루나, 미안하지만 난 아까도 그녀를 잊으려 충동적인 행동을 했어. 나는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고해성사를 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선 자기혐오와 죄책감, 부끄러움, 좌절감이 전부 느껴졌다.
“미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탄은 항상 그렇게 살아왔을까.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기혐오에 갇혀 매 순간 자신을 채찍질하며.
“!!”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베탄에게 다가가 그의 품을 끌어안았다. 좀 전에 느꼈던 그만의 체취. 강한 남성스러움이 느껴지는 향기가 내 몸 전체를 휘감았다.
“괜찮아요. 괜찮아. 숨기고 사는 게 더 안 좋아요. 겉으로만 괜찮으면 뭐 해요.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는데.”
전생에서 나도 집에서는 아버지께 온갖 폭행과 구박을 당했지만 학교에 나가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척을 했었다. 남들에게 알려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가 만든 달팽이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점 말이 없어지고,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사람을 불신하게 된다. 사람과 교류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 고립되다 보면 우린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져 버린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픽 죽어 버리게 되고, 상처에 대한 면역을 잃는다. 그 악순환 안에 들어가 버리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베탄 또한 그런 걸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에게 손길을 꼭, 내어 주고 싶었다. 절대 당신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을 믿고, 또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말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제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살아 있어야 해요. 다시 그런 비극이 생긴다면 절 구해 줘야 하잖아요. 저번에 히드라를 멋지게 무찔러 줬었을 때처럼요.”
“하지만 내가 없으면 너는 다칠 일이 없어…….”
“선생님. 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는데요. 시퍼런 칼날을 든 적이 사방으로 다가오는데 그럴 때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뭔데?”
“날 구해줄 ‘기사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어디선가 등장해서 아무렇지 않게 적을 처치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길 바랐어요. 그런데 진짜로 제가 히드라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나더라고요.”
“…….”
“선생님이 바로 제 ‘기사님’이에요. 누구 맘대로냐고 묻는다면 제 맘대로예요. 선생님이 좋아서 제가 지정했고, 아직까지 아무 불만 없어요.”
“하지만 난 아직 그녀를… 전부 잊지 못했어. 누군가와 감정을 나눌 때가 못 돼.”
“그렇게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
나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내 손등 위로 겹쳤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감촉이 내 손 전체를 덮었다.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살아 달라는 거예요.”
“…….”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저 말고도 엄청나게 많을 테니. 그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구요.”
“……!”
그렇게 내가 말을 마쳤을 때였다.
퀘스트가 도착했다는 시스템이 울렸다. 이전에 베탄이랑 있을 때도 이렇게 급작스러운 타이밍에 퀘스트가 왔던 적이 있었는데…….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자동으로 열람됩니다. 3…2…1…….]
+
# 돌발 퀘스트
제목: ‘슬퍼하는 남자’
내용: 전 연인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베탄 오스가르드’에게 ‘웃으니 예쁘네. 자주 웃어.’라고 말하시오.
제한 시간: 1분
보상: 없음
페널티: 죽음
+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 보상도 없고 페널티만 있는 돌발 퀘스트가 나오다니!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라고 시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입을 막 열려던 참이었다.
“고마워, 루나.”
거짓말 같게도 베탄이 나를 보며 아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대사 그대로 읊었다. 평소와 달리 반말이라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사 그대로 말해야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웃으니 예쁘네……. 자주 웃어.”
“……!”
베탄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일렁였다. 역시 시스템은 나의 편이 아닌 게 분명하다. 저번에는 전 연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시키더니, 설마 이번에도?
“…알겠어. 될진 모르겠지만.”
“항상 화난 사람처럼 눈 매섭게 뜨지 말고. 알겠죠?”
“난 누구에게나 친절해.”
“엑. 완전 말 한마디 잘못 걸었다간 칼이라도 날아올 기세거든요?”
“…그건 그때 네가 이야기를 엿들어서 그런 거잖아. 기밀 정보였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고자 말을 돌렸다.
“아, 그런데 그때 말이에요. 왜 볼프문트 협회 할아버지랑 밀담을 나누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램클리프 소속이잖아요. 둘은 적대적인 관계 아니에요?”
“맞아. 정치적 숙적이지.”
“…….”
“그때 들은 것도 본 것도 없다더니,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군.”
베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싹 바뀌며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호감도가 70%인 남주인공이 나를 해칠 리는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왜 베탄은 램클리프 소속이면서 정치적 숙적인 볼프문트와 협력해서 학교를 무너뜨리는 일을 도운 거죠?”
나는 베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베탄과 볼프문트의 원로가 나누던 대화.
학교가 비무 대회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마물들로 공격하자는 계획을 속삭이는 그들. 어째서 그들이 ‘케이오스’의 계획을 그대로 읊고 있었을까?
이것의 정체를 알아야만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베탄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진작에 널 죽였어야 했는데.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