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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121)화 (121/156)
  • 120화. 24시간이 모자라(5)

    귀 부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베탄은 얼굴을 천천히 움직이며 내 입술을 찾았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나와 눈을 마주한 그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뭔… 짓을 하려는 거죠?”

    “그렇고 그런 짓.”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말투와는 달리 베탄의 눈동자는 우수에 찬 상태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내 입술이 종착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 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55%

    +

    실시간으로 호감도가 오르고 있었다. 내가 베탄과 24시간을 보내려고 한 목적은 호감도 상승이 맞았으니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이 맞았다. 나 또한 상대가 나쁘지 않았고,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눈은 감지 않았다. 살며시 뜬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입가에 다가온 그의 숨결이 턱 부근을 간질댔다. 곧 있으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을 것이었다.

    +

    호감도: 58%

    +

    이젠 그가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붉은색으로 어른거리던 것이 자취를 감추고, 매끈한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

    호감도: 61%

    +

    때가 되었다. 나 또한 이젠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고,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3초, 2초, 1초…….

    “선생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침범했다.

    우리는 둘 다 화들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고, 그곳엔 우리보다 더 놀란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애니 누나가 밥 언제 되냐고…….”

    “…….”

    “두, 둘이 뭐 해요……?”

    “할리.”

    “제, 제가 방해한 거예요?”

    “아, 아니야!”

    “응. 맞아. 할리. 그러니까 문 닫고 나가.”

    잔뜩 당황해 우리 쪽을 손가락질하던 아이를 향해 베탄이 가차 없이 내뱉었고, 아이는 고개를 몇 번 휙휙 휘젓더니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가 버렸다.

    아이가 나가자마자 베탄은 손을 들어 올려 내 턱을 확 낚아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읍.”

    그러고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졌다. 순식간이었다. 말캉한 살이 나를 느끼듯이 입술을 꾹꾹 눌러 댔고, 내 볼을 잡은 그의 두 손이 내 입을 벌리려 했다.

    “자, 잠깐만요.”

    내가 급하게 그를 저지하며 몸을 떼어 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싫어서도, 이 상황이 불쾌해서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지?”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내가 고개를 모로 숙이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시선을 올려 그를 쳐다보니 그가 욕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

    “그, 그런 게 있어요! 저는, 저는 진짜 첫 키스라구요.”

    “…….”

    “저, 저는 첫 키스라면 좀 더 로맨틱하고 완벽한 분위기에서 은은한 조명과 함께 엄청난 것을 느끼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런 병원 주방에서, 그것도 며칠 전까지는 검술 선생이었던 나와 해서 맘에 안 든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꼭 아니지만……. 좋아요. 저도 좋았어요.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뭐가 좋다는 건지, 뭘 모르겠다는 건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입맞춤 한 번으로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파도 밀려오듯 나를 온전히 휘감아 버렸다.

    “네가 싫다면 나도 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긴장 풀어.”

    “…후우. 고마워요.”

    “고마워할 일 아니야.”

    내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야.”

    그러고는 내 머리에 콩 꿀밤을 때린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왜 때려요.”

    “…귀여워서 때렸다. 왜.”

    +

    호감도: 70%

    +

    내 이마를 때렸다고는 하지만 그건 애정 어린 손길에 가까웠다. 게다가 70%까지 오른 호감도를 대변해 주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웬만하면 귀엽거나 예쁘거나 하나만 해.”

    그는 오븐 장갑을 손에 끼우더니 커다란 냄비를 들었다.

    “…….”

    “나와. 밥 먹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잔디밭 위에서는 아이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헤.”

    그리고 한 남자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 히죽히죽 웃었다. 얜… 아까 주방 문을 열었던 남자아이잖아.

    “누나, 베탄 선생님이랑 뭐 했어요?”

    “뭐, 뭐?”

    내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남자아이를 훑자 녀석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다 들릴 법한 큰소리로 외쳤다.

    “저도 다 알아요! 둘이 사귀는 거죠?!”

    그러자 주변에 있던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이에요, 베탄 선생님……?”

    몇몇 여자아이는 울먹거리며 베탄을 붙잡았고.

    “야, 사귀면 …거나, …하고 …하는 것도 하는 거냐……?”

    남자아이들은 호기심 많을 나이대답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때 베탄이 박수를 두 번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람을 자주 다뤄 본 것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 자. 조용히 하고 얌전히 기다리는 착한 아이에게만 밥을 줄 거예요.”

    그의 말에 갑자기 조용해진 아이들은 자신 몫의 그릇을 하나씩 들고는 베탄이 밥을 배분해 주기를 기다렸다.

    “다들 맛있게 먹어.”

    아이들에게 호박 수프를 모두 나누어 준 베탄은 나와 자신의 것까지 챙겨 와 내 옆에 앉았다.

    “맛 어때?”

    아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맛있어요.”

    “정신을 다른 데 팔려서 잘 만들었나 모르겠는걸. 그래도 맛있다니 다행이네.”

    그의 말에 자꾸만 떠오르는 아까의 기억을 애써 구겨 넣으며 호박 수프와 함께 입 속으로 삼키려 애썼다. 나도 모르게 옆에 앉은 베탄의 입술을 힐끗힐끗 바라보게 되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내가 정말 미친 게 분명해. 왜 평소에도 하지 않는 짓을 하는 거야?

    “선생님, 담요 주세요.”

    옆에 있던 일곱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담요를 요구했다. 안 그래도 저녁이 되니 확 쌀쌀해지는 게 보였다.

    “불이라도 피울까요?”

    우리가 모여 앉아 있는 곳 중앙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과 장작들이 남아 있었다.

    “내가 성냥을 가져올게.”

    베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내가 그를 저지했다.

    “제가 할게요, 뭐.”

    그리고 장작 앞으로 가서는 정령을 소환했다.

    “샐러맨더. 불 피워 줘.”

    붉은색 정령이 허공에 금세 나타자나 아이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이쪽으로 쏠렸다.

    “우와!!”

    “저 누나 손에서 도마뱀 나와!!”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샐러맨더는 불을 붙였고, 장작은 점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베탄도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정령을 부릴 수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네.”

    “어디까지 부릴 수 있어?”

    베탄이 묻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상급 정령술사(임시)’지만 상급 정령술사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의 능력을 10분의 1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으니……. 하지만 샐라임은 가능하다고 했으니 상급 정령까진 다룰 수 있다는 건데.

    “상급 정령, 샐라임까지 부릴 수 있어요. 샐라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나는 샐라임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내 허리춤에 있었을 때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냥 말을 걸듯이 그를 부른 것이다.

    “미, 미친!!!!”

    펑.

    내 말 한마디에 정말로 그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정령계에서 누워 있던 건지 한쪽 팔로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미친? 오랜만에 불러내서 하는 말이 고작 미친?”

    그리고 미치도록 정겨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틱틱 대긴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느낌이랄까.

    “대박!!!!”

    “뭐예요?!!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어!!”

    “우와, 마법 같은 거예요?!”

    샐라임의 등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악, 뭐야. 나 애기들 싫어한다고!”

    “그게 애기들 앞에서 할 말이에요? 샐라임.”

    “그쪽이… 샐라임……? 상급 정령은 처음 보는데 인간의 형상인가?”

    베탄이 턱을 쓸며 혼자 중얼거렸다. 기껏 해 봤자 불사조나 용 같은 정령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자신만큼 건장한 남자가 등장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나, 너를 지켜 주는 정령인 거야……?”

    “맞아요.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죠.”

    엄밀히 따지면 오랜만은 아니지만 평소에 맨날 붙어 있던 것에 비하면 정말 간만인 것 같은 샐라임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인간형 정령……. 동고동락……?”

    “뭐야, 너 불만이야? 루나를 괴롭혔다간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샐라임은 괜히 오버하는 건지, 진심인 건지 베탄에게 틱틱 대기 시작했다.

    “이쪽은 샐라임, 이쪽은 베탄 선생님.”

    “암. 난 그쪽에 대해 아주 잘 알지.”

    “절 아신다고요?”

    “그럼, 루나가 너네 집에 가려고 온갖 쌩난리를…읍!”

    내가 급하게 샐라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고! 베탄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샐라임의 등을 팡팡 때리며 정신 좀 차리라고 구박하자 샐라임은 그제야 정숙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나는 왜 부른 거지?”

    베탄과 정령 이야기를 하다가 실수로 부른 거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샐라임이 삐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난 이렇게 ‘샐라임’ 한마디 외침으로 소환될 줄은 몰랐다고.

    “왜 부른 거냐니까?”

    서로 짠 것처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던 우리를 향해 샐라임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샐라임, 베탄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 너머의 아이들을 한 번 훑고는, 말했다.

    “애들 좀 놀아 줘요.”

    “뭐, 뭐?!”

    “이제 자야 하는데, 애들을 재우고 자야 한단 말이에요. 샐라임이 재우는 걸 좀 도와줘요. 딱 보니 아이들도 샐라임이랑 놀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지금 감히 이 샐라임에게 그런 부탁을……!”

    “어차피 저에게 귀속되어 저를 지켜주는 게 이 약속의 의무였잖아요. 그러니까 주인인 제가 잠에 잘 잘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일인 거죠. 안 그래요? 어차피 샐라임은 제가 소환하지 않으면 정령계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대기만 타고 있으니까요.”

    “너 어떻게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거냐……!”

    “정령국에서 하던 이야기를 몰래 들어 놨죠.”

    “후……. 알겠어. 그런데 애들이 과연 나한테 다가올까?”

    “애들이 불장난이라면 환장하잖아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렇게 나는 샐라임을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쏙 밀었다. 샐라임은 ‘두고 보자’라는 눈빛을 나에게 쏜 뒤, 어색한 몸짓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꺄르르 웃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나와 베탄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좀 쉴 수 있었다.

    “대단한걸, 루나. 정령과의 친화력이 아주 좋은가 봐.”

    “하하. 샐라임이 착한 거죠, 뭐.”

    아이들은 샐라임을 따라 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나와 베탄은 한적한 잔디밭 위에 둘이 앉아 있었다.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 선선한 바람, 그리고 포근한 담요에 나는 점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이만 들어갈까?”

    “네? 어딜요?”

    그러자 베탄이 손가락을 들어 건물 안을 가리켰다.

    “침실이 있어. 들어가서 쉬자.”

    “…….”

    기분 탓이었을까, 베탄의 얼굴에선 아까 나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의 표정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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