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24시간이 모자라(4)
순간 내 얼굴이 얼어붙었다. 오히려 그의 눈을 피하면 이상해 보일 것만 같아서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무, 슨, 소, 리, 세요?”
젠장, 내가 내뱉어 놓고도 너무 이상한 말투였다. 하지만 괜찮아. 베탄은 이런 거에 기민한 편이 아닐 거야.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고.
“루나, 어디서 태어났어?”
“……!”
그런데 이 남자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내 출신에 관한 질문 말이다! 정말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을 거라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지, 집에서 태어났죠.”
그러자 그가 픽, 하고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아니, 출생 지역 말이야. 머리색을 봐서는 북쪽 지역 같기도 한데, 그쪽은 회갈색빛이 더 돌아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갑자기 호구 조사를 하는 거지? 난 북쪽 지역에 회색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산다는 것조차 지금 처음 알았다고.
“그, 그건…….”
“응.”
“…사실 저도 몰라요. 저는 진짜 딸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엄마, 언니, 오빠들의 구박을 많이 받곤 했죠. 저번에 말했듯이 감금을 당한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에요…….”
“이런, 내가 괜한 걸 물었군. 미안해.”
나는 뜻하지 않은 동정심 유발로 그의 질문을 막을 수 있었다.
진실을 말한 것일 뿐인데… 그렇게 안쓰러운 눈동자로 보지 말라고. 난 괜찮으니까.
“그, 그럼 어서 저녁을 만들까요?”
빠른 화제 전환을 위해 내가 먼저 주방을 찾아 들어갔고, 아까 사 왔던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먼저 야채를 손질할게요.”
베탄에게 말을 하며 수도꼭지의 물을 틀었을 때였다. 내 손에 물이 닿자마자 그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아냐, 내가 할게. 이리 줘. 손 닦아.”
그러고는 수건을 내밀더니 나에게 손을 닦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 모를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물을 끓이고 있을게요.”
그러자 베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사냥감이라도 발견한 뱀처럼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다.
“하지 마. 그냥 있어. 여기 앉아.”
“왜요? 저 베탄을 도우러 온 건데요?”
“그러면 그냥 옆에서 앉아서 나한테 지시해.”
“그러니까, 왜요?”
내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자 베탄이 고개를 모로 숙이며 대답했다.
“궁금한 것도 참 많네. 네가 자꾸 움직이면 정신이 사납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내 턱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아니잖아요.”
“…….”
“누가 봐도 아닌 얼굴인데. 절 속이려면 더 치밀하셔야 할걸요?”
내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그가 졌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괜한 걱정이 들어서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것 알지만 내가 노심초사하는 거야.”
그는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는가 하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알겠어요. 그러면 저는 여기 앉아서 말만 할게요. 제 마음은 굉장히 불편하지만 선생님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야 낫죠.”
“…고마워.”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은 잘 들어야지, 암.
나는 주방 중앙보다 약간 위쪽에 의자를 갖고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의자에 다리를 쪼그려 앉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흰색 셔츠를 차려입은 베탄은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굵은 팔뚝과 힘줄이 그대로 나타났다. 게다가 오랜 운동과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남자에 관심이 없는 여자도 한 번쯤은 안겨 보고 싶게끔 만드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두껍게 발달된 허벅지 때문에 타이트하게 감싸오는 바지가 이토록 섹시할 수가 없었다. 전생의 삶을 살 때도 남자는 허벅지라고 외쳤던 나였다. 벗겨 보면 어떨까, 하는 음란한 생각까지 이르렀지만 나는 탐스러운 것일수록 아껴 먹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러다 나는 순간 내가 그를 욕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여자들은 너무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버릇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윤리적인 선만 지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탕! 탕! 탕! 탕!
그가 도마에 당근을 대고 칼로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은 특정한 곳으로 쏠렸다.
당근을 부여잡은 커다란 손.
저 정도면 여자의 두 팔목 정도는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팔을 위로 들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 시킨 뒤, 아래에선 바쁘게 일을 해야만 하겠지.
베탄은 템트의 꿈에 나오지 않았기에 그와는 살을 맞댄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가 오늘따라 미친 것인지 계속해서 그를 야릇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부터 허벅지, 그의 발목까지 눈으로 맛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인걸.”
베탄이 곁눈질을 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사탕을 몰래 먹다 걸린 아이처럼 깜짝 놀라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뭐야, 진짜 들킨 사람처럼. 괜찮은 거야?”
그러자 그가 다가와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묘한 상상을 하던 손바닥이 내 몸을 쓸자 긴장이 올라오며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괜, 괜찮아요.”
“얼굴이 빨간데. 여기 좀 봐 봐.”
이번엔 그가 내 팔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양 볼을 부여잡고는 내 얼굴을 확인했다.
“진짜 괜찮다니까……!”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나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기가 어려웠을 뿐이었다.
“눈도 못 마주치네. 죄지은 아이처럼 말이야.”
“……!”
“대답해 봐. 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던 거야? 나를 두고 음험한 생각이라도 한 거냐고.”
“아니, 그러려던 게 아니라……!”
“뭐야, 정말이었어? 하하, 감히 선생님을 상대로 음탕한 마음을 품었구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웃고 있어도 가려지지 않는 매서운 눈매 때문에 내 몸이 저절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그의 앞에서는 한없이 어린 아이가 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아까 베탄이 돌보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된 것처럼 내 시선이 홀린 듯이 그의 입술에 꽂혔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잠시 멈칫한 그는 나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려 내 목 부근으로 가져갔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목 언저리를 살살 쓸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흐…으…….”
목 위로 드러난 쇄골 부분을 지분거리기도 하다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기도 했다. 마치 애무를 하는 듯한 끈적이는 그의 손길에 나는 잔뜩 몸 내부에서 뜨거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대체… 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몸을 비틀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입술을 내 귓가에 바짝 갖다 대고는 작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 번만 더 그렇게 쳐다보면 지금처럼 끝나지 않을 거야.”
그는 경고와도 같은 말을 뒤로 한 채 나를 잡아먹을 듯이 다가왔던 의자에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양파 하나를 집더니, 칼로 썰기 시작했다.
“뭐, 언제는 제가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다면서요.”
말을 내뱉으며 베탄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
이름: 베탄 오스가르드
나이: 21
직위: 램클리프 마법협회의 총기사단장
호감도: 52%
+
7% 상승이었다. 벌써 호감도의 반절을 넘겨버린 베탄은 세이먼과 에르셈프를 따라잡을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따라오고 있었다.
“한순간에도 사람의 이미지는 변할 수 있지. 갑자기 내가 너를 보며 나쁜 마음을 품게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거야.”
그는 깊은 냄비를 국자로 휘저었다. 호박의 달콤한 냄새가 풍겨 오고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의 엇갈림.
베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독심술사도 아니었기에, 그를 노려본다고 해서 별다를 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눈에 힘을 풀고는 긴장되었던 몸을 편하게 의자에 밀어 넣었다.
“제가 선생님을 남자로 바라본다고 해도 선생님한텐 제가 여전히 여자가 아니에요?”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따로 시장에 나와 데이트를 하며, 머리띠까지 골라 주었는데, 이거 정말 그린 라이트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자 베탄이 하던 일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얘가 왜 이래?”
“데이트잖아요. 선생님과 제가 하는 첫 번째 데이트.”
“그런 의미 부여는 남자 친구랑 가서 하세요, 아가씨.”
“허. 선생님 이거 다 유죄야. 은근슬쩍 발 빼기 있어요?”
“유죄……?”
마음 없는 사람한테 살갑게 구는 거, 다 유죄라고! 그렇게 완벽하게 생겨서 아무한테나 플러팅 하지 말란 말이야-.
괜히 오기가 생기는 것만 같았다. 언제는 내가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다는 이유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굴더니, 지금은 완전히 거리 두기 태세잖아.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바로 잡아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대변하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베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나를 본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어렸지만 잠자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
그의 앞에 다다른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파묻히고 싶었던 그의 넓은 가슴팍으로 내 몸을 욱여넣었다.
“!!”
“선생님. 알잖아요.”
“너 설마……!”
“맞아요. 그거. 잊지 않으신 거죠? 제 고, 백, 이요. 제 마음은 변치 않았답니다.”
내가 고개를 푹 묻으며 작게 중얼거리자 그가 살며시 손바닥으로 내 뒤통수를 받쳤다.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쌌다.
“봐 봐요. 선생님도 이렇게 절 안아 주시면서.”
“불가항력이었을 뿐이야.”
“그럼 지금이라도 그만……!”
내가 그의 품에서 몸을 빼내려 하자 그가 단단한 팔뚝으로 나를 다시금 가두었다. 움직일 틈조차 없어 그와 몸을 밀착하게 되었고, 나는 이때다 싶어 베탄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저 습관적인 것이었던 건지.
그런데 베탄은 내 턱에서부터 귀까지 내 살 내음을 맡듯 코를 들이밀며 얼굴을 움직였다. 간지러운 느낌에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만히 있어. 지금 좋으니까.”
“…….”
“나뿐만 아니라 너도…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속삭인 베탄은 내 귀 옆쪽 머리카락 위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